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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펌] 대륙을 누빈 백제(상) - 백제는 언제부터 대륙을 평정했을까?

나는 이번에 지금까지 종합적으로 다뤄보고 싶었지만 내 머리 속에 맴돌기만 하던 백제의 대륙진출을 드디어 머리 속에서 끄집어내고자 한다. 사실 오래전부터 생각은 해뒀지만 이것을 종합적으로 글로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제부터 여러 자료들을 보며 내가 생각해본 대륙백제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백제의 대륙진출 여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존재한다. 우선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백제의 대륙 진출은 매우 간략한 편이다. 백제가 중국대륙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차지했는지 나오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냥 요서에 진출했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간다. 이 진출의 기준이 요서를 지배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무역활동인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이건 상당히 성의가 없고 무책임하다고 봐야한다. 게다가 교과서에 나오는 지도를 보면 그냥 화살표만 그어놓고 진출이라고 적어놓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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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백제의 영토로 삼았는지 아닌지 애매하게 화살표만 그어놓고 진출이라고 적어놓았을 뿐이다.

 

식민빠들은 교과서에 고작 이 정도 나오는거 가지고 국사 교과서가 오히려 국수주의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주류 강단사학자들이 민족주의적이라서 백제의 대륙진출을 인정하고 교과서에 넣은 것은 아니다. 내가 예전에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이것이 교과서에 나오는 이유는 그냥 욕 먹기 싫으니까 대충 넘어가려는 것일 뿐이다. 내가 누누히 말해왔지만 식민사학은 껍데기만 바꿀뿐 그 뼈대는 결코 바뀌지 않으며, 저들은 설사 식민사학자가 아니라고 쳐도 매우 무책임한 자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가 생각해본 백제의 대륙진출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에 들어가겠다. 우선 백제가 요서를 공략한 시기를 밝히겠다. 우리는 여기서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간다는 생각으로 기록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며 실마리를 풀어보자.

 

<송서> 백제국은 본디 고려(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었으며, 그 뒤에 고려는 요동을 공략하여 가지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가지게 되었다. 백제가 다스리던 곳을 일컬어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

                                                                                                   

<양서> 백제는 본래 구려(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으나, 진(晉)나라 때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여 가지자, 백제 역시 요서군과 진평군의 땅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했다.

 

위에서 본 중국 측 기록인 <송서>와 <양서> 등이 백제가 중국대륙의 요서 지방을 차지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다시피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여 차지하자 백제가 요서를 공략하여 차지하였고, 백제가 요서의 진평군을 다스렸다는 것이다. 이 기록들을 보면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자 백제가 요서를 공략했다는 것이다. 즉 백제가 요서를 공략한 시기는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한 이후이며, 고구려의 요동 공략과 백제의 요서 공략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힌트를 얻었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한 시기를 알면 백제가 요서를 공략한 시기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참고로 백제의 대륙진출을 부정하는 이들은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시기는 광개토태왕 때이며 그 당시 백제는 고구려에 밀려 약해질대로 약해졌으므로 요서를 차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록들을 살펴보면 광개토태왕 이전에도 고구려는 요동을 공략한 적이 많았다. 한번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보겠다. 광개토태왕 이전에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기록들만 골라 보았다.

 

모본왕 2년(서기 49년),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북평(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쳤으나, 요동태수 제융(祭肜)이 은혜와 신뢰로 대우하였으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태조대왕 53년(서기 105년),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의 요동에 들어가 여섯 현을 약탈하였다. 태수 경기(耿夔)가 군사를 내어 막으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태조대왕 59년(서기 111년), 사신을 한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도(玄菟)에 복속하기를 구하였다. <통감(通鑑)에 이르기를『이해 3월에 고구려 왕이 예맥과 함께 현도를 쳤다.』고 하였으므로, 혹 속하기를 구하였는지 또는 침략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는 잘못일 것이다.>

 

태조대왕 66년(서기 118년) 여름 6월, 왕은 예맥과 함께 한나라의 현도를 치고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태조대왕 69년(서기 121년), 봄에 한나라의 유주(幽州) 자사(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략해 와서 예맥의 우두머리를 쳐서 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모두 빼앗아 갔다. 왕은 이에 아우 수성(遂成)을 보내 군사 2천여 명을 거느리고 풍환, 요광 등을 역습하게 하였다. 수성은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였는데 풍환 등이 이것을 믿었다. 수성은 그에 따라 험한 곳에 자리잡고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 명을 보내, 현도·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사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여름 4월, 왕은 선비 8천 명과 함께 가서 요수현(遼隊縣)을 쳤다. 요동태수 채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新昌)으로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공조연(功曹掾) 용단(龍端), 병마연(兵馬掾) 공손포(公孫酺)가 몸으로 채풍을 [보호하여] 막았으나 모두 진영에서 죽었으며, [이때] 죽은 자가 100여 명이었다.

 

12월, 왕은 마한(馬韓),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싸웠으므로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태조대왕 70년(서기 122년), 왕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깨뜨렸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서기 9)에 멸망하였다. 지금 고구려 왕과 함께 군사를 보낸 것은 아마 멸망한 후 다시 흥한 것인가?>

 

동천왕 12년(서기 238년), 위나라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치니, 왕은 주부(主簿), 대가(大加)를 보내 군사 천 명을 이끌고 그것을 돕게 하였다.

 

동천왕 16년(서기 242년), 왕은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미천왕 12년(서기 311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미천왕 20년(서기 319년) 겨울 12월, 진(晉)나라 평주자사 최비(崔毖)가 도망쳐 왔다. 이전에 최비가 은밀히 우리 나라와 단씨(段氏)·우문씨(宇文氏)를 달래어 함께 모용외를 치게 하였다. 세 나라가 극성(棘城)을 공격하자 [모용]외가 문을 닫고 지키며 오직 우문씨에게만 소와 술[牛酒]을 보내 위로하였다.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외가 음모한다고 의심하고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우문씨의 대인(大人) 실독관(悉獨官)이 “두 나라가 비록 돌아갔으나 나는 홀로 성을 빼앗겠다.”고 하였다. [모용]외가 그 아들 황(皝)과 장사(長史) 배의(裵嶷)를 시켜 정예군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거느리고 뒤를 따랐다. 실독관이 크게 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최비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의 형의 아들 도(燾)를 시켜 극성(棘城)으로 가서 거짓으로 축하하게 하였다. [모용]외가 군사를 이끌고 맞이하니, [최]도가 두려워 머리를 조아려 사실을 고하였다. [모용]외가 [최]도를 돌려보내고 [최]비에게 “항복하는 것은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은 하책이다.”라고 말하고, 군사를 이끌고 뒤따라 갔다. [최]비가 수십 기마병과 함께 집을 버리고 [우리 나라로] 도망쳐 오고, 그 무리가 모두 [모용]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외가 그 아들 인(仁)으로 하여금 요동을 진무(鎭撫)하게 하니 관부와 저잣거리가 예전과 같이 안정되었다. 우리나라 장수 여노(如孥)는 하성(河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모용]외가 장군 장통(張統)을 보내 습격해서 그를 사로잡고, 그 무리 천여 가를 사로잡아서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은 자주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략하였다. [모용]외가 모용한(慕容翰)과 모용인을 보내 [우리를] 치게 하였는데, 왕이 맹약을 구하자 [모용]한과 [모용]인이 돌아갔다.

 

미천왕 21년(서기 320년), 겨울 12월,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략하였는데, 모용인이 막아 싸워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고국양왕 2년(서기 385년) 여름 6월, 왕은 군사 4만 명을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나라 왕 [모용]수(垂)가 대방왕 [모용]좌(佐)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에 진주하게 하였다. [모용]좌는 우리 군대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司馬) 학경(郝景)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우리 군대가 그들을 쳐서 이기고,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했다고 말할 수 있는 기록들을 전부 다 모은 것이다. 일단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한 기록들을 전부 다 모은 것이기 때문에 다소 복잡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쉽게 간추리자면 고구려가 광개토태왕 이전에 요동을 공략했을 것으로 보이는 시기들은 모본왕,태조대왕,동천왕,미천왕,고국양왕 때라고 볼 수 있다. 연도로 따지면 49년(모본왕 시기), 105년,111년,118년,121년,122년(태조대왕 시기), 238년,242년(동천왕 시기), 311년, 319년,320년(미천왕 시기), 385년(고국양왕 시기)이다. 그렇다면 백제가 요서를 공략한 시기는 이 시기들과 비슷한 시기들 중 하나인 셈이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대륙에 백제의 영토를 마련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의 왕은 다루왕,기루왕,고이왕,비류왕,침류왕,진사왕 등 6명으로 축약된다. 이로써 우리는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의 답에 조금 더 가까워진 셈이다.

 

여기서 확실한건 다루왕,기루왕,고이왕,비류왕,침류왕,진사왕 등 고구려의 요동 공략 시기와 같은 시기에 6명의 백제 왕들 중에 <송서>와 <양서>에서 나오는 기록대로 요서를 공략한 왕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 이제 다시 고구려 측의 기록과 백제 측의 기록들을 보며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를 향해 거리를 좁혀 보자.

 

이제 앞서 본 고구려의 요동 공략 기록들을 다시 보면서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우선 앞서 본 고구려의 요동 공략 기록들 중에 모본왕 2년(서기 49년)과 같은 시기의 백제 왕은 2대 다루왕이다. 그런데 다루왕 시기에는 백제가 요서를 공략했다고 볼 수 있는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다루왕은 처음으로 대륙에 진출한 왕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럼 이제 모본왕 시기는 넘어가고 태조대왕 시기를 보자. 우리가 그 중에서 관심있게 봐야 할 기록은 태조대왕 69년,70년(서기 121년,122년)의 기록이다. 이 기록들을 다시 한번 보자.

 

태조대왕 69년(서기 121년) 12월, 왕은 마한(馬韓), 예맥의 1만여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한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싸웠으므로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태조대왕 70년(서기 122년), 왕은 마한, 예맥과 함께 요동을 쳤다. 부여왕이 군사를 보내 [요동을] 구하고 [우리를] 깨뜨렸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서기 9년)에 멸망하였다. 지금 고구려 왕과 함께 군사를 보낸 것은 아마 멸망한 후 다시 흥한 것인가?>

 

이 기록들을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존재가 있다. 그건 바로 '마한'이다. 이 기록들을 보면 태조대왕이 중국의 요동군을 공격할때 예맥과 더불어 마한의 군사를 동원하고 있다. 고구려가 마한과 함께 군사활동을 한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마한은 백제일 가능성이 있다. 여러 사서들이 백제와 마한을 혼동하는 경우가 제법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단재 신채호 선생도 이 태조대왕과 함께 군사활동을 한 마한이 백제라고 주장했다. 만약 태조대왕 때의 마한이 백제라면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였고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면서 백제 또한 요서를 공략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나는 이게 제법 그럴듯 하다고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냥 결론을 내리기에는 근거가 확실하지 않고 뭔가 찝찝하다.

 

태조대왕이 마한의 군사를 동원하여 요동군을 공격하던 시기는 백제의 3대 기루왕 시기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기루왕 때에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군사활동을 한 기록이 없으며 대륙진출로 보이는 기록 또한 없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이 태조대왕 70년(서기 122년) 기사에 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서기 9년)에 멸망하였다. 지금 고구려 왕과 함께 군사를 보낸 것은 아마 멸망한 후 다시 흥한 것인가? 라고 의문을 남긴 것을 보면 이 기록의 마한이 어쩌면 백제도 아니고 마한도 아닌 제 3의 존재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긴다. 그러므로 이것을 백제가 요서 공략을 했다는 증거로 삼기에는 근거가 부족하고 찝찝함이 남는다. 게다가 기루왕 시기의 백제가 대륙에 영토를 마련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였다고 보기가 힘들다. 그러니 이것은 일단 넘어가는게 좋다. 그러나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두자.

 

우리는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에 대한 실마리를 더 빨리 풀 수 있는 지름길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아쉬움을 잠시 뒤로 하고 다시 기록들을 조금 더 살펴보자. 백제본기에 고이왕조의 기록을 보겠다. 우리는 이제부터 고이왕조의 기록에 집중을 해야 할 것이다.

 

고이왕 13년(서기 246년) 가을 8월,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왕은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民口]들을 돌려주었다.

 

우리는 이 기록을 특히 주목해야 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삭방태수 왕준과 함께 고구려를 치자 백제의 고이왕이 그 틈을 타서 진충을 보내 낙랑을 습격했다고 한다. 내 블로그를 자주 방문하신 분들이라면 내가 여태껏 제일 강조해온 주장이 무엇인지 다들 잘 알 것이다. 그렇다.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참고로 꾸준히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으며 요서 또는 요동에 있었다고 강조해왔다. 나는 예전에 쓴 글에서 한사군의 위치만 바뀌어도 한국 고대사가 송두리채 바뀐다고 말했다. 지금 이 경우가 바로 그 경우다. 혹시 내 블로그에 처음 방문하시는 분이라면 내가 한사군 재한반도설에 대해서 반박한 글들을 많이 올려놨으니 많이 보고 참고하시길 바란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앞에서 본대로 서기 246년에 백제의 8대 고이왕이 한사군의 낙랑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참고로 내가 한사군이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다들 잊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닌 요서에 있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그러니까 이 기록에 따르면 서기 246년에 백제의 고이왕은 요서를 공격한 것이다. 참고로 윤내현 교수는 이것을 두고 서기 246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하여 유주가 비어 있는 틈을 이용하여 백제의 고이왕이 그곳을 공격하여 지금의 북경과 천진지역에 백제군을 설치하였다고 주장했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뿐만 아니라 중국 측 기록인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에서도 나온다.

 

위나라 경초(景初) 연간(237~239)에 명제(明帝)는 몰래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 · 낙랑태수(樂浪太守) 선우 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2군(郡)을 평정하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들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綏)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들에게는 읍장(邑長)이란 벼슬을 주었다.

 부종사(部慫事) 오림(吳林)이 낙랑(樂浪)에서 원래 한국(韓國)을 관할했다는 이유로 진한(辰韓)의 8개의 나라를 분할하여 낙랑(樂浪)에 주려고 했는데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잘못 옮겼다. 그러자 신지(臣智)가 한(韓) 백성들을 격분시켜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두 군은 마침내 한(韓)을 멸망시켰다.

 

우리가 위에서 집중해서 봐야 할 것은 밑줄을 친 부분인데, 위의 밑줄 친 부분을 요약하자면 마한의 신지가 한사군의 대방군을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는 위의 기록과 방금 전에 살펴본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이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위의 두 기록에서 공통적으로 낙랑태수 유무가 등장한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다만 <삼국지>의 '대방태수 궁준'이 <삼국사기>에서 '삭방태수 왕준'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즉 <삼국지>에 나오는 한(韓)은 백제이며 마한의 신지는 백제의 고이왕이다. 다시말해 이 두 기록은 같은 사건을 적은 기록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한(韓)을 멸망시켰다는 부분은 중국 측의 고의적인 왜곡으로 봐야 한다. 사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예전에 간략하게 다룬 바가 있다. http://blog.naver.com/cldnastp/70150459268 

 

이로써 우리는 우리 측의 기록인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중국 측의 기록인 <삼국지>에서도 백제의 대륙진출로 보이는 기록을 발견한 셈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잠시 딴 길로 세어야 할 듯 싶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에는 큰 상관은 없지만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삼국지>의 기록에 연도를 보면 '위나라 경초 연간'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경초란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명제 조예(조조의 손자)의 3번째 연호인데, 경초 연간이라는 것은 서기 237년~239년이다. 우리는 앞서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백제의 고이왕이 낙랑군을 침입한 기록이 <삼국지>에서 마한의 신지가 대방군을 공격해 대방태수 궁준을 죽인 것과 같은 기록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삼국사기>에서 고이왕이 낙랑군을 공격한 시기는 서기 246년이다. 그런데 <삼국지>에서는 이 사건이 경초 연간, 즉 서기 237년~239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같은 사건인데 연도가 대략 7년에서 9년 정도라는 매우 긴 차이가 나는 것이다. 우리는 잠시 여기서 혼란이 올 수 있다. 그러나 혼란을 가질 필요는 없다. 이건 혼란이 올 가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삼국지>의 기록을 잘 보면 마한의 신지가 대방군을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이 전사한 시기가 서기 237~239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번 <삼국지>의 또 다른 기록을 보자.

 

정시 6년(245)에 영동(嶺東)[단단대령(單單大嶺) 동쪽]의 예가 고구려의 지배 아래 들어가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은 군사를 일으켜 공격했다. 불내후(不耐侯) 등은 수하의 마을을 들어 항복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정시 6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영동의 예를 공격했다고 한다. 여기서 정시는 위나라 명제 조예의 4번째 연호이다. 그리고 정시 6년은 서기 245년이다. 이 기록을 보면 대방태수 궁준이 서기 245년에 멀쩡히 살아남아 예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니까 마한의 신지가 대방군을 공격한 것과 대방태수 궁준이 죽은 것은 서기 237년~239년에 일어난 사건이 아닌 것이다. 사실 위에서 본 <삼국지>의 기록에서 밑줄을 안 친 부분은 경초 연간인 서기 237년~239년에 일어난 일이 맞다. 그러나 우리가 제일 중요하게 봐야 하는 부분인 밑줄을 친 부분, 즉 마한의 신지가 대방군을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시킨 것은 서기 237~239년에 일어난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이 <삼국사기>와 연도가 매우 오차가 난다며 두 기록이 서로 다른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료를 잘못 읽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삼국지>에서 마한의 신지가 대방군을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시킨 시기는 언제일까?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던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고이왕조의 기록을 다시 한번 보자.

 

고이왕 13년(서기 246년) 가을 8월,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왕은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民口]들을 돌려주었다.

 

우리는 여기서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쳤다는 것을 주목하자. 참고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246년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의 태왕은 11대 동천왕이다. 이것은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알 것이다. 여기서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던 틈을 타 백제의 고이왕이 낙랑군을 공격했다는 것은 곧 백제가 낙랑군을 공격한 시기가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시기와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과 같은 사건인 <삼국지>에 나오는 마한의 신지가 대방군을 공격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시킨 것 또한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시기와 같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삼국지>에서는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시기가 서기 244년이라고 나온다. 그럼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삼국사기>에서는 서기 246년이며 <삼국지>에서는 서기 244년인 것이다. 이 두 기록은 2년의 오차가 나기는 한다. 그러나 2년의 오차 정도는 그렇게 신경 쓸 것은 아니다. 게다가 백제본기 뿐만 아니라 고구려본기 또한 위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서기 246년이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론은 백제의 고이왕이 낙랑군을 공격한 시기는 서기 244년 또는 246년인 것이며 <삼국사기>와 <삼국지>의 기록은 같은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순조롭게 잘 가다가 딴 길로 세어서 잠시 혼란이 오거나 지루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매우 미안하며 사죄를 드린다. 사실 이런 별 신경 쓸 것도 없는 연도 차이 하나가지고 설명하는데 이렇게 시간을 잡아먹은 이유는 <삼국사기>와 <삼국지>에 나온 두 기록이 같은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에 연도 차이 때문에 서로 다른 기록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내가 이런 것에 그냥 넘어가기에는 너무 찝찝한지라 어쩔 수 없이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를 설명하는데 별 쓰잘데기 없는 설명을 하게 되었다. 괜히 잘 나가다가 맥을 끊게 되어 미안하다. 잠시 딴 길로 센 부분은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를 밝히는데 큰 변수가 아니니 그냥 잊어도 좋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우리는 앞서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요서 공략으로 보이는 기록을 기록을 찾아냈고 이것이 중국 측 기록인 <삼국지>에서도 나온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요서를 공략한 백제의 왕이 고이왕일 것이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도출해냈다. 이쯤에서 다들 스스로에게 수고했다며 박수를 쳐도 좋다. 이제 그 끝을 향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지금까지 지루했어도 조금만 더 참도록 하자.

 

그런데 우리가 잠시 잊어버린게 있다. 우리는 앞에서 <송서>와 <양서>에서 말하는 고구려의 요동 공략 시기를 알면 자연스럽게 백제의 요서 공략 시기를 알 수 있다는 것을 밝혔으며 고구려의 요동 공략 시기를 살펴보며 백제의 요서 공략 시기를 밝혀내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고이왕이 요서를 공략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을 살펴보다가 고구려의 요동 공략 시기를 살펴보던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동천왕 시기에 요동을 공략했다고 볼 수 있는 기록들을 다시 한번 더 살펴보자.

 

동천왕 12년(서기 238년), 위나라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치니, 왕은 주부(主簿), 대가(大加)를 보내 군사 천 명을 이끌고 그것을 돕게 하였다.

 

동천왕 16년(서기 242년), 왕은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우리는 위의 기록들 중에서 밑줄 친 동천왕 16년(서기 242년)의 기록을 주목하자. 이것을 요약하면 서기 242년에 동천왕이 요동군 서안평현을 점령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고구려의 요동 공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 이제 이와 같은 시기의 백제 왕이 누구인지 보겠다. 이와 같은 시기의 백제 왕은 고이왕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고이왕이 요서를 공략했을 것으로 보이는 기록을 살펴보았다. 그럼 이제 동천왕의 요동 공략과 고이왕의 요서 공략이 과연 <송서>와 <양서>에 나오는대로 서로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일인지 비교를 해보겠다.

 

동천왕 16년(서기 242년), 왕은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고이왕 13년(서기 246년) 가을 8월, 위(魏)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와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과 더불어 고구려를 쳤다. 왕은 그 틈을 타서 좌장 진충(眞忠)을 보내 낙랑의 변방 주민들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유무가 이를 듣고 노하자 왕은 침공을 받을까 염려하여 그 사람[民口]들을 돌려주었다.

 

우선 동천왕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한 시기는 서기 242년이다. 그리고 고이왕이 지금의 요서 지방인 낙랑군을 공격한 시기는 서기 246년이다. 이 두 사건의 시간 차이는 불과 4년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요동 공략이 백제의 요서 공략보다 더 먼저 일어난 일이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자 백제가 요서를 공략했다는 <송서>의 기록과 일치한다. 한번 우리가 이미 앞에서 본 <송서>의 기록을 다시 한번 보자.

 

고려는 요동을 공략하여 가지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공략하여 가지게 되었다.

 

보다시피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자 백제가 요서를 공략했다고 한다. 이것은 곧 고구려의 요동 공략과 백제의 요서 공략이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것이며 고구려의 요동 공략 이후에 백제의 요서 공략이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고이왕의 낙랑군 공격은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앞에서 확인했지만 고구려의 동천왕이 요동 서안평을 점령한 시기는 서기 242년이다. 그리고 고이왕이 낙랑군을 공격한 시기는 그로부터 불과 4년 뒤인 서기 246년이다. <삼국지>를 기준으로 하면 불과 2년 뒤인 서기 244년이다. 이것은 <송서>의 기록과 어긋난게 없다. 이로써 우리는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를 밝혀냈다.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는 고이왕 13년인 서기 246년 또는 244년인 것이다.

 

그런데 약간의 문제가 있다. <양서>에서는 백제는 본래 구려(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에 있었으나, 진(晉)나라 때 구려가 이미 요동을 공략하여 가지자, 백제 역시 요서군과 진평군의 땅에 자리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했다. 라고 기록하여 백제의 요서 공략이 중국의 진(晉)나라 때에 일어난 일이라고 나오는 것이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고이왕의 요서 공략은 중국의 위나라 때에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양서>에서는 그보다 뒤인 진나라 때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여 서로 어긋난다. 그러나 이건 크게 문제될게 없다. 위나라와 진나라(서진)는 서로 비슷한 시기이기 때문에 충분히 착각할 수 있다. 그래도 이것에 대해 정확히 짚고 넘어가겠다.

 

<송서>에서는 백제가 요서를 공략한 시기가 진나라 때라고 나오지 않는다. 백제가 요서를 공략한 시기가 진나라 때라고 나오는 것은 <양서>이다. 그래서 나는 <송서>에서는 백제의 요서 공략이 진나라 때라고 나오지 않는데 <양서>에서는 백제의 요서 공략 시기가 진나라 때라고 나오는 이유가 뒤에 <송서>의 내용에서 덧붙여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본다. 다시말해 <양서>에서 백제의 요서 공략 시기가 진나라 때라고 나오는 것은 <송서>의 내용에서 덧붙여진 것이다. 사실 <송서>는 중국 남북조시대 남제의 심약이 서기 488년에 편찬한 사서이다. 그리고 <양서>는 당나라의 요사렴이 서기 629년에 편찬한 사서이다. 즉 <양서>가 <송서>보다 더 뒤에 만들어진 책이다. 그러므로 <양서>가 <송서>의 내용에서 더 상세하게 백제의 요서 공략 시기가 진나라 때라고 덧붙인 것이며 본래 <송서>에서 나오는 백제의 요서 공략 시기는 진나라 때가 아닌 위나라 때였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왜 <양서>는 백제의 요서 공략 시기가 위나라가 아닌 진나라 때였다고 기록했을까? 나는 이것이 잘못된 기록은 아니라고 본다. 분명 <양서>를 편찬한 요사렴이 보기에는 백제의 요서 공략이 진나라 시기에 일어난 것으로 보이기에 이것을 덧붙였을 것이다. 그럼 요사렴은 무엇을 보고 백제의 요서 공략이 진나라 때에 일어난 것이라고 덧붙였을까? <삼국사기>를 보면 그 해답이 나온다.

 

분서왕 7년(서기 304년) 봄 2월,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이 기록을 보면 백제의 10대 분서왕이 지금의 요서 지방인 낙랑군의 서쪽 현을 빼앗았다고 나온다. 즉 고이왕에 이어 백제가 또 다시 요서를 공략한 것이다. 참고로 이에 대해서 예전에 간략하게 쓴 글이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http://blog.naver.com/cldnastp/70150260465 그런데 분서왕이 낙랑군의 서쪽 현을 점령한 시기는 서기 304년으로, 중국의 서진(西晉) 즉 진(晉)나라 시기이다. 한마디로 진나라 때에 또 다시 요서를 공략한 것이다. 그러니까 요사렴은 이를 두고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자 백제가 요서를 공략했다는 <송서>의 내용에 진나라 때에 일어난 일이라고 덧붙인 것이다. 이로써 <양서>의 기록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이 있다. 그건 바로 고이왕이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한 이유이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만약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닌 요서에 있다면 백제가 대체 왜 바다 건너 요서까지 쳐들어가냐고 의문을 남겼었다. 나 또한 이게 의문이었다. 나는 백제의 요서 공략 시기에 대한 수수께께를 풀고 난 직후에도 이 점이 매우 큰 의문점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서들을 살펴보다가 여러가지 이유들로 추정되는 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우선 이미 앞에서 살펴본 <삼국지>의 기록을 다시 한번 더 보자.

 

위나라 경초(景初) 연간(237~239)에 명제(明帝)는 몰래 대방태수(帶方太守) 유흔(劉昕) · 낙랑태수(樂浪太守) 선우 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2군(郡)을 평정하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들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綏)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들에게는 읍장(邑長)이란 벼슬을 주었다.

 부종사(部慫事) 오림(吳林)이 낙랑(樂浪)에서 원래 한국(韓國)을 관할했다는 이유로 진한(辰韓)의 8개의 나라를 분할하여 낙랑(樂浪)에 주려고 했는데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잘못 옮겼다. 그러자 신지(臣智)가 한(韓) 백성들을 격분시켜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대방태수(帶方太守) 궁준(弓遵)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했으나 두 군은 마침내 한(韓)을 멸망시켰다.

 

위에서 굵게 쓴 글을 주목하자. 위의 기록을 보면 부종사 오림이 진한의 8개의 나라를 분할하여 낙랑에 주려고 하자 마한의 신지가 대방군을 공격했다고 나온다. 우리는 앞에서 위의 기록이 <삼국사기>에서 고이왕이 낙랑군을 공격한 것과 같은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니까 <삼국지>에 따르면 부종사 오림이 진한의 8개의 나라를 낙랑에 주려고 하자 고이왕이 격분하여 대방에 쳐들어간 것이다. 나는 이것이 고이왕이 낙랑,대방을 공격한 이유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만이 이유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해보인다. 나는 그래서 또 다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고구려와 백제의 협력이다. 즉 고이왕의 요서 공략은 백제만의 단독 행동이 아닌 고구려와의 협력을 통해서 나온 결과인 것이다.

 

<송서>와 <양서>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자 백제가 요서를 공략했다는 부분이 마치 고구려의 요동 공략과 백제의 요서 공략이 단순하게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와 백제가 협력을 통해 각자 요동,요서를 점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사실 고구려의 동천왕, 백제의 고이왕 이전에도 앞에서 살펴본 태조대왕 69년,70년(서기 121년,122년)에 고구려와 백제의 협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기록들이 보인다. 비록 앞에서 밝혔듯이 여기서 나오는 마한이 백제라고 단정을 짓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고구려와 백제의 협력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는 기록들이 제법 있다. 게다가 고구려와 백제는 형제국이기도 하다. 충분히 고구려와 백제가 협력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 백제의 고이왕은 그전부터 요서 지방에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의 고이왕조를 보면 그렇게 추정해볼 수 있는 기록이 보인다.

 

고이왕 3년(서기 236년) 겨울 10월, 왕이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하였는데 손수 40마리의 사슴을 쏘아 맞혔다.

 

이 기록은 그대로 보면 단순히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을 한 것으로 보이겠지만 고대의 기록에서 왕의 사냥이라는 것은 단순한 사냥이 아니다. 고대에 왕의 사냥이라는 것은 군사훈련이기도 하다. 더구나 서해의 큰 섬에서 사냥을 했다는 것이 뭔가 석연치 않다. 이건 단순한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어쩌면 고이왕은 서해의 큰 섬에서 서쪽을 바라보며 서해 건너 대륙에 욕심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을 한다면 고구려로서도 매우 이득이다. 당시 중원의 위나라와 대립을 하던 고구려로서는 백제가 위나라의 후방을 위협해준다면 위나라와 싸우는데 드는 부담이 줄어든다. 게다가 백제의 고이왕이 요서를 공략하던 시기가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던 시기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당시 고구려는 유주자사 관구검에 의해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고 고구려의 태왕인 동천왕이 피난을 가는 위기를 겪었다. 그 상황에서 백제를 이용해 위나라의 후방을 공격할 수 있다면 고구려로서는 기회 중에 기회이다. 마침 그 당시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떠났으니 유주는 평소보다 방비가 허술해졌다. 그러니 백제로서도 유주에 속한 낙랑,대방을 치는데 부담이 없다. 더구나 위나라 중앙에서는 중원통일을 위해 오나라,촉나라에 주로 신경을 쓰고 동북쪽은 기껏해봐야 고구려에 신경을 쓰는 정도였다. 결국 이런 조건이 다 맞아떨어져 백제는 고구려와의 적극적인 협력 아래 유주자사 관구검과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 등이 고구려를 치는 사이에 낙랑,대방을 기습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앞서 본 사료들을 통해 종합적인 결론을 내리겠다. 대륙에 백제의 영토를 처음 마련한 왕은 고이왕이다. 백제의 요서 공략 시기는 고이왕 13년인 서기 246년으로, 서기 242년에 고구려의 동천왕이 요동 서안평을 점령한지 4년 뒤의 일이다. 이것은 <송서>와 <양서>에서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자 백제가 요서를 공략했다는 것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협력을 한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와의 적극적인 협력 아래 요서를 공격하여 그곳에 영토를 마련해 진평군을 설치했다. 뒷날 분서왕 7년인 서기 304년에 백제는 낙랑군의 서쪽 현을 점령했는데 이를 보았을때 백제의 해외영토는 낙랑군의 서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낙랑군은 지금의 요서 지방, 즉 난하의 동쪽에 위치했다. 그러므로 백제의 해외영토는 난하 서쪽으로 비정한다.

 

이로써 우리는 모든 실마리가 다 풀린 셈이다. 이제 우리는 이 긴 여정이 끝나게 되었다. 모두들 정말 수고가 많았다. 이제 백제의 대륙진출에 대해 몇몇 정리해둘 것들이 조금 남아있다.

 

내가 인터넷을 돌아다니면서 식민빠들의 온갖 주장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중 어떤 식민빠는 당시의 요서는 위만조선,한사군,백제,선비족 등의 국가와 종족들이 존재하기에는 좁은 땅이라고 하며 "너희 환빠들이 보기에는 요서가 호구로 보이냐?" 라고 말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올 지경이다. 그럼 반대로 식민빠들이 보시기에는 요서는 호구로 안 보이고 한반도 평양은 호구로 보이셔서 단군조선,위만조선,한사군,고구려의 중심지를 모조리 다 한반도 평양으로 쑤셔넣으셨나? 그리고 이것 뿐만 아니라 요서 지방은 모용선비가 세운 전연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백제가 요서에 영토를 마련할 수 없다고 말하는 자들도 있다.

 

내가 보기에는 요서가 비좁기 때문에 백제가 요서에 영토를 마련할 수 없다는 주장이나 요서에 모용선비의 전연이 있기 때문에 백제가 요서에 영토를 마련할 수 없다는 주장이나 둘다 요서가 얼마나 넓은 땅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한번 아래의 지도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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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도에 빨간선 안에 있는 땅이 모두 다 요서다. 요서는 이렇게 넓은 땅이다. 그런데 요서가 비좁아서 한사군과 백제가 다 못 들어간다는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내가 보기에는 다 들어가고도 남을 지경이다. 그리고 요서가 전연의 중심지이기 때문에 백제가 요서에 영토를 마련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또한 역시 논할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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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요서는 시대에 따라 그 위치가 다르다. 위의 지도에서 빨간선 안에 있는 땅이 고대의 요서다. 고대의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기준은 지금의 요하가 아니며 고대의 요수는 지금의 요하가 아니라 지금의 난하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 설명하려면 복잡하니 나중에 설명할 기회가 있으면 설명하겠다. 혹시 이에 대해 궁금하다면 윤내현 교수의 책을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어쨌든 당시의 요서는 지금의 요서와 다른 곳이기 때문에 백제의 해외영토가 전연의 수도인 용성과 겹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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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고대의 요서가 지금의 요서라고 치면 백제가 차지했다는 요서는 위의 지도와 같이 전연 수도인 용성 이남의 해안지대일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요서가 지금의 요서라고 쳐도 결코 전연의 중심지와 겹칠 일이 없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요서는 매우 넓은 땅이다.

 

이 외에도 백제가 전연에 비하면 한참 약하기 때문에 백제가 요서를 점령할 수 없다고 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이미 백제의 요서 공략 시기가 전연보다 더 이전 시기인 서기 246년이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백제는 전연과 싸워서 요서를 점령할 필요가 없다. 이미 전연이 들어서기 전에 요서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백제의 요서 공략이 고이왕 13년인 서기 246년에 일어난 일이라는 나의 주장을 반박하려면 먼저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다는 주장부터 반박해야 할 것이다.

 

백제의 대륙진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들이 존재한다. 글을 마치면서 몇몇 주장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처음으로 대륙에 진출한 왕은 14대 근구수왕이며, 근구수왕이 지금의 요서,북경,산동,강소,절강 등지를 차지하고 하얼빈까지 점령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윤내현 교수는 서기 246년에 고이왕이 지금의 북경과 천진 지역에 백제군을 설치했으며, 그 뒤 백제는 세력을 넓혀 산동성,강소성,절강성 지역까지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광서장족자치구 지역까지도 진출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외에도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 있는데, 백제사 연구의 권위자라고 불리우는 이도학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백제가 대륙에 진출한 시기는 고구려의 광개토태왕, 백제의 아신왕 때라고 한다. 이도학 교수는 후연과 백제가 손을 잡고 고구려와 신라에 맞서고 있었는데,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에 의해 위기에 놓인 후연이 백제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백제가 후연의 요서 지역에 군사를 파견했다고 하며 그 직후 후연이 붕괴되고 고구려에 우호적인 북연이 들어서자 요서에 군사를 파견한 백제의 입장이 모호해져 그냥 실효지배를 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나름 개연성이 있고 흥미로운 주장이다.

 

나는 여기서 백제의 요서 공략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 밝혔으며 이것이 백제의 요서 공략에 대해 기록한 <송서>와 <양서>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증명시켰다. 참고로 나는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를 밝히는 것에 오로지 한국의 정사인 <삼국사기>와 중국 측의 정사로 인정받은 사서들만을 참고했다. 나는 이것을 매우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하나 하나 검증을 하고 의심이 가는 것은 따져가면서 밝혀냈다. 적어도 백제의 대륙진출을 단순히 화살표만 그어놓고 진출이라고 쓰는 자들이나 백제가 대륙에 영토를 넓혔다는 말만 해도 환빠라고 지껄이는 자들은 나에게 따질 자격이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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