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0 - 대한사랑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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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최측근이 되어 보필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기능을 했다.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은 외국인으로 고

            종황제로부터 세 번이나 특사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의 특사로서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

            하는 밀서를 미국의 대통령 및 국무장관에게 전달하고자 했으나 성사되지는 못
            했다. 1906년 다시 입국해 영문 월간 잡지 『한국 평론 The Korea Review』을

            창간하고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해 폭로하였다. 이후 미국을 비롯한 열강 국가
            들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07년 헤이그로 향한 대한제국의 네 번째 특사

              1907년 헐버트는 고종 황제에게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하도록 건의하였다. 헐버트는 한국 대표단인 헤이그 특사 이
            준, 이상설, 이위종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해 『회의시보』에 우리 대표단의 호소

            문을 싣게 하는 등 한국의 국권회복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래서 헐버
            트를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본제국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못했으며,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이것이 일본제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빌미
            로 일본제국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헐버트를 대한제국에서 사실상 추방하

            였다. 1907년 7월 헤이그 평화 클럽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질타한 후 서울로 돌
            아오지 못하고 미국으로 간 헐버트는 미국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의 미주 독립운

            동가들에게 적극 지원하여 활동에 힘을 보탰으며, 한국의 독립을 위해 미국 각지
            를 돌면서 일본제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하였고, 한국의 분리독립을 호소하였다.



            한글을 지켜라

              그는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에 매료돼 미국 언론과 영문 잡지에 기고와 논문
            을 통해 한글과 한국문화를 홍보했고, 한글에 띄어쓰기 도입을 적극적으로 권장
            하여 띄어쓰기가 본격적으로 한글에 도입되도록 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헐버트는 입국 직후부터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
            기 위해서는 한국어 학습이 필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사비를 들여 개인

            교사를 고용하여 한국어를 배웠다. 그의 회고록에는 “배우기 시작한 지 4일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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