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3 - 국제학술문화제-정신문화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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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학문: 우리 정신의 철학적 복원 이승종
쪽~)을 감행한다. 유교는 우리 스스로에 의해 “지양과 극복의 과정이 없었기에” 유교적 관성은 “의
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발현되곤 한다.” 유교적 이성은 평자가 보기에 ―마치 서구가 과학기
술문명의 도구로 전락한 “도구적 이성(instrumentale Vernunft)”과도 유사하게― 정치 이데올
로기로 전락한, 말하자면 어떤 자율성이 바탕이 된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형식화•도
그마화된 그런 “도구적 이성”으로 보인다. 비록 유교는 성즉리(性卽理)를 기본으로 하지만, 어떤
주장이나 명제엔 이성적 근거나 논증이 뒷받침된 것이 아니라 권위있는 자의 “가라사대”가 결정적
인 역할을 한다. 이를테면 “男女七歲不同席”이라거나 “삼종지도(三從之道)”며 “칠거지악”이란 명
제를 내세울 경우, 아무런 근거나 논증도 없이 단지 그럴 따름이어서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은
아무런 이성적 근거제시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유교적 이성”에는 유교적 비이성도 따라다니
는데, 과연 “유교적 이성”이 온당하게 형성된 개념인지 논자의 견해를 묻고 싶다.
논자의 견해에 의하면 “조선을 극복하기 위해 요구되는 유교이성비판이 우리 스스로에 의해 한
번도 수행된 적이 없었기에 우리는 유교적 관성의 유혹에 여전히 무방비상태이고 실제로 그 덫에
쉽게 걸려들곤 한다.”(2쪽)고 하는데, 한편으로 학계(특히 사학계와 철학계)의 태도를 감안할 때
맞다고도 여겨지지만, 지금은 조선의 사대주의 패러다임에서 다소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젊은 세
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반중정서를 감안할 때 유교적 관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건
지 묻고 싶다.
논자의 지적대로 공자는 유교의 본산인 주나라의 문화와 문물을 숭상하고 동이계의 은나라 전
통을 배척하였다. 유교는 권력으로 세상의 질서를 잡겠다는 권력지상주의를 추구하였고 각종 규
율적 도덕의 형식을 고안하여 인간세상이 이 도덕 형식에 맞추도록 강요하였다. 조선은 이성계가
권력을 탈취하면서부터 중화주의로 기울였으며, 스스로 중국의 제후국으로 여기고, 중국의 천자
만이 하늘을 독점할 수 있다고 여겼으며, 수 천년 동안 이어져왔던 제천례와 고유한 축제문화인
팔관회를 폐지하였다(2쪽).
더욱 치명적인 것은 “중화사관과 어긋나보이는 사서(史書)들은 모두 수거되고, 관변 이데올로기
와 다른 목소리를 내는 학자나 선비들은 사화를 면치 못했다. 조선은 철두철미하게 유교의 나라였
으며 유교는 조선 지배계층의 생활양식이었다.”(2쪽) 아마 중화사관과 어긋나는 것으로 보이는 동
이와 고조선 및 단군사화와 관련된 사서(史書)들은 그때 소실되어버렸을 가능성도 다분한 것으로
보인다. 유교와 엇박자를 낸 허균은 죽음을 면치 못했고, 양명학을 했다는 정제두는 숨어다니며
살았다.
정작 지나에서는 제자백가의 전통을 가졌지만, 조선에서는 유학만 허용되었으며, 소위 과거시
험의 텍스트도 유교서적에 한정되었다. “조선에서 유교는 사대주의와 짝을 이루어왔다. (…)유교
를 배우고 익히면서 조선인은 이(夷)의 정체성을 버리고 스스로 부과한 이등 중국인의 자격으로(소
중화) 중국적 천하질서에 귀화되었다.”(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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