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4 - 대한사랑 2025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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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군은 기벌포에 상륙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의자왕
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 사이 신라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탄현을 넘
었고, 당나라군 또한 무난히 금강 하구에 상륙하였다. 다급한 상황이 되자
의자왕은 계백장군에게 5,000명의 결사대와 함께 신라군을 막게 하였다.
계룡산과 황산 사이의 좁은 골짜기인 황산벌은 적은 수의 백제군사가 10
배나 많은 신라군을 상대하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장소였다.
네 번 싸워 네 번 이기다
한 나라의 사람으로서 당과 신라의 대군을 맞게 되었으니, 국가의 존망을 알 수 없
다. 내 처와 자식들이 잡혀 노비가 될까 염려된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는 것은 죽어
서 흔쾌한 것만 같지 못하다. (『삼국사기』 47권 「열전」 계백)
출정에 앞서 가족을 벌러 모은 계백은 자신의 손으로 처자식의 목숨을
빼앗았다. 전투에 앞선 계백의 각오는 비장함을 넘어섰다. 신라군보다 먼
저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험한 지형을 이용해 백제 군사를 세 진영으로
나눠 배치하고 모든 병사에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옛날 월왕 구천은 5,000명으로 오나라의 70만 대군을 격파했으니, 오늘 마땅히 각
자가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삼국사기』 47권 「열전」 계백)
박물관 2층 <황산벌 10인의 인터뷰>
의자왕과 계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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