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4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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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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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때에 계림이란 이름은 곧 지금의 길림이 변한 것”이라는 기사가 있다. 안함로가 신라의 옛 땅
을 길림지역으로 인식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북부여 고두막한의 황실
혈통이기 때문에 고두막한의 동명이 당연히 신라의 옛 땅이 된다. 고두막한의 동명은 나라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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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부여의 옛 도읍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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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승골성, 추모, 졸본, 홀본 등의 단어와 해모수, 고두막한, 고추모가 고리국 출신이라는 것을 연
결하여 살펴볼 때, 몽골과의 연관성에 관심을 두고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즉 몽골에 홉스골이라는
호수가 있고, 몽골어에 ‘촐몬’이라는 단어가 추모, 졸본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촐몬은 우
리 말의 금성(샛별)으로 새벽에 동쪽 하늘에 뜨는 별이며, 천자강림을 나타내고 있다. 고두막한의
동명은 촐몬의 의역이 될 것이고, 추모, 졸본, 홀몬 등은 음사가 될 것이다. 따라서 고리국은 몽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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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관련이 있을 수 있고, 지역적으로도 몽골지역이나 그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2. 고려시대
1) 『삼국사기』
가) ... 주몽이 가다가 모둔곡(毛屯谷)에 이르러 『위서(魏書)』에는 “음술수(音述水)에 이르렀
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 능력을 살펴 각기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卒本川)에 이르
렀다. 『위서』에는 “흘승골성(紇升骨城)에 이르렀다.”라고 하였다.
〔주몽은〕 그 토양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자연 지세[山河]가 험하고 단단한 것을 보고 드디어
도읍하려고 하였으나,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었기에 단지 비류수(沸流水) 가에 초막을 짓고 살
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고(高)를 성씨[氏]로 삼았다.
나) 혹 말하기를, “주몽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는데, 왕이 아들이 없었다. 주몽을 보고
는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라고 하
였다. 이때 주몽의 나이가 22세로, 한(漢)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B.C. 37),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 갑신년(甲申年)이었다. 사방에서 듣고 와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 땅이
말갈 부락에 잇닿아 있기에 침입과 도적질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그들을 물리치
니, 말갈이 두려워 굴복하고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다) 왕이 비류수 가운데로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았기에,
5) 이병주 감수, 남주성 역주, 『欽定滿洲源流考 上』 (서울: 글모아출판, 2010), 29쪽. 若唐時所稱雞林 應即今吉林之訛
6) 이맥(李陌, 1455~1528),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616~617쪽. “사로의 첫 임금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적에 부여 황실의 딸 파소가 지아비 없이 잉태하여 남의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에 눈수嫩水에서 도망하여 동옥저에
이르렀다가 또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한의 나을촌에 이르렀다.”
7) 부여의 옛 도읍은 흘승골성을 말한다.
8) 복기대 교수의 의견도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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