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9 - 대한사랑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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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인류 최초이자 마지막 핵폭탄이 터지면

                      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대한은 해방이 되었다. 3
                      년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듬해 7월 29일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86세의 노구를 이끌고 30일이 넘는 여행을 하고 방한을 한 미국인이 있었다. 그
                      러나 그해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고자 했던 그는 한국에 온 주 1주일 만인 8월 5

                      일에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입원 중 사망하고 말았다. 고령에 오랜 기간 여행을
                      통해 쌓인 여독을 이기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
                      회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고 오늘날 서울 마포구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이는 그가 생전에 “내가 젊은 시절 사랑했던 한국 땅에 묻히고 싶다”라
                      고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런 고인의 뜻을 받든 것이었다. 그의 첫째 아

                      들 쉘던은 2살 때 사망하여 이미 양화진에 묻혀 있었다. 그의 이름은 호머 B.헐
                      버트 Hulbert 이다. 한국 이름은 헐벗 또는 흘법(訖法), 허흘법(許訖法), 할보(轄甫),
                      허할보(許轄甫)였으며, 한국어에 능통하였다. 헐버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민

                      국으로 떠나며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도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
                      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유언 같은 말을 남겼다.



                      대한제국 국권 수호에 나선 한국의 친구
                        헐버트는 미국인으로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사학자로 7개 국어를 구사하는 언

                      어학자로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영어를 가
                      르쳤던 교육자였다. YMCA초대 회장이었고, 독립신문 발행을 도운 언론인으로

                      특히 한국어와 한글 연구와 보급에 앞장선 한글학자였다. 또한 고종황제를 도와
                      대한제국 말기 국권 수호를 적극 도왔으며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

                      한 독립운동가였다.
                        1895년 10월 8일 일본 정부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는 만행이 일어났을 때

                      그는 언더우드, 애이비슨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고 한다.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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