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0 - 월간 대한사랑 24년 2월호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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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1천여 명의 농민과 동학도들이 맨 먼저 횃불을 들었다. 고부 군수 조

                 병갑의 폐정에 못 이긴 이들 봉기군은 2월 15일 고부 읍내를 습격하였고,
                 이 사실이 관아에 알려지자 군수 조병갑은 황급히 도망쳤다. 3월 25일 전

                 봉준이 거느린 동학농민군은 백산으로 이동하여 포진하고 조정의 동태를
                 예의주시했다. 조정에서는 이 사태를 백성의 소요로 규정하고 장흥 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아 고부 사변을 다스리게 하였다. 하지만 안핵사 이
                 용태는 사건의 진상이나 민심의 동향은 전혀 고려치 않고 역졸들을 풀어
                 무고한 백성을 함부로 구타하고 재산을 약탈하며 부녀자를 능욕하며 동

                 학도들을 색출하여 역도로 몰아 옥에 가두기까지 하자 백성들의 원성이
                 다시 들끓기 시작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한발 물러서서 조정의 처사를 관망하고 있던 전봉
                 준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8천 명의 동학농민군을 거느리고 파죽지

                 세로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 등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동학혁명군이 지방관아의 정치 폐단에 대한 개혁을 요구하는

                 조목을 보면 노비해방, 토지재분배, 탐관오리 숙청, 양반 토호의 탐학 배
                 격 등 주로 봉건사회의 모순개혁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청일전쟁의 빌미가 된 동학혁명

                   이에 놀란 조선 조정에서는 부득이 청국에 원병을 요청했다. 조선 조정
                 의 원병 요청을 받은 청국은 출병하게 되었고, 1885년 청국과 일본이 조
                 선에 대한 양국 군대의 파병 통보 및 동시 군대 출병이라는 천진조약에 따

                 라 청국이 파병 통보를 하자 일본도 동시에 출병하게 된다.
                   동학군들은 외국군대가 들어오자 국가 안위에 위협을 느껴 조정과 화약

                 을 맺고서 전주성을 나와 자진 해산을 하게 되고, 이에 조선 조정은 청국
                 과 일본에 철군을 요청하자 청나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일본은

                 대응도 하지 않고 있다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후 풍도에 정박하고
                 있던 청나라 배를 공격하면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청일전쟁이 시작하는 것을 보고서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의 동학농민군
                 은 일본을 물리친다는 목적으로 거병을 하게 되는데 이때는 온건파인 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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