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
증산도 안경전 종도사의『환단고기』이야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
일제강점기에는 식민사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조작 왜곡했고, 해방 후에는 강단사학자들이 실증사학(實證史學)을 앞세우며 식민사학을 고착시켰다.
그러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한암당(寒闇堂) 이유립(李裕岦), 법학자 최태영(崔泰永) 등 수많은 민족사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로 잡는 데에 일생을 바쳤다.
지금도 수많은 재야사학자들이 정통국사 광복을 위해 강단사학자들과 맞서 투쟁하고 있지만 자금난, 사료난에 봉착해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다.
그런 가운데 종교단체 중 유일하게 민족종교인 증산도(甑山道)가 정통국사광복운동을 주도하고 있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증산도 안경전(安耕田) 종도사는 정통사서인『환단고기(桓檀古記)』를 발간하고 국내외의 여러 곳에서 북콘서트를 개최하며 언론활동을 통해 정통국사광복운동을 주도하고 있어 요즈음 재야사학자들의 찬사를 많이 받고 있다.
그리하여 충청지역을 중심으로 <우리역사바로세우기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 우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소장 : 국학박사 辛相龜)에서는 증산도 안경전 종도사가 지난 2016년 1월 4일 아시아뉴스통신 이승주 기자와 나눈 <안경전 종도사의『환단고기(桓檀古記)』이야기>를 여과 없이 그대로 소개하오니 많은 분들이 보시고 <우리역사바로세우기운동>에 적극 동참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2016년 병신년 새해를 맞이하여 요즈음 정통국사광복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세계일보, 한겨레신문, 충청투데이, 대한신보, 환타임즈, 아시아뉴스통신을 본받아 다른 언론사에서도 정통국사광복운동에 적극 동참해주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의하면 한국사의 국통맥은 환국-신시배달국-단군조선-부여-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대진국(발해)-고려-조선-대한제국-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약 9천년 동안 이어져 왔다. 그런데 식민사학자들과 강당사학자들은 우리 역사를 왜곡하여 국토를 한반도로, 역사를 2천년으로 축소 조작하여 민족사학자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 국민들은 지금 한, 중, 일 3국간에 역사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먹고사는 데에 급급하여 우리 역사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에 의해 우리 역사를 중국 역사로 왜곡하고 있고, 일본은 역사교과서를 왜곡하여 가르치고 있어,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 이제는 정신 바짝 차리고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증산도 안경전 종도사의 <『환단고기(桓檀古記)』이야기>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민족혼(民族魂)을 회복하고, 정통국사광복운동에 동참하는 데에 하나의 계기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1. ‘단군’이라는 호칭에 관한 이야기
육당 최남선에 의하면 ‘단군’이란 말은 몽고어 텡그리에서 왔다. ‘천天’과 ‘무巫’를 뜻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단군조선 때 단군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이끌어가는 왕이었고 동시에 온 국민을 이끌고 하늘에 올리는 제사를 관장하는 제사장이다.
단군조선의 초대 단군왕검은 운사(雲師) 배달신으로 하여금 강화도 마리산의 참성단을 비롯해 태백산 천황단, 지리산 노고단 등 지금도 남아 있는 여러 제천단을 축조하게 했다. 이는 단군이 왕과 제사장을 겸한다는 사실, 나아가 단군조선이 제정일치 사회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제정일치의 전통은 일찍이 환국과 배달국으로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온 한민족의 역사요 전통이었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 보면 단군조선의 수도인 왕검성, 즉 아사달이 ‘삼신께 제사지내는 곳’이라 했다. 이 또한 단군의 통치와 하늘 제사가 동시에 이뤄지던 단군조선의 제정일치 체제를 기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 서기전 2333년 단국조선 건국 년대 이야기
단군의 건국 연도에 관한 역사 기록은 다양하다. 그 시기가 중국의 요임금 때다, 공통적으로는 그렇게들 전하고 있는데 구체적인 건국 연도에 대해서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다.
우선 고려 때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는 단군조선의 건국이 요임금 50년 때, 그러니까 경인(庚寅)년이라 쓰여 있다. 이는 그저 책을 쓴 일연 스님의 추정이나 생각이 아니다. 당시에는 실재하던 '고기(古記)'라는 역사책을 그대로 인용하는 대목에서 이 연도가 나온다. 같은 고려시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는 단군조선의 건국 연도를 요임금 즉위 원년인 무진년이라 했다. 단군조선과 요임금의 나라가 같은 해 건국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 전기에 편찬된 대표적인 관찬(官撰) 사서인『동국통감』에는 ‘당요 25년 무진년’이라 하고 있다. 즉 요임금 시대의 무진년이 그 원년인지 아니면 25년인지『제왕운기』와『동국통감』의 견해가 서로 달랐던 것이다. 만약 무진년을 요임금 25년이라고 한다면 그가 즉위한 원년은 갑진년(서기전 2357년)이 된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서도 당시 전해지던 '고기'라는 역사책을 그대로 인용해 단군왕검의 재위 원년을 무진년으로 못박고 있다. <단군세기>가『삼국유사』처럼 '고기'를 인용하면서도 단군조선의 건국 연도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고기'의 판본이 여럿 존재했으며 그 판본들의 내용이 조금씩 달랐기 때문이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조선의 역대 47세 단군들의 역년(歷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에 바탕해서 역산을 해보면 무진년은 서기전 2333년이 된다. 참고로 요임금이 무진년에 즉위했다는 ‘무진년 원년설’은 중국의 정사 기록들에서도 많이 채택하고 있는 설이다.
최근 발굴된 고고학 유물들은 동북아의 청동기시대, 그 연대를 학계가 추정해오던 것보다 훨씬 앞선 쪽으로 올려놓았다. 1980년대 중국 요령성 건평현 우하량에서는 청동기를 주조한 흔적이 있는 토기 도가니 파편과 청동제 고리, 거푸집 등 청동기시대 유물들이 발견됐다. 또 인근 내몽골 적봉시 오한기에서는 청동 거푸집까지 나왔다.
중국 학계에서는 이 청동 유물들의 연대를 약 5000년 전으로 추정한다. 그 전까지 중국학자들은 중국의 청동기시대 상한上限 시기를 서기전 2000년경으로 보았는데 앞의 유물들이 발굴되면서 그 연대가 1000년이나 더 오래된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종합하면 단군조선은 분명히 청동기시대에 출현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고조선이 신석기시대에 건국되었다? 그것은 맞지 않다. 단군조선보다 앞선 배달국 치우천황이 이미 금속 무기를 만들었다는 역사 기록을 감안해도 단군조선은 청동기 시대에 건국된 것이 분명하다.
3. 단군조선의 건국과정 이야기
단군조선의 건국에 대한 이야기는『삼국유사』에 처음 나온다. 문제는 거기서 단군조선의 건국과정을 신화 같은 이야기로 간략히 소개한 것이다. 나중에 그것을 빌미로 일제가 실제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왜곡해서 지금까지 단군조선은 신화다, 하는 잘못된 인식이 퍼지게 됐다. 특히 단군조선을 건국하는 과정과 관련해『삼국유사』에서 곰과 호랑이 운운한 대목은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실을 단순히 신화 형태로 서술한 것이다. 일찍이 천손(天孫)족을 자처하며 동방으로 이주한 환웅족이 동방의 토착 원주민이던 호족(虎族)과 웅족(熊族)을 아우르는 과정에서 호족 아닌 웅족과 손잡고 나라 세운 사실(史實)을 신화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단군조선의 건국에 대해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은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다. 이암은 '고기'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데, 단군조선의 건국자인 단군왕검의 아버지는 단웅(檀熊)이요, 어머니는 웅씨 왕의 따님이다. 그런데 단군왕검은 일찍이 14세에 웅씨국의 비왕(裨王 : 한 지역을 맡아 다스리는 군왕)이 되었다.
여기서 웅씨국은 곰을 토템으로 하는 국가였다, 그렇게 추정된다. '단군세기'에서는 이 나라를 대읍국(大邑國)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배달국에서도 중심이 되는, 큰 세력을 가진 나라로 보인다.
대읍국 통치 경험을 쌓은 단군왕검은 38세에 아사달에서 백성들의 추대로 천제의 아들, 곧 천자(天子)가 되었다. 그는 이처럼 왕의 자리에 오른 직후 이전까지 아홉 갈래로 갈라졌던 환족(=九桓族)을 하나로 통일했다.
단군왕검이 배달국을 계승했다는 것은 '삼국유사'의 단군조선 건국 이야기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지만 실제로 '단군세기'에 남겨진 기록, 곧 ‘왕검이 신시 배달의 법규를 되살렸다’는 대목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단군조선이 당당하게 실재한 국가였음을 증명하는 기록 중에는 갑골문도 있다. 갑골문에 따르면 은나라 제22세 왕인 무정(武丁, 서기전 1325∼서기전 1266년)은 수많은 정벌전쟁을 벌였는데 지금의 섬서성과 산서성 서북 일대에 살던 북방족인 귀방(鬼方)을 공격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사실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도 그대로 쓰여 있다. “제21세 소태단군 47년(서기전 1291년)에 은나라 제22세 왕 무정(武丁)이 전쟁을 일으켜 귀방을 물리치고 나서 다시 단군조선의 제후국들을 침공하다가 우리 군사에 대패하여 화친을 청하고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이다. 이처럼 시대를 달리 하는 여러 기록들이 단군조선이 분명한 우리 역사였음을 생생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4. 단군조선에서 북부여로 이어지는 과정 이야기
우리 교과서는 부여에 대해서도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만일 그동안 부여에 대한 연구가 충실히 이루어졌다면 우리 상고사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허무할 정도로 빈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여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단군조선 말기의 정치상황부터 돌아봐야 한다.
단군조선은 삼한관경제가 삼조선제로 바뀌면서 점점 그 세력이 약해졌다. 그러다 제43세 물리단군 때 사냥꾼인 우화충이 역모를 일으켜 도성을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물리단군이 피난길에 올랐는데 그 도중에 붕어(崩御)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당시 욕살(=지방장관) 구물이 장당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평정한다. 그러고는 주위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제44세 단군에 즉위한다. 이 분이 구물단군이다.
구물단군의 즉위는 단군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전기점이 되는데 먼저 그는 도읍을 종래 백악산에서 장당경으로 옮기면서 단군조선의 제3왕조 시대를 열었다. 나아가 국호도 조선에서 ‘대부여’로 바꾸었다. 이때까지도 나라의 틀이 형식상으로는 삼조선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진조선이 대부여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기존의 다른 두 조선, 그러니까 번조선과 막조선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대부여와 함께 여전히 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들 번조선과 막조선이 점차 독자적인 병권(兵權)을 가지면서 대부여의 통제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독립국이 된다. 이 때문에 종래 단군조선의 통치체제인 삼한관경제가 유명무실해지고 이로 인해 대부여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약화된다. 대부여의 제47세 고열가단군을 끝으로 대부여(=진조선)는 그 역사의 막을 내리고(서기전 239년) 그 뒤를 해모수의 북부여가 계승한다. 진조선은 이처럼 대부여를 거쳐 북부여로 계승되었다.
5. 위만조선 이야기
‘위만조선’이란 명칭은『삼국유사』에도 나온다. 그러다 보니 마치 단군조선 다음에 또 다른 나라 위만조선이 있었다, 그런 인식을 갖게 된다. 하지만 위만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정확한 명칭은 위만정권이라고 해야 한다. 그것은 단군조선의 서쪽 영토 일부를 일시적으로 장악했던 지방 정권에 불과했다.
대륙의 북부여가 진조선을 계승한 직후 그 서쪽의 번조선 땅에는 중국에서 넘어온 난민들로 넘쳐났다. 위만은 그런 난민들의 우두머리격 인물이었다. 당시 번조선을 다스리던 준왕이 위만을 받아들이고 번조선의 서쪽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 임명하는 등 은혜를 베풀었다. 그런데 정작 위만은 자신의 임지에서 몰래 세력을 길러 서기전 194년 준왕의 왕검성을 친 것이다. 그렇게 준왕을 몰아내고는 스스로 ‘번조선 왕이다’ 칭하고 왕위를 차지하는 배은망덕한 일을 저질렀다.
이 같은 위만정권을 일연의 '삼국유사', 나아가 지금의 강단사학계에서 버젓이 위만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호칭이다. 위만정권에 조선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여서는 안 된다.
번조선 역시 단군조선을 이루던 삼조선의 하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중심은 진조선이었다. 그 진조선의 국통은 분명히 구물단군의 대부여를 거쳐 해모수의 북부여로 이어졌다. 그것이 올바른 국통 맥이다. 반란을 통해 그저 일시적으로 왕위를 찬탈했던 위만에게 단군조선의 계승국을 의미하는 조선이란 명칭을 붙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6. 북부여에서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과정 이야기
『환단고기』는 북부여의 제6세 고무서단군이 후사 없이 죽자 그 사위인 주몽이 대통을 이어받았다고 쓰여 있다. 주몽은 잘 알려진 것처럼 유화부인의 아들이다. 유화부인은 혼인 전 몰래 임신해 부모에게서 쫓겨났는데 마침 동부여의 해부루 왕이 그녀를 동부여로 데려갔다. 이렇게 해서 주몽은 동부여의 왕궁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동부여 사람들의 질시로 신변의 위협을 받자 (자기의 고향이라 할) 북부여로 탈출한다. 그리고는 북부여를 다스리던 고무서단군의 둘째 딸 소서노와 결혼, 고무서단군의 사위가 되어 나중에 왕위를 물려받고 고구려를 열게 된다. 이처럼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가 일찍이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환단고기'는 말할 것도 없고 '삼국유사'에도 분명히 나와 있다. '삼국사기'는 주몽이 동부여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광개토왕비 역시 주몽의 출자가 북부여라고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보다 시대적으로 훨씬 앞선 광개토왕비문의 내용이 정확한 것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직접 갈려나온 나라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백제를 열어젖힌 시조는 고구려 출신 온조이다. 그는 바로 소서노의 아들로 일찍이 그의 배다른 형제인 유리가 장차 고구려 왕권을 이을 것임을 알고는 형 비류와 함께 남쪽으로 이주해 백제를 세웠다.
신라 역시 부여와 밀접한 관계 속에 나라가 세워졌다. 일찍이 북부여 제실의 딸인 파소婆蘇(삼국유사에는 사소娑蘇라고 기록됐는데 북부여 고두막한의 딸로 추정됨)가 아버지 없이 아이를 잉태하는 바람에 뭇 사람들의 눈총을 받게 되자 당시 진한 땅으로 이주한다. 그렇게 이주한 뒤 낳은 아들이 곧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이다. '삼국유사'에는 파소가 중국 제실의 딸이다, 그렇게 쓰여 있는데 이는 북부여의 제실을 잘못 기록한 것이다. 신라에서 성산으로 모시는 성모산의 ‘성모聖母’#가 바로 이 파소 부인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를 건국한 시조들뿐 아니라 그 주민들 또한 대부분 단군조선의 유민들이었다. 한민족의 후예들인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이처럼 단군조선과 북부여의 국통 맥을 이은 한민족의 나라들이었다.
7. 단군조선의 생활상과 유적이나 유물 이야기
단군조선의 강역이던 요령성에서 청동기 문화가 시작된 때는 적어도 서기전 2500년경이다. 이에 비해 중국 황하 유역의 청동기 문화는 단군조선보다 훨씬 뒤인 기원전 2200년경에 시작됐다. 여느 지역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시작된 단군조선의 청동기 문화는 농기구, 제기, 무기 등 제반 도구의 제작기술 수준에 있어서 다른 데보다 높았다. 나아가 단군조선 때는 이미 직물의 생산기술 역시 상당히 발전했다.
지금까지 발견, 발굴된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고대 한민족이 비단을 생산하기 시작한 시기는 중국과 비슷한 서기전 2700년경이다.『환단고기』에 보면 초대 단군왕검이 하백의 딸을 황후로 맞이해 누에치기를 관장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배달국 말기에 이미 비단이 생산됐음을 보여주는 고고학 자료를 통해 뒷받침된다. 단군조선에서 재배한 뽕나무와 그것으로 기른 누에는 중국 것과는 엄연히 다른 품종이었다. 또 비단의 직조방법과 염색기술도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것이었다.
고대 복식사(服飾史)를 연구하는 박선희 교수는 “단군조선의 직조(織造)기술은 중국보다 앞섰으며 비단의 종류 또한 단군조선에 더 많았다”고 한다. 고대 한국은 단군조선 이전의 저 배달시대 때부터 옷감을 생산했고 수준 높은 금속가공 기술로 동북아에서 가장 우수한 직물 생산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제 단군조선 시대의 유물, 홍산문화권의 유물, '환단고기'의 기록 등을 근거로 동서양 교류 역사를 담고 있는 기존의 실크로드(Silk Road 비단길) 역사까지도 새로 쓰여야 할 것이다. 이 뿐만 아니다. 이미 고대 한국에서는 서기전 25세기에 청동 단추로 장식된 복식을 착용했고 그 뒤에는 갑옷과 투구에 이를 응용했다고도 한다. 시베리아의 청동기문화가 서기전 1800년경에 시작되었으니(학계 추정) 단군조선은 중국과 북방 민족들보다 훨씬 앞서 가장 이른 시기에 청동 단추로 장식한 갑옷을 생산한 것이다.
박선희 교수는 이와 함께 묶은 머리(상투)를 고정시키는 옥고玉箍#를 통해 고대 한국인의 문화적 우수성을 말한다. 고대부터 우리 민족은 머리를 틀어 올려 상투를 했다. 단군조선 시대의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저 홍산문화 유적지에서는 옥으로 만든 옥고가 대량 발굴됐다. 박 교수는 “바로 이 옥고에서 우리 금관의 기본 양식이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발굴된 옛 금관의 3분의 2가 우리나라에서 나왔다. 그런데 중국에서 금관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거란이 세운 요나라 때로 한국보다 한참 나중의 일이다. 박 교수는 “옥고와 금관만 보더라도 고대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정체성과 고유성을 증명할 수 있다”면서 “한국이 금관의 종주국”이라고 역설한다.
8. 태조 이성계가 ‘조선’이라는 국호를 쓰게 된 연유 이야기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 뒤 당시 중국(명나라)으로부터 ‘국호를 올리라’는 요구를 받게 된다. 이에 이성계는 ‘조선’과 ‘화령(和寧)’ 두 가지 이름을 지어 1392년 11월 명나라에 알립니다. ‘조선’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원래 단군왕검이 세운 우리나라의 옛 이름이고 ‘화령’은 이성계의 고향 이름을 따온 것이다.
이 가운데 이성계가 조선을 국호로 앞세운 것은 새 나라, 새 왕조로써 옛 조선을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발로였을 것이다. 이성계는 실제로 그런 의지를 드러내기라도 하듯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개명했다. 땅 위에 해가 솟아오르는 형상의 아침 단旦 자를 써서 ‘이제 유구한 국통을 이어 나라의 새로운 새벽을 열겠다’는 그의 포부를 담아낸 것이다.
조선으로부터 이 같은 두 가지 국호를 전달받은 당시 명나라의 홍무제(洪武帝) 주원장은 “동이(東夷)의 국호(國號)에 조선(朝鮮)의 칭호가 아름답고 또 이것이 전래한 지가 오래 되었으니 그 명칭을 본받을 일”이라면서 ‘조선’을 택했다.
9. 단군조선의 역사가 왜곡되고 굴절돼 신화로 격하된 이야기
단군조선은 환국-배달의 국통을 이어받은 우리 한민족의 뿌리인 동시에 자랑스러운 역사다. 두 가지 악의(惡意)가 그 생생한 역사를 짓밟고 지워버렸다. 하나는 한민족의 정신마저 지배하려 한 일제의 야욕이고 다른 하나는 왜곡된 역사를 통해 자기 지위와 이권을 유지하려는 강단사학자들의 탐욕이다.
일제는 식민지 문화정책으로 단군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왜곡하고 나중에는 아예 우리 역사에서 송두리째 들어냈다. 그 바람에 일제가 한반도를 지배한 이후 단군조선의 역사는 그저 신화로 이야기되고, 한민족사는 이른바 위만정권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축소, 서술됐다.
더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그렇게 왜곡된 단군신화론 나아가 위만정권 이후 2000년으로 쪼그라든 한민족사가 마치 진실인 양 이 땅의 주류 사학자들에 의해 후세들의 뇌리에 뿌리를 박았다. 그들은 이른바 실증사학을 앞세우면서 일제가 남긴 식민사학의 해독을 이 나라에 퍼뜨려 왔다. 한민족의 진정한 뿌리, 진정한 역사를 외치는 목소리들을 억눌러 왔다. 그 때문에 나라가 광복된 지 70년 가까이 됐어도 우리 역사는 광복되지 못했다.
다행히 환국-배달시대부터 한민족을 이끌어주신 삼신상제님의 도움으로 우리에게는 역사의 모든 진실을 증언하는『환단고기』가 남았다.『환단고기』가 전하는 진실을 따라 이제 한민족 역사의 실체, 한민족 뿌리의 실체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눈을 가렸던 저 식민사관과 중화사관의 안대를 벗어버리고 한민족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 9천년 한민족사는 신화 따위가 아니다. 힘겨운 고비는 많았지만 국통이 끊어진 적 없이 지금까지 생생한 현실로, 당당한 역사로 이어져 왔다.
<참고문헌>
1. 안경전 역주,『환단고기(桓檀古記)』, 상생출판사, 2012.
2. 이승주, “안경전 종도사의『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야기”, 아시아뉴스통신, 2016.1.4.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