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
안정복의 생애와『동사강목』이야기
안정복의 생애와『동사강목』이야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
1. 안정복의 생애와 업적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숙종 말기에 제천에서 태어나서 정조 말기에 세상을 떠난 실학자이다. 아버지는 증 오위도총부 부총관 극(極)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익령(益齡)의 딸이다. 본관은 광주(廣州)이고, 호는 순암(順菴)이며, 자는 백순(百順)이다. 안정복의 집안인 광주 안씨의 시조는 고려 때 태조를 도와 공을 세운 안방걸(安邦傑)로, 광주는 태조에게 받은 사패지(賜牌地: 임금이 내려준 논밭)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병이 많았다. 또 할아버지의 잦은 관직 이동과 일생을 처사(處士)로 지낸 부친 극을 따라 오랜 동안 자주 이사를 하였다. 1717년(숙종 43) 외할머니상을 당하여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영광(靈光) 월산(月山)의 농장에서 생활하였다. 그러다가가 1719년 할아버지가 서울에서 벼슬을 하게 됨에 따라 남대문 밖 남정동(藍井洞)으로 귀경해 생활했다. 그래서 1721년(경종 1) 10세가 되어서야 겨우『소학』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 뒤 일정한 스승이나 사문(師門)도 없이 친·외가의 족적인 범위 내에서 학문 활동이 이루어졌다.
조부가 벼슬을 그만두고 무주(茂朱) 적상산에 들어가자 그도 그곳에서 생활하는 한편 외가인 전남 영광에도 부친과 함께 자주 왕래하였다. 그는 외가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인 관계로 외가의 영향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안정복은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어머니 증 정부인(贈貞夫人) 이씨(李氏)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안정복이 주로 살았던 경기도 광주는 지금의 행정구역과 달리 서울 강남, 강동, 하남시, 남양주시 등에 걸친 넓은 지역이었다. 또한 조선 후기에 광주부는 실학의 종장(宗匠)인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의 영향을 받은 순암 안정복과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 재야 남인 계열의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경세치용(經世致用)의 근기실학이 형성된 지역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 좌참찬을 지낸 안성(安省, 1344~1421)이 안정복의 12대조이며,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扈從: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며 따름)하여 공신에 봉해 진 안황(安滉, ?~1593)이 그의 6대조이다. 이후로 현달한 인물은 크게 눈에 띄지 않는데, 안정복의 고조 안시성(安時聖)이 현감에 오른 적이 있고, 증조 안신행(安信行)은 그보다도 못한 빙고(氷庫) 별검 자리에 나갔으며, 그나마 조부 안서우(安瑞羽, 1664~1735)가 비교적 현달하여 태안군수를 거쳐 울산부사(종3품)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조부 안서우는 영조 즉위와 함께 노론의 세상이 되자 당류의 배척을 받아 탐관오리죄로 울산부사에서 파직되는 비운을 만났다. 안서우는 파직 후 서울을 떠나 전라도 무주에 내려가 은거 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그의 아들 안극(安極)과 손자 안정복 등 온 가족이 함께 무주로 이사하게 되었다. 조부의 몰락은 안정복과 그의 부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안정복의 부친인 안극은 일평생 관직 생활을 하지 않았으며, 안정복도 15세의 어린 나이로 할아버지의 비운을 목도한 후 38세 이르기까지 과거 시험은 물론이고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길은 일체 포기하였다. 조부의 파직이 가져다 준 충격이 심했다고 볼 수 있다.
무주에서의 은거 생활은 안정복의 학문 활동에도 영향을 주어, 출세와는 거리가 먼 학문을 좋아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가학(家學)을 기본으로 경사(經史) 이외에 음양(陰陽)·성력(星曆)·의약(醫藥)·복서(卜筮) 등의 기술학(技術學)과 손자(孫子)·오자(吳子) 등의 병서, 불교·노자(老子) 등의 이단사상, 그리고 패승(稗乘)·소설 등에 이르기까지 읽지 않은 것이 없어 15~16세에는 이미 통달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한다. 특히 역학에도 조예가 깊어, 이 때문에 방술가(方術家)라는 비칭을 듣자 스승 이익(李瀷)으로부터 이름을 바꾸라는 충고를 듣기도 하였다.
1726년(영조 2)부터 무주에서 은거하던 안극과 안정복은 10년 뒤인 1735년(영조 11)에 안서우가 사망하자 무주를 떠나 고향인 광주 경안면 덕곡리로 돌아왔다. 이때가 1736년, 안정복의 나이 25세였다. 광주 덕곡리에 돌아온 안정복은 ‘순암’이라는 이름의 거처를 만들고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순암이라고 불리는 집은 규모가 8칸이 되는 ‘엄(菴)’자형의 가옥이었다. 또 그는 조상 선영이 있는 덕곡리 영장산 아래에 ‘이택재(麗澤齋)’라 불리는 청사를 지어 학문 생활과 함께 제자들을 공부시키는 강학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이택재는 안정복이 지은 서재 건물로, 학문 연마 및 제자들의 강학이 이루어진 곳이다. 지금의 건물은 과거 소실되었던 것을 1970년대에 재건한 것이다.
안정복은 고향으로 돌아온 때부터 방술학보다는 성리학에 눈을 뜨게 되어『성리대전』과 『심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학문적 관심을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인간의 윤리 도덕과 사회참여 문제로 확장시켜나갔다. 그러나 그가 왜 광주로 환향한 것을 계기로 학문적 변화를 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광주 환향 후, 안정복은 학문과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광주로 온지 1년 후인 26세에 에는 중국의 삼대문화의 정통설을 기본으로 한『치통도(治統圖)』와 육경(六經)의 학문을 진리로 하는『도통도(道統圖)』를 지었다. 27세에는 뒷날『임관정요(臨官政要)』의 모체가 되는『치현보(治縣譜)』와 동약(洞約)의 모체라 할 수 있는『향사법(鄕社法)』을 짓는 등 쉴 틈 없이 저술에 전념했다. 29세에는 그의 초기 학문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하학지남(下學持南)』상·하권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그의 경학(經學)에 대한 실천윤리적 지침서로서 그가 온 정렬을 기울였던 저술이다. 그리고 토지제도 개혁안으로서『정전설(井田說)』에 대해 썼다. 30세에는 주자의 글을 모방한『내범(內範)』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환향 후 몇 년간 학문과 저술에 전념하던 안정복은 30대가 되자 광주 지역 근처에 사는 실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시작했다. 33세에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의 증손으로부터『반계수록(磻溪隧錄)』을 입수해서 읽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64세 때『반계연보』를 짓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를 계기로 현실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안정복은 35세에 자신의 학문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줄 선생을 만나게 된다. 안산 첨성촌에 살고 있는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을 찾아가 그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다. 이익과의 만남은 그의 사상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특히 이익의 문인들과 학문적 토론을 진지하게 하였다. 윤동규(尹東奎)·이병휴(李秉休) 등은 동료나 선배로서 권철신(權哲身)·이기양(李基讓)·이가환(李家煥)·황덕일(黃德壹)·황덕길(黃德吉) 등은 후학 또는 제자로서 이때부터 연을 맺은 인물들이다. 이들과의 교류에서 어느 정도 사상적인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였다.스승 이익과의 학문 교류는 이익이 타계할 때까지 20년 가까이 지속되었는데, 특히 안정복의 대표 저술인『동사강목(東史綱目)』은 6년간 스승인 성호와의 편지 문답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유명하다. 안정복은 어린 시절이 아닌 30대 중반에 어느 정도 학문과 사상 체계를 이룬 뒤였기 때문에 이익의 제자 중에서도 가장 자기 색깔이 뚜렷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실학자들 보다 개혁적인 면에서 참신성이 덜 하고 가장 보수적인 입장에 선 것은 가학의 분위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38세 되던 1749년(영조 25) 안정복은 문음(門蔭: 특별한 연줄로 벼슬에 임명되는 일)으로 첫 벼슬길에 올랐다. 그는 말단 관직인 만령전참봉(萬寧殿參奉, 종9품)을 시작으로 의영고참사(義盈庫奉事, 종8품), 정릉직장(靖陵直長),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 종6품)를 거쳐 43세에 이르러 사헌부감찰까지 올랐다. 그러나 부친의 죽음과 본인의 건강 악화로 5년 만에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고향 광주에 내려갔다. 이후 61세까지 18년간 관직과는 거리를 두고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그 동안 준비해온 저술들을 정리해 1756년<이리동약(二里洞約)>을 짓고, 이듬해 이를 바탕으로『임관정요(臨官政要)』를 저술하였다. 그리고 그는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역사서인『동사강목(東史綱目)』을 1759년에 일단 완성하였다. 그리고 계속해 1767년에는 중국의 당 왕조의 역사인『열조통기(列朝通紀)』를 저술하는 한편, 1753년에는 스승 이익의 저술인『도동록(道東錄)』을『이자수어 (李子粹語)』로 개칭해 편집하였다. 1762년에는 이익이 일생 정열을 바쳐 저술한『성호사설 (星湖僿說)』의 목차·내용 등을 첨삭, 정리한『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을 편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의 학문은 더욱 깊어 갔다.
40~50대를 학문과 저술 활동으로 보낸 안정복은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아 61세에 다시 관직에 나갔다. 1772년부터 1775년까지 세자익위사의 익찬(翊贊)과 위솔(衛率) 등이 되어 세손(뒤에 정조)의 교육을 맡았다. 이 때 그는 세손이 성리학에 대해 질문하자 ‘이이(李珥)의 학설은 참신하기는 하지만 자득(自得)이 많고, 이황(李滉)은 전현(前賢)의 학설을 존중해 근본이 있으므로 이황의 학설을 좇는다.’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정조가 즉위하자 1776년에는 65세의 나이에 충청도의 목천현감(木川縣監)으로 나가 자신이 쌓아온 성리학자로서의 경학지식(經學知識)을 마음껏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3년 동안 그곳에서 백성의 세금을 탕감해주고, 민폐를 해소하기 위해 온 정열을기울였다. 그리고 동약(洞約)·향약(鄕約)·향사례(鄕射禮)의 실시, 방역소(防役所)의 설치, 사마소(司馬所)의 복설 등 많은 업적을 쌓았다. 백성들은 나무를 깎아 송덕비를 세우고 그의 치정(治定)을 기렸다.
안정복은 72세에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여 돈녕부 주부(정6품)ㆍ의빈부 도사(종5품)ㆍ세자익위사 익찬(정6품) 등을 역임하고 73세에 벼슬길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후진 양성과 저술 활동으로 보냈다. 이 시기에 천주교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안정복은 일찍이 40대 중반에 스승 이익을 비롯하여 이익의 제자이자 천주교 신자인 권철신(權哲身, 1736~1801)에게 천주교에 대해 부정적인 자신의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그 이후로 20여 년이 흐른 후 그의 나이 70대가 되었을 무렵, 천주교의 교세가 날로 확장되자 본격적으로 천주교를 비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천주교를 비판한 책인『천학고(天學考)』나 『천학문답(天學問答)』이 간행된 것도 1785년, 안정복의 나이 74세 때이다.
안정복은 현실 문제를 직시하는 성리학자로서 내세를 인정하는 천주교에 긍정적일 수 없었고, 무엇보다도 성리학적 명분론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성호 이익의 제자들, 즉 성호학파 문인들은 천주교의 수용 문제를 두고 두 노선으로 나뉘었는데, 천주교에 비판적이던 안정복 계열과 수용적 입장을 취한 권철신 계열이 바로 그것이다. 흔히 전자를 성호우파, 후자를 성호좌파라 한다.
안정복은 고향 덕곡리에 선영이 있는 영장산(靈長山) 아래 여택재(麗澤齋, 혹은 이택재)라는 재실을 지어 춘추로 제사를 지냈으며, 평시에는 강학(講學)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안정복은 죽기 직전인 79세에 가선대부(종2품)에 가자(加資: 관원의 품계가 올라감)되고, 동지중추부사로서 광성군(廣成君)에 피봉되었으며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시신이 경기도 광주시 중대동 텃골에 안장되었다. 죽은 뒤인 순조 원년에는 천주교 비판의 공이 높이 평가되어 자헌대부(정2품) 의정부좌참찬겸지의금부사ㆍ오위도총부총관이라는 벼슬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익의 제자로서 천주교를 믿었던 이가환ㆍ권철신ㆍ정약종 등 남인 학자들은 사형을 당하는 비운을 맞이했다. 그중 권철신은 안정복의 사위인 권일신의 형이며, 권일신도 장인인 안정복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를 믿다가 순교하였다.
여택재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소실되었으나 1970년대에 다시 정부의 도움으로 재건해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
그의 저술로는『순암선생문집(順菴先生文集)』 30권 15책이 있고,『동사강목(東史綱目)』∙『하학지남(下學指南)∙『열조통기(列朝通紀)』∙『임관정요(臨官政要)』∙『계갑일록(癸甲日錄)』∙『가례집해(家禮集解)』 등이 있다. 이밖에 그가 지은『잡동산이(雜同散異)』와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 등도 안정복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책들이며, 문집에 수록되어 있는『천학고(天學考)』∙『천학문답(天學問答)』은 그의 주변을 위협하였던 천주교의 박해와 안정복과 같은 전통적 조선학인의 서학(西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저술이기도 하다. 특히, 역사적 현실을 실증적으로 새로 정립해서 정신적인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하여『동사강목』과『열조통기』를 편술하였고, 경사(經史)의 부연적인 측면을 위해서『잡동산이』를 지었으며, 행정에 임하여 취해야 할 목민관(牧民官)의 자세를『임관정요』에 담았다. 그리고『순암집(順菴集)』∙『지리고(地理考)』 ∙『부부』 등이 있는데,『부부』에는 한문소설 <홍생원유기(洪生遠遊記)> ∙ <여용국전(女容國傳)> 등이 실려 있다.
안정복이 역사상에 차지하는 비중은 정치적 행적이나 정책적 업적보다는 학문적 ∙ 사상적인 공헌과 영향에 있다고 하겠다. 이에 정통성으로 대표되는 그의 역사적 감각과 모든 학문과 사상체계를 합리적이고 실증적으로 정립하고자 하였던 학구적 방법은 당시의 학풍에서도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2. 안정복의 대표작 동사강목
안정복이 쓴 책 가운데 가장 대표작은『동사강목』이다. 평소 자국의 역사가 제대로 서술된 책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그는 절치부심하여 마흔여덟 살에 이 책을 완성하였고, 이후로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였다. 그는 이 책을 저술하기 위해 우리나라 역사에 관계되는 서적은 모조리 조사하여 참고하였다 한다.
『동사강목』의 핵심은 역사의 정통성을 바로잡는 것에 있었다. 단군ㆍ기자ㆍ삼한을 정통의 줄기로 잡고 한족(漢族)이 침입하여 세운 위만조선이나 한사군을 정통에서 제외한 것이다. 그러면 안정복은 왜『동사강목』을 편찬했을까?
내가 여러 역사책을 읽어본 후 바로잡을 뜻을 가졌다. 우리나라 역사를 폭넓게 다루면서 중국사에 기록된 우리나라 역사 자료를 가져와 깎고 다듬어 책을 만들었다. …… 역사가의 큰 원칙은 역사의 계통을 밝히는 것. 찬역(簒逆)을 엄정히 구분하는 것, 시비를 바르게 하는 것, 충절을 기리는 것, 옛 기록을 상고하는 것이다…….『동사강목』서문 중에서
안정복은 중국 사서 중에서도 주자가 쓴『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최고의 사서로 인정한 인물이다.『동사강목』은 주자학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주자의 강목체 서술을 표준으로 하여 서술된 역사서이다. 강목체는 역사를 기록할 때 ‘강(綱)’과 ‘목(目)’으로 구분하여 기록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며, 강은 기사의 큰 줄거리를 기록한 것이고, 목은 강의 하위 항목으로, 강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강목체를 기본으로 하는 역사서는 보통 성리학적 명분론에 따른 정통의 구별과 포폄(褒貶: 옳고 그름이나 선악을 판단하여 결정함)을 밝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런데『동사강목』이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높이 평가받는 데는 역사의 정통을 바로 세운 것 뿐만 아니라 역사적 고증이 그 이전의 사서에 비해 광범위하고 철저했다는 데 있었다. 안정복은『동사강목』을 쓸 때『동국통감(東國通鑑)』을 기본 자료로 삼으면서 각 시대의 역사책과 문집들을 널리 참고하였고, 나아가 중국인이 쓴 기록과『일본서기』에서도 새로운 자료를 많이 발굴하여 수록하였다. 따라서 18세기 중엽 당시로서는 자료 수집 면에서도 가장 충실한 사서가 될 수 있었다. 물론『동사강목』은 주자학적 정통론에 입각한 한계점은 있지만, 우리나라 최초로 자주성을 바탕으로 한 역사책이라는 평가에는 재론이 없다. 일제강점기에 위당 정인보(鄭寅普, 1893~1950)나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등이 가졌던 민족주의 역사관도 안정복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동사강목』에 서술되어 있는 삼한정통론은 일찍이 스승인 이익이 주창한 바 있었고, 안정복은 그 계승자로서 이를 체계화한 인물이다.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로 인정한『동사강목』은 단군의 정통성이 기자-마한-통일신라-고려로 이어진다고 서술하였다. 이어 단군ㆍ기자ㆍ위만을 합하여 삼조선(三朝鮮)라고 한『동국통감』의 역사 체계를 비판하고, 위만은 나라를 찬탈한 도적이므로 삭제한다고 기술하였다. 안정복의 삼한정통론으로 우리 역사는 1천여 년이 끌어올려졌고, 독자적 역사관이 제시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안정복은『동사강목』에서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강감찬과 서희 등 외래 침략을 격퇴한 명장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국방 문제나 백성들을 위한 개혁안 등에도 많은 관심을 두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중국에 내부(來附)한 장수들에 대해서는 낮게 평가하였다. 또한 종래 다른 역사서에서는 잘 다루지 않던 주변국가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즉 말갈, 거란, 여진 등과 일본, 유구 등의 화친(和親)과 침구(侵寇)의 일을 기록하여 후세의 자료가 되게 하였다.
한편으로 춘추사관(春秋史觀)에 기본을 두어 중국의 군주는 황제로, 자국의 군주는 왕으로 호칭하고, 한족이 지배한 한(漢), 당(唐), 송(宋), 명(明)에는 입조(入朝), 입공(入貢)으로 표현하는 반면, 이민족인 요(遼), 금(金), 원(元)에게는 견사(遣使)로 표현하였다. 또『삼국사기』는 높이 평가하면서도『삼국유사』는 낮게 평가 하였고, 불교적 사실을 적게 다루었다.
『동사강목』은『삼국사기』,『고려사』,『해동제국기』등 43종과『사기』,『한서』를 비롯한 중국서적 17종 등 광범위한 자료들을 참고, 비교, 검토하는 고증학적 연구방법을 사용하였고, 기왕에 연구된 한국사론을 모두 수렴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조선시대 대표적인 역사서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다.
<참고문헌>
1. 이구용,「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의 생애와 사상」,『강원대학논문집』 6, 1972.
2. 최동희,「신후담(愼後聃)·안정복(安鼎福)의 서학비판에 관한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76.
3. 심우준,『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연구』, 일지사, 1985.
4. 강세구,『동사강목(東史綱目)연구』, 민족문화사, 1994.
5. “안정복(安鼎福)”, 『국어국문학자료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6. 정성희, “자국의 역사를 체계화한 보수주의 실학자”, 네이버캐스트, 2016.1.15.
7. “동사강목(東史綱目)”, 네이버 두산백과, 2016.1.15.
8. “안정복(安鼎福)”, 네이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1.15.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