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6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P. 306
동북공정 분과
“신대왕(新大王) 4년(168) 가을 9월에 졸본(卒本)에 이르러 시조묘(始祖墓)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고국천왕(故國川王) 원년(179) 가을 9월, 동천왕(東川王) 2년(228) 봄 2월, 중
천왕(中川王) 13년(260) 가을 9월, 고국원왕(故國原王) 2년(332) 봄 2월, 안장왕(安藏王) 3년
(521) 여름 4월, 평원왕(平原王) 2년(560) 봄 2월, 건무왕(建武王) 2년(619) 봄 4월에도 모두
위와 같이 행하였다.
168년부터 619년까지 제사가 이어지는데, 고국원왕 2년(332)부터, 안장왕 3년(521)까지 약
190년간 제사 기록이 없다. 13) 『삼국사기』에는 졸본 위치에 대한 찬자의 의견이 나온다.
마) 살펴보건대 《통전(通典)》에서 이르기를 “주몽(朱蒙)이 한(漢) 건소(建昭) 2년(기원전 37년)
에 북부여(北扶餘)로부터 동남쪽으로 나아가 보술수(普述水)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 에 이
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句麗)라 하고 ‘고(高)’로써 성씨를 삼았다”라 하였으며, 고기(古
記)에서 이르기를 “주몽(朱蒙)이 부여(扶餘)로부터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
다.”라 하였으니, 곧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같은 한 곳이다. 《한서지(漢書志)》에
서 이르기를 “요동군(遼東郡)은 낙양(洛陽)에서 3천 6백리 떨어져 있으며, 속한 현으로서 무려
(無慮)가 있다.”고 했다. 곧 《주례(周禮)》에서 보이는 북진(北鎭)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대
요(大遼)때에 그 아래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또 한서지에] “현도군(玄菟郡)은 낙양(洛
陽)에서 동북으로 4천리 떨어져 있고, 속한 현이 셋이며, 고구려가 그중 하나이다.”라 하였으니,
곧 이른바 주몽이 도읍한 곳이라고 말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아마도 한(漢)
의 현도군(玄菟郡)의 경계이고, 대요국(大遼國) 동경(東京)의 서쪽이며, 《한지(漢志)》에 이른
바 현도(玄菟)의 속현 고구려(高句麗)가 이것일 것이다. 옛날 대요(大遼)가 멸망하지 않았을 때
에 요(遼)의 황제가 연경(燕京)에 있었으니, 곧 우리의 조빙하는 사신들이 동경(東京)을 지나 요
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에 의주(醫州)에 이르러, 연계(燕薊)로 향하였음으로 고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
“졸본은 흘승골성과 같은 곳이고, 현도군의 경계에 있으며, 고구려현”이라고 하였다. “요동군
12) 『三國史記』 卷第三十二 「雜志」 第一 祭祀, “新大王四年秋九月, 如卒夲, 祀始祖廟.” 故國川王元年秋九月, 東川王二年
春二月, 中川王十三年秋九月, 故國原王二年春二月, 安臧王三年夏四月, 平原王二年春二月, 䢖武王二年春四月, 並如上行.
13) 고국원왕이 전연과의 전쟁으로 수도를 평양동황성으로 천도한 것과 관련이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4) 『三國史記』 卷第三十七 「雜志」 第六 地理四 高句麗, 按通典云, “朱䝉以漢建昭二年, 自北扶餘東南行, 渡普述水, 至紇
升骨城居焉, 號曰句麗, 以髙爲氏.” 古記云, “朱䝉自扶餘逃難, 至卒本.” 則紇升骨城·卒夲似一處也. 漢書志云, “遼東郡, 距
洛陽三千六百里, 屬縣有無慮.” 則周禮北鎮醫巫閭山也, 大遼於其下置醫州. “玄菟郡, 距洛陽東北四千里, 所屬三縣, 髙句
麗是其一焉.” 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夲者, 蓋漢玄菟郡之界, 大遼國東亰之西, 漢志所謂玄菟屬縣髙句麗是歟. 昔大
遼未亡時, 遼帝在燕景,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薊, 故知其然也.; 임찬경, 「고구려 첫 도읍
위치 비정에 관한 검토」, 『선도문화』 20, (2016), 309쪽, “이러한 왕래 과정에 고구려 초기 도읍이 그곳에 위치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러함을 알 수 있다.’고 서술한 것이다.”
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