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
광개토왕비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郞剖卵降世生而有聖德後爲將登王命駕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郞鄒牟王爲我連葭浮龜應聲卽爲連葭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不樂世位天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罡履龍首昇天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大朱留王紹承基業遝至十七世孫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號爲永樂太王恩澤洽于皇天威武振被四海掃除不義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昊天不弔卅有九晏駕棄國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銘其勳績以示後世焉其詞曰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稗麗不歸戍人躬率往討過富山質山至鹽水上破其丘部落六七百營牛馬群羊不可稱數於是旋駕因過襄平道東來歸由力城北豊王備獵遊觀土境田獵而還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軍至殘國攻取壹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古舍蔦城阿旦城古利城○○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須鄒城○○○男而耶羅城瑑城於利城農賣城豆奴城沸城比利城彌鄒城也利城大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民城林城○○○○○○月利城就鄒城居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城曾拔城宗古盧城仇天城○○○城逼其國城殘不服義敢出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遣刺迫城殘兵歸穴就便圍城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先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八年戊戌敎遣偏師觀肅愼土谷因便抄得莫斯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論事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賊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敎遣使還告以密計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自倭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戍兵從新羅城宮城倭寇大潰城內十九盡拒隨倭安羅人戍兵新羅寐錦遣使入從官軍告歸服請貢白王以倭戰破家僕潰奴客理以後是爲奴客家僕以戍太王顧辭倭賊敢出迎戰王師合戰破賊倭潰逃以官軍安羅人戍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唯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大恩新羅寐錦遣家僕勾請太王命朝貢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步騎前鋒出石城圍連船擧兵叛王躬率往討從平穰步騎前鋒相遇王幢要截蕩刺倭寇潰敗斬煞無數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往討倭寇從加羅路王師四方合戰斬煞蕩盡所獲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牛由城鄒婁城舍蔦城那彌城卄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擧國駭服獻出朝貢歸王請命王恩普覆於是旋還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端社婁鴨盧肅斯舍鴨盧苦羅婁鴨盧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賣勾余民國烟二看烟三東海賈國烟三看烟五敦城民四家盡爲看烟于城一家爲看烟碑利城二家爲國烟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此連二家爲看烟俳婁人國烟一看烟卌三梁谷二家爲看烟梁城二家爲看烟安夫連卄二家爲看烟改谷三家爲看烟新城三家爲看烟南蘇城一家爲國烟新來韓穢沙水城國烟一看烟一牟婁城二家爲看烟豆比鴨岑韓五家爲看烟勾牟客頭二家爲看烟求底韓一家爲看烟舍蔦城韓穢國烟三看烟卄一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臼模盧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氐利城國烟一看烟三彌鄒城國烟一看烟七也利城三家爲看烟豆奴城國烟一看烟二奧利城國烟二看烟八須鄒城國烟二看烟五百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大山韓城六家爲看烟農賣城國烟一看烟七閏奴城國烟二看烟卄二古牟婁城國烟二看烟八瑑城國烟一看烟八味城六家爲看烟就咨城五家爲看烟彡穰城卄四家爲看烟散那城一家爲國烟那旦城一家爲看烟勾牟城一家爲看烟於利城八家爲看烟比利城三家爲看烟細城三家爲看烟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敎言祖王先王但敎取遠近舊民守墓洒掃吾慮舊民轉當羸劣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令備洒掃言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卄家慮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卅看烟三百都合三百卅家自上祖先王以來墓上不安石碑致使守墓人烟戶差錯唯國罡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其烟戶不令差錯又制守墓人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雖有富足之者亦不得擅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 추모왕의 창업과 광개토왕의 치세 |
삼가 생각건대 옛날 시조 추모왕1)께서 창업하신 터전이라.
북부여2)에서 오셨으며 하느님의 아들3)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시니라.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셨으며 나실 때부터 성스러운 덕을 갖추시니라.
훗날 장차 왕위에 오르시고자 명하신 수레를 타고 순행하여 남쪽으로 내려가시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4)를 지나게 되시거늘 왕께서 물가에 이르러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늘의 아들이요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둔 추모왕이니라. 나를 위하여 갈대를 잇고 거북떼를 떠오르게 하여라.” 하시니 말씀에 응하여 곧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떼가 떠오르는지라 연후에 물을 건너시고 비류곡 홀본5) 서쪽에서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시니라.
세속의 자리를 즐기지 아니하시니 하늘에서 보낸 황룡이 내려와 왕을 맞이하거늘 왕께서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하늘에 오르시니라6).
고명을 받으신 세자 유류왕께서는 도로써 정치를 일으키시고 대주류왕께서 그 유업을 이으시니라7).
대대로 왕위를 이어 17세손8)이신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9)에 이르니 열여덟에 왕위에 올라 연호를 영락이라 하시니라.
태왕의 은택은 하늘에 미치고 위무는 사해에 떨쳤으며 불의를 깨끗이 없애시니 뭇 백성이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여 나라가 부유하고 민생이 풍요로우며 온갖 곡식이 풍성하게 익었더라.
그러나 하늘이 굽어 살피지 아니하여 서른아홉에 수레를 타고 나라를 떠나시니라.
이에 갑인년 9월 29일 을유에 산릉으로 옮기어 모시고 또한 비를 세워 훈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알리노니 이러하니라.
각주
1) 고구려 초대 주몽왕(B.C. 79~B.C. 19).
2) 추모왕이 가섭원 부여(B.C. 86~22)에서 태어났으므로 북부여는 가섭원 부여를 가리킨다.
3) 비문은 고구려를 천제의 아들 추모왕이 천제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세운 ‘지상 최초의 국가’로 정의하고 있다.
4) 엄리대수, 즉 지금의 쑹화 강이 부여의 강임을 밝혔으므로 여기서 부여는 해모수의 북부여(B.C. 239~B.C. 37)를 말한다.
5) 졸본. 훈 강 유역의 오녀산성이라는 설도 있지만 연해주의 쑤이펀 강 유역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6)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추모왕을 용산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7) 유류왕은 제2대 유리왕(B.C. 59~18)이고 대주류왕은 제3대 대무신왕(4~44)이다.
8) 삼국사기에는 추모왕의 13세손이라고 나와 있으므로, 추모왕의 4대조인 해모수로부터 환산하면 17세손이다.
9) ‘국강 위에 묻히신(국강상), 땅을 넓히고(광개토경) 나라를 평화롭게 만드신(평안) 아름다운 태양의 왕(호태왕)’이라는 뜻.
| 패려를 합치시다 |
영락 5년 을미년이라.
왕께서 패려10)가 변경 사람을 돌려보내지 아니하여 몸소 군을 이끌고 가 토벌하시니라.
부산과 질산을 지나 염수11) 위에 이르러 그곳 들판 위의 부락 여섯과 군영 7백 개를 깨뜨리시니 얻어 낸 소와 말, 양 떼는 헤아릴 수 없이 많더라.
이때 가마가 양평12)의 길을 지나고 동쪽으로 돌아와 역성과 북풍을 거치매 왕께서 사냥을 준비하시고 국경을 유람하며 사냥을 하고 돌아오시니라.
각주
10) 랴오허 강 상류의 시라무룬 강 유역에 있었던 세력으로, 거란 8부의 하나인 필려부이다.
11) 랴오허 강 상류의 시라무룬 강.
12) 중국 랴오닝 성 랴오양.
| 백잔을 쳐부수고 숙신을 경략하시다 |
백잔13)과 신라는 예부터 속민14)으로 조공을 바쳐 왔으나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깨고 신라를 무너뜨려 이들을 신민으로 삼거늘15) 6년 병신에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잔국을 토벌하시니라.
군이 백잔국에 이르러 일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고사조성, 아단성16), 고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17), 수추성, 남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농매성, 두노성, 비성, 비리성, 미추성18), 야리성, 대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누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민성, 임성19), 월리성, 취추성, 거발성, 고모루성20),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발성, 종고로성, 구천성 등을 쳐서 차지하고 그 서울21)을 핍박하니라.
백잔이 대의에 굽히지 않고 감히 나서 백번 싸우려 하거늘 왕께서 불같이 노하시어 아리수22)를 건너시고 창군을 보내어 성을 핍박하시니 백잔 병사가 제 소굴로 달아나거늘 앞으로 나아가 곧장 성을 에워싸시니라.
백잔의 군주23)가 곤경에 빠져 남녀 포로 1천 명과 고운 베 천 필을 바치며 왕 앞에 꿇어앉아 스스로 서약하기를 “이제부터 영원히 노객24)이 되겠나이다.” 하거늘 태왕께서 은혜를 베풀어 지난날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뒷날의 순수한 정성만을 기억하시니라.
이때에 성 쉰여덟과 마을 7백을 차지하고 백잔 군주의 아우와 대신 열 명을 데리고 군을 물려 환도하시니라.
8년 무술에 교를 내려 소수의 군을 보내시니 숙신25)의 땅과 골짜기를 살피고 곧장 막사라성과 가태라곡26)의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으매 이로부터 조공하며 정사를 논하니라.
각주
13) 고구려에서 백제를 낮추어 이른 말.
14) 혈족으로서의 국민. 고구려는 백제, 신라, 숙신, 동부여를 추모왕 때부터 복속해 온 원초적 속민으로 여겼다.
15) 왜는 일본 최초의 통일 정권인 야마토이다. 이 기사는 백제 정벌과 신라 구원을 정당화하고자 고구려에서 과장 · 왜곡한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본 비는 광개토왕의 기공비이므로 신묘년 이전 371년 평양성에서 고국원왕이 백제군에게 전사한 사실(삼국사기)을 적지 않았고, 둘째, 야마토는 시종일관 백제에 우호적이었으므로 굳이 백제를 칠 필요가 없었으며, 셋째, 백제 · 야마토 동맹군의 남한 정벌 사건은 이미 신묘년 이전 369년에 있었고(일본서기) 전쟁의 주도권도 백제가 쥐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기사는 야마토가 일시적으로 한반도 남부에 주둔군을 두었음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한반도 남부의 야마토 주둔군은 이후 400년, 404년, 407년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와 대규모 전쟁을 벌이지만 모두 참패한다.
16) 경기도 아차산성.
17) ‘곰나루’의 이두식 표현. 웅진(충남 공주)을 가리킨다.
18) 경기도 인천.
19)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20) 경기도 포천의 고모리산성. 장수왕 때 세워진 중원 고려비에도 보인다.
21) 백제 수도 한성. 경기도 광주시.
22) 서울 한강.
23) 백제 제17대 아신왕(?~405)을 말함.
24) 노예라는 뜻으로, 백제, 신라, 숙신, 동부여의 군주와 고구려 조정의 신료들이 고구려왕에 대하여 자신을 낮추어 이른 말.
25) 단군 조선의 지방 세력으로, 추모왕 이래 고구려의 속국. 오늘날의 연해주.
26) 숙신의 여러 부락들 가운데 고구려에 저항적이던 세력들이다. 이로써 숙신의 모든 부락을 완전히 복속하였다.
| 신라를 구원하시다 |
9년 기해에 백잔이 서약을 어기고 왜적과 내통하니라.
왕께서 아래로 평양27)을 순행하실 적에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께 아뢰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들어와 성과 못을 부수고 노객을 그들의 신민으로 삼는다고 하며 왕께 귀화하여 하명을 청하거늘 태왕께서 은혜를 베풀어 그 충성심을 가상히 여기시고 교를 내려 사신을 돌려보내어 비밀한 계책을 알리게 하시니라.
10년 경자에 교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시니 가서 신라를 구원하니라.
남거성에서 신라성까지 왜인이 가득하거늘 관군이 곧 다다르니 왜적이 후퇴하니라.
왜의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28)에 이르니 성이 곧 귀복하거늘 신라인을 수비병으로 세우고 신라성과 궁성29)에서 왜구가 크게 무너지거늘 성 안 신라인의 열에 아홉이 모두 왜를 따라가기를 거부하매 신라인을 수비병으로 세우니라.
신라의 매금30)이 사절을 보내어 관군을 따라와서 귀복할 것을 알리고 조공을 청하며 왕께 아뢰기를 “왜가 싸움을 일으켜 가복31)을 깨고 노객을 궤멸시켜 다스렸으니, 이후로 저희를 노객과 가복으로 삼아 지켜 주소서.” 하니 태왕께서 돌아보며 말씀하시기를 “왜적이 감히 나서 싸우려 하거늘 왕의 군사가 맞붙어 싸워 적을 깨뜨리매 왜는 무너져 달아났고 관군은 신라인을 수비병으로 세웠노라.” 하시니라.
옛날 신라의 매금은 몸소 우리를 찾아와 정사를 논한 일이 없었거늘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큰 은혜를 내리시매 신라의 매금이 가복을 보내고 꿇어앉아 태왕의 하명을 청하며 조공하니라.
각주
27) 평양은 천하의 중심지로서, 지리적 · 경제적 · 문화적 핵심이었다. 평양 천도는 광개토왕 때부터 추진되었다.
28) 임나가라는 금관가야이고, 종발성은 그 수도인 김해이다. 이 사건으로 가야 연맹의 주도권은 고령의 대가야가 쥐게 된다.
29) 궁성은 신라 수도 금성(경주)을 말함.
30) 신라의 임금을 일컫는 ‘이사금’의 다른 말. 일본서기에도 매금이라는 말이 보인다.
31) 집의 머슴.
| 왜를 무찌르고 백잔을 응징하시다 |
14년 갑진에 왜가 함부로 대방32) 땅에 침입하니라.
보병과 기병의 선봉이 석성33)에 나아가 에워싸고 늘어선 왜선들이 거병하여 반기를 들거늘 왕께서 몸소 군을 이끌고 가 토벌하시니라.
평양에서 보병과 기병의 선봉이 서로 마주치거늘 왕당34)이 길을 끊고 좌우에서 쳐서 찌르고 쓸어버리매 왜구가 무너져 패하니 베고 죽인 자가 무수하더라.
17년 정미에 교를 내려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시니 가서 왜구를 토벌하니라.
가라35)를 거치는 길에 왕의 군사가 사방에서 들이쳐 싸워서 베고 죽여 남김없이 쓸어버리니라.
얻어 낸 갑옷은 1만여 벌이요 군수 물자와 무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더라.
돌아오면서 사구성, 누성, 우유성, 추루성, 사조성, 나미성을 깨뜨리니라36).
각주
34) 오늘날의 황해도.
35) 황해도 개풍군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으나, 기사의 전황을 보면 평양과 가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6) 왕이 몸소 이끄는 군대. 광개토왕이 국가의 군사 체제를 국왕 중심의 체제 아래 통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
37) 가야를 말함. 이 전투를 끝으로 한반도 남부의 야마토 주둔군은 일본 본토로 축출된다.
38) 앞서 기해년에 노객 맹세를 어긴 백제를 응징한 사건이다.
| 동부여를 통일하시다 |
20년 경술이라.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거늘37) 도중에 배반하여 조공치 아니하니 왕께서 몸소 군을 이끌고 가 토벌하시니라.
군이 부여성38) 앞에 이르니 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엎드리며 조공을 바치고 왕께 귀화하여 하명을 청하니라.
왕의 은혜가 널리 퍼지니 돌아오실 때 그 은화에 감복하여 관군을 따라온 자들은 미구루 압로, 비사마 압로, 단사루 압로, 숙사사 압로, 고라루 압로이니라39).
쳐서 깨뜨린 성은 모두 예순넷이요 마을은 1천 4백이더라40).
각주
39) 옛 북옥저. 랴오닝 성 창춘 · 눙안 일대에 존재했으며, 삼국사기에 추모왕이 북옥저를 정벌했다는 기록이 있다.
40) 동부여 수도. 랴오닝 성 창춘 · 눙안 사이.
41) 압로는 동부여의 지방관이다. 동부여에는 미구루부, 비사마부, 단사루부, 숙사사부, 고라루부 등 여러 부가 있었는데, 미구루는 옛 북옥저이다.
42) 동부여를 쳐서 얻은 전과가 아니라, 광개토왕이 평생 정복 사업을 벌여 실질적 영토로 편입한 것을 총 계산한 것이다.
| 수묘인연호 |
묘를 지키는 사람의 연호이니라.
매구여 주민의 국연은 둘이요 간연은 셋이며, 동해 상인의 국연은 셋이요 간연은 다섯이며, 돈성 주민의 네 집은 모두 간연이요, 우성의 한 집은 간연이요, 비리성의 두 집은 국연이요, 평양성 주민의 국연은 하나요 간연은 열이며, 차련의 두 집은 간연이요, 배루 사람의 국연은 하나요 간연은 마흔셋이며, 양곡의 두 집은 간연이요, 양성의 두 집도 간연이요, 안부련의 스물두 집은 간연이요, 개곡의 세 집은 간연이요, 신성의 세 집도 간연이요, 남소성의 한 집은 국연이요, 새로이 들어온 한인과 예인41) 가운데 사수성의 국연은 하나요 간연도 하나이며, 모루성의 두 집은 간연이요, 두비압잠 한인의 다섯 집은 간연이요, 구모객두의 두 집은 간연이요, 구저 한인의 한 집은 간연이요, 사조성 한인과 예인의 국연은 셋이요 간연은 스물하나이며, 고모야라성의 한 집은 간연이요, 경고성의 국연은 하나요 간연은 셋이며, 객현 한인의 한 집은 간연이요, 아단성과 잡진성의 도합 열 집은 간연이요, 파노성 한인의 아홉 집은 간연이요, 구모로성의 네 집은 간연이요, 각모로성의 두 집은 간연이요, 모수성의 세 집은 간연이요, 간저리성의 국연은 둘이요 간연은 셋이며, 미추성의 국연은 하나요 간연은 일곱이며, 야리성의 세 집은 간연이요, 두노성의 국연은 하나요 간연은 둘이며, 오리성의 국연은 둘이요 간연은 여덟이며, 수추성의 국연은 둘이요 간연은 다섯이며, 백잔 땅 남쪽에 사는 한인의 국연은 하나요 간연은 다섯이며, 대산한성의 여섯 집은 간연이요, 농매성의 국연은 하나요 간연은 일곱이며, 윤노성의 국연은 하나요 간연은 스물둘이며, 고모루성의 국연은 둘이요 간연은 여덟이며, 전성의 국연은 하나요 간연은 여덟이며, 미성의 여섯 집은 간연이요, 취자성의 다섯 집은 간연이요, 삼양성의 스물네 집은 간연이요, 산나성의 한 집은 국연이요, 나단성의 한 집은 간연이요, 구모성의 한 집도 간연이요, 어리성의 여덟 집은 간연이요, 비리성의 세 집은 간연이요, 세성의 세 집도 간연이라.
각주
41) 한인과 예인은 백제인을 말한다. 고구려는 백제인을 고구려 왕릉의 지킴이로 삼을 정도로 우대하였다.
| 수묘연호에 관한 법규 |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살아 계실 적에 교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조왕과 선왕께서는 다만 원근의 토착민만을 데려다 묘를 지키며 술을 올리고 청소토록 교언하셨으나, 짐은 그들 토착민이 차차 몰락할 것이 염려되는도다. 만일 짐이 붕어한 뒤 묘를 편안히 지킬 자들로는, 다만 짐이 몸소 순행하며 데려온 한인과 예인들을 취하여, 잘 갖추어 술을 올리고 청소하는 일을 맡기도록 하라. 이와 같이 교를 내려 말하노라.” 하셨나니 따라서 교언하신 바와 같이 한 · 예인 220가를 취할 것을 명령하노라.
그러나 법칙을 잘 모를 것을 고려하여 다시 토착민 110가를 취하노니 토착민과 새로 들어온 자의 수묘연호를 합하면 국연이 서른이요 간연이 300이니 도합 330가라.
상대 조 · 선왕 이래로 묘 위에 석비를 안치하지 않아 묘를 지키는 자의 가호들이 종종 실수하는 일이 있었으나 이제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께서 모든 조 · 선왕의 묘 위에 비석을 세우고 연호를 새겨 가호들로 하여금 실수하는 일이 없게 하셨노라.
또한 제도를 정하여 묘를 지키는 자들은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게 하고 비록 부유한 자일지라도 마음대로 사지 못하게 하며 법을 어기고 파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는 자는 제정한 법에 따라 묘를 지키게 하셨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