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1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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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卽樂浪郡治,漢武帝置而西北流. 故地理志曰,浿水
至增地縣入海.考之古今, 於事差謬, 蓋經誤證也.
무제 원봉 2년, 한무제가 루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과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를 보내 우거왕을 공격하였는데, 우거왕을 패수(浿水)에서 깨
뜨려서 드디어 그들을 멸하였다. 만약 패수가 동으로 흘렀다면 패수(浿
水)를 건널 수 없었다. 그 땅은 지금 고구려의 도읍인데 내가 그 나라의
사신들을 만나 물어보니 패수(浿水)의 북쪽에 (평양)성(城)이 있다고 하
였다. 패수는 서쪽으로 흘러 간다고 하였다. 낙랑의 조선현은 낙랑군
이 다스리는 현인데, 한무제가 설치한 것이다. 패수는 서로 흘러간다.
옛 지리지에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서쪽으로 증지현(增地縣)에 도달하여
해(海)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한 한(漢)이 일어났을 때 위만조선(衛滿
朝鮮)의 땅이 너무 멀어 요동(遼東)의 옛 성을 다시 수리하여 패수(浿水)를
국경으로 삼았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여 볼 때 『수경』에서 패수가 동쪽으로 흘렀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역도원은 『수경』에 ‘패수’라는 단어가 나오자 2세기 경의 ‘패수’와 6세기 경의
‘패수’를 같은 ‘패수’로 인식하였다. 패수는 시대에 따라 위치가 변하는데, 이를
모른 것이다. 역도원은 『수경』에 기록된 패수의 물길 기록은 잘못된 것이며, 물
길 방향을 볼 때 낙랑군은 평양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을 한 것이다. 역도원은
400여 년 전의 『수경』의 기록을 부정하고, 답사도 하지 않고, 사신의 말만 들
어 『수경주』를 쓴 것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6세기 경 고구려 평양성이 패수의 북쪽에 있
었다는 점이고, 당시의 패수는 동쪽에서 나와 서쪽으로 들어간다는 점을 알 수
있다.(①번 지도 참조-20p)
2)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의 묘지명
묘지명은 당나라 시기로 680년을 전후의 기록이다. 묘지명에서는 연남생의 출
신지를 ‘요동군 평양성’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무너뜨린
이후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또 ‘요동군’을 설치하였는데, 그 안에 고구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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