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1 - 월간 대한사랑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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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 만주 인삼의 가치를 알았고 그 이익을 독점하였다. 17세
기 말까지 만주에서 나는 인삼은 청나라 팔기군에 의해 통제되었다.
건륭제는 인삼을 ‘장백산의 보배’라고 하였다. 장백산은 청나라 황실의 신성한
발상지이며 그곳의 왕기가 모여서 생긴 것이 인삼이라고 본 것이다. 『금사(金史)』
에서는 여진족의 강역을 백산, 흑수라고 설명했다. 많은 자료에서 흑수인 북쪽의
흑룡강과 백산인 남쪽의 장백산 강역에서 나는 인삼[산삼]과 요양 동쪽에서 자생
하는 요동삼이 아주 좋은 삼이라고 보았다. 사조제(1567~1624)는 『오잡조(五雜粗)』
에서 “인삼은 요동삼이 가장 좋다”라고 했다. 청대의 시인이면서 산문가인 원규
생(阮葵生, 1727~1789)은 문집인 『다여객화(茶餘客話)』에서 “요양의 동쪽 산중에는 인
삼[산삼]이 많다. 땅의 기운이 여기에 모인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요양의 동쪽인 만주는 청나라의 발상지인데, 이곳의 상서로운 기운으로 인삼과
같은 귀물(貴物)이 자란다는 얘기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삼국시대 때 신라의 산맥에서도 인삼[산삼]이 채취되
었고 신라는 당나라에 바치는 조공의 주요품목으로 인삼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
다. 그런데 국력이 강한 고구려에서는 당나라에 조공을 바칠 이유가 없기에 고려
인삼을 바쳤다는 내용은 없다. 이 당시 고구려에서도 요동에서 인삼[산삼]이 채취
되었다. 그런 고구려 인삼이 고려까지 이어지면서 고려인삼이라는 특별한 호칭
이 붙여졌다.
지금까지 살펴본 요동에서 생산되는 고려인삼은 송나라, 거란 황실의 건강과
수명을 위해 꼭 필요한 물품이라고 본다. 그러한 고려인삼이 나는 요동은 중요
한 지역이기에 거란은 6차 침공 중에 압록강인 요하 동쪽을 차지하고자 하였고,
6차 침공 이후에도 요하 동쪽에 보주를 설치하였다.
지금까지 요하 주변 지역인 강동 6주의 경제적 가치를 살펴보았다. 거란의
2~6차 고려 침공은 경제적 가치가 있는 6주를 차지하고자 하는 의도로 야기된
전쟁이었다.
결론적으로 거란은 전쟁을 통해서라도 6주를 차지하고자 했던 것은 강동 6주
가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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