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 - 월간 대한사랑 24년 1월호 (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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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한인애국단
                                                              선언문







           거사는 실패로 끝났지만 이 의사가 상해임시정부 및 독립운동사에 끼

         친 영향으로 볼 때 결코 실패한 의거가 아니었다. 나라를 빼앗겨 타지를
         전전하며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은 청산리전투 이후에 크게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투쟁노선 차이로 내부 다툼까지 심화되며 침체 기로에
         있었다. 이 의사의 의거와 같은 해 4월에 벌어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중국 장제스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며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새 활
         로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의사의 유해는 독립 후에 1946년에 송환되어서 효창 공원에 안장

         되었다. 이 의사 기념관(이봉창 의사 역사 울림관)이 효창공원역 근처에 있다.
           현재 한국의 사학계는 실증사학이라는 명분하에 일본이 일제시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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