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7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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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본 위치 인식에 대한 고찰  길이숙



                 무려현은 북진의 의무려산이고, 그 아래 요나라의 의주가 있는데 그 곳이 졸본”이라는 것이다.                                  15)

                 『삼국사기』의 찬자는 졸본을 고구려현과 같이 보았다. 그같은 인식은 卷第十三 「髙句麗本紀」 第一
                 琉璃王 31년조     16) 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 『삼국유사』



                    가) ≪동명기(東明記)≫에 이르기를, “졸본성(卒本城)은 땅이 말갈 (혹은 이르기를 “지금의 동

                    진(東眞)이다.”라고도 한다.)에 연접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17)
                    나)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전한서≫에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 4월 8일

                    천제(天帝)가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五龍車)를 타고 흘승골성(訖升骨城) (대요(大遼) 의주
                    (醫州)지역에 있다.)에 내려와서 도읍을 정하고 왕으로 일컬어 나라 이름을 북부여(北扶餘)라

                    하고 자칭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다. 그 후 왕은 상제의 명령에 따라 동부여로 도읍을 옮기게 되고 동명제가 북부여를

                    이어 일어나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세우고 졸본부여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高句麗)의 시조
                    이다.”라고 하였다.     18)

                    다) 고구려는 곧 졸본부여이다. 더러는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이다.”라
                    고들 하나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지역에 있다.                 19)

                    라) 그는 졸본주(현도군의 지역이다.)까지 와서 드디어 여기에 도읍을 하였다. 미처 궁실을 지을
                    사이도 없어 그저 비류수(沸流水)가에 초막을 짓고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                           20)

                    마) 졸본부여는 역시 북부여의 별개 도읍지이므로 부여왕이라고 한 것이다.                         21)


                 15) 무려(無慮)현과 의무려산(醫巫閭山)이 같은 곳인지는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16) 『三國史記』 卷第十三 「髙句麗本紀」 第一 琉璃王, 31년(12) 한나라 王莽이 우리 병력을 징발하여 胡를 정벌하려고
                 하였다. 우리가 가려고 하지 않자 무리하게 억지로[強迫] 보내었더니, 모두 도망하여 밖으로 나가버렸고, 그로 인하여
                 법을 어겨 도적이 되었다. 遼西大尹 田譚이 그들을 추격하다 죽임을 당하니, 〔중국의〕 州郡이 잘못을 우리에게 돌렸다.
                 嚴尤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인(貊人)이 법을 어겼으나, 마땅히 주군으로 하여금 저들을 위로하여 편안케
                 하여야 합니다. 지금 함부로 큰 죄를 씌우면, 그들이 결국 배반할까 염려됩니다. 〔배반이 일어나면〕 부여의 족속 중에
                 반드시 부응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니, 흉노를 아직 이기지 못하였는데, 부여와 獩貊이 다시 일어난다면 이는 큰 근심거
                 리입니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엄우의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명령하여 이를 공격하였다. 엄우가 우리 장수 延丕를
                 꾀어내 그 목을 베어 머리를 수도[京師]로 보냈다. 兩漢書와 南北史에는 모두 “句麗侯 騶를 꾀어내 목을 베었다.”라고
                 하였다. 왕망이 이를 기뻐하며 우리 왕을 下句麗侯라 고쳐 이름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에 〔고구려
                 가〕 漢의 변방[邊地]을 침범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17) 『三國遺事』 卷 第一 「紀異第一」 靺鞨· 渤海, 又東明記云 “卒夲城地連靺鞨 (或云今東真).”
                 18) 『三國遺事』 卷 第一 「紀異第一」 北扶餘, 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天帝降于訖升骨城 在大遼醫州界.
                 乗五龍車立都, 稱王國號北扶餘自稱名解慕漱. 生子名扶婁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移都于東扶餘, 東眀帝継北扶餘而
                 興立都于卒夲州爲卒夲扶餘, 即髙句麗之始 見下.”
                 19) 『三國遺事』 卷 第一 「紀異第一」 高句麗, 髙句麗即卒夲扶餘也. 或云 “今和州又成州䓁”, 皆誤矣. 卒夲州在遼東界.
                 20) 『三國遺事』 卷 第一 「紀異第一」 高句麗, 至卒夲州 (玄菟郡之界.) 遂都焉. 未遑作宫室但結廬扵沸流水上居之, 國號髙
                 句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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