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0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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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은 고두막 단군에 쫓겨 가섭원(일명 동부여)으로 옮겼는데, 가섭원의 다른 이름이 차릉이다. 고추
모왕이 건너려 했던 강이름으로 차릉수와 엄리대수가 나온다. 고추모가 자라 등의 도움을 받아 건
너려 했던 강은 동부여 수도 인근에 있는 강으로 볼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고추모가 도읍한 졸본은 홀본이고, 흘승골성이고, 졸본부여이다. 북
부여의 해모수는 웅심산 난빈, 흘승골성에 도읍했는데, 『삼국유사』에 의하면 흘승골성은 북진 의
무려산 아래 요나라의 의주이다. 고두막한이 일어나자 북부여는 망명하여 동부여를 열었다. 졸본
부여(동명)는 고두막한(동명)이 부여의 옛 고도(즉 흘승골성)에 세운 나라이다. 『삼국사기』 찬자는
졸본이 의주에 있다고 보았고, 현도의 경계이며, 고구려현이라고 하였다. 34) 즉 흘승골성과 졸본
의 위치비정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동일하게 보인다. 『삼국유사』의 찬자는 “졸본은 요
동지역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요동을 지금의 요하 동쪽으로 본 것이 아니라, 최소 의무려산이나
대릉하, 소릉하를 경계로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Ⅲ. 조선시대
1. 성천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성천도호부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비류(沸流)와 송양(松讓)의 옛 서울이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東明王)이 북부여(北扶餘)
에서 와서 졸본천(卒本川)에 도읍할 때 송양이 그 나라를 바치고 ... 다물도(多勿都)를 설치하고
송양을 봉하여 다물후(多勿侯)로 하였다. 35)
로 되어 있다. 그것이 전 조선 시기에 영향을 미쳐 고종 5년의 승정원일기에도 “고구려는 처음에
졸본부여(卒本扶餘)에 도읍하였는데, 바로 지금의 성천(成川)입니다. 36) ”라는 대목이 나온다.
34) 여기서 주의할 것은 김부식이 고구려현과 고구려를 동일하게 보면서, 고구려현을 고구려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가 현도에 속해 있다고 볼 수도 있고, 반대로 고구려현이 현도와 별개였다고 볼 수도 있다. 즉 유리왕이
복속시킨 고구려현과 졸본이 있는 고구려현을 별개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 고구려현이 졸본과 접경지역으로 서로
붙어있다면, 현도에 속한 고구려현이 있고, 독립되어 있는 고구려가 있을 수 있다. 그렇게 이해했을 경우, 고구려현이
왕망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이유가 명확해진다. 고구려현 사람들이 고구려(졸본부여, 북부여, 대부여, 대조선)와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김부식의 고구려현 인식은 조선시대에 졸본이 의무려산 부근에 있다는 것을 불신하는
근거가 되었다.
35) 이행(李荇, 1478~1534), 『新增東國輿地勝覽』 卷54 「平安道」 成川都護府, 建置沿革, 本沸流王松讓故都。高句麗始
祖東明王自北扶餘來, 都卒本川, 松讓以其國降, 遂置多勿都, 封松讓爲多勿侯。麗語謂復舊土爲多勿。高麗太祖十四年, 置剛
德鎭。顯宗九年, 改成州防禦使, 後爲知郡事。本朝太宗十五年, 改今名, 例陞爲都護府。世祖朝置鎭。
36) 『承政院日記』, 「高宗 5년」 戊辰(1868, 同治(淸/穆宗) 7년) 8월 29일(癸酉) 비(雨), 高句麗, 初都卒本扶餘, 卽今成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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