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5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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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본 위치 인식에 대한 고찰 길이숙
니, 그는 제자를 시켜 글로 쓰기를,
“그 묘(墓)는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20리쯤 가면 석비(石碑)와 분묘(墳墓)가 나
타납니다.”
하였다. 나는 또 묻기를,
“어제 듣기는 지금 말과 좀 달랐습니다. 거기에는 집이 있고 온 동네 안에는 모두 석곽(石槨)이
있는데, 고려인의 두골(頭骨)이 석곽 안에 들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무슨 말입니까?”
하니, 스님이 글을 써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자가 어렸을 때에 사부(師父)께서 성 서쪽 이도구(二到溝)에 가면 성에서 10리쯤 떨어진 곳
에 고려왕의 무덤이 있는데, 달자(韃子)들이 무덤을 부수고 수 길이나 깊이 파 놓았기 때문에 관
틀[棺材]은 물에 잠겨 버리고, 곽(槨)만이 드러나 있는데 벽돌로 쌓아 내부[室]를 만들었다고 했
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어가 보니까 비석이 있는데 고려왕 무덤이라고 쓰여있었기 때문에, 그러
한 전설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요동이 일찍이 우리나라에 속해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러나 이 지역은 요동에서
도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므로 고려왕 묘(高麗王墓)가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
다. 일찍이 우사상국(雩沙相國 이세백(李世白))의 일기(日記)를 보니, 광녕성(廣寧城) 북쪽에
기자정(箕子井), 기자묘(箕子廟)가 있다는 말이 있었다. 아마도 이 말이 지금 들은 바와 똑같은
어원[苗脉]인 듯하다. 그렇다 해도 기자의 유적(遺跡)이 또 어찌하여 이곳에 있단 말인가. 끝내
알 수 없는 일이다. 우선 기록하여 아는 사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102)
Ⅳ. 근현대
모리스 꾸랑은 1898년 광개토태왕에 대한 전문적인 논문을 작성한다. 일본에서 최초의 광개토
경평안호태왕비 보고서인 『회여록』이 나온지 10년밖에 안 된, 아주 이른 시기이다. 103) 그는 송화
강을 숭가리강[엄리, 엄체, 엄표, 시엄]이라는 만주어로 부르며, 아무르강이 약수(弱水), 흑수(黑
水), 우수리강이 태로수(太魯水)라 하고, 압록강[얄루키양, 비류]에 있는 높은 계곡에 이르러 홀본
(忽本)에 자리 잡았다고 했다. 흘승골과는 이웃으로 보았다. 위나암성, 불이성, 환도성이라고 불렸
던 국내성과는 졸본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비(광개토경평안호태왕)가 서 있
102) 金昌業. 『燕行日記』. 「老稼齋燕行日記」 卷之九 癸巳 三月 初二日。己卯, 昨日觀音閣道中寺僧向從者言。山下有一古
墓。傳是高麗王所藏。其言可異。及是問於秀行。使其徒弟書曰。這墓去此不遠。廿里之路。石碑墳墓現有。又問曰。昨日所聞。
與此有些不同。說有屋渾。是洞內有石槨。傳言高麗人頭骨。藏在這裏。是甚話。僧書曰。弟子年少。師父知。到城西二到溝離城
十里。有高麗王墳。㺚子打壞窟龍三丈深。棺材水淹了。槨現在。以磚造室。人或入見。有碑書高麗王墳。因此傳說。其碑今仆
在土裏。余念遼東曾屬我國。而此地則去遼東亦遠。不知高麗王墓。何以在此也。曾見雩沙相國日記。有廣寧城北箕子井箕子
廟之語。無乃此說。與今所聞。同其苗脉耶。然箕子遺跡。亦何以在此。終有不可知者。姑記之。以俟知者。
103) 서길수, 모리스 꾸랑, 에두아르 샤반느, 『한말 유럽 학자의 고구려 연구』 (서울: 여유당출판사, 2007),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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