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8 - 월간 대한사랑 24년 2월호 (3호)
P. 68
된 초기 압록강(鴨淥江, 요하)과 말기의 요동, 심양 라인과는 아무런 관련
이 없는 조선총독부 쓰다 소키치의 주장일 뿐이다.
우왕이 증거하는 철령위 위치
철령위 설치를 통보한 명나라는 고려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 군사를
동원하여 진행코자 하였는데, 우왕은 시간이 지체됨을 안타까워하며
강력한 군사 대응을 진행하였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명나라에서 설치
를 강행한 철령위는 강원도의 철령이 아니라 요동의 어느 지역임이 명
백하게 드러나 있다. 요동이 고려의 영역이 아니라면 우왕이 요동을 친
다는 말 자체가 명나라의 영토를 침범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북면 도안무사 최원지(崔元沚)가 보고하기를, “요동 도
사가 지휘(指揮) 두 사람을 보내어 군사 1천여 명을 거느
리고 와서 강계에 이르러 장차 철령위(鐵嶺衛)를 세우려
하여 요동에서 철령에 이르기까지 역참 70군데를 두었
다.” 하였다. 우가 동강에서 돌아오다가 말 위에서 울며
이르기를, “군신들이 요동을 치려는 나의 계책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이 되게 하였다.” 하고, 드디어 팔도의 군
사를 징집하였다.
(西北面都安撫使崔元沚, 報遼東都司, 遣指揮二人, 以兵千餘, 來至江界, 將
立鐵嶺衛, 自遼東至鐵嶺, 置七十站. 禑乃自東江還, 馬上泣曰, 群臣不聽 吾
攻遼之計, 使至於此, 遂微-八道兵.)(『고려사절요』 제33권 신우 4(辛禑
四))
고려와 명나라의 자존심을 건 한판의 전쟁은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종결되었고, 철령위 설치 문제는 조용히 관심 밖으로 사라져
갔다.
66
0202월간대한사랑_3호_본문.indd 66 2024-02-05 오후 5:26: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