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19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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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건국연대 재정립에 의한 만주의 영토권 연구 신용우
효율적으로 한사군의 위치를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해서 기원전
108년에 한사군을 설치할 때 난하 유역과 요하 서쪽에 머물러야 했던 영토 구조에 대한 제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존의 통설처럼 한나라 침공 당시 고조선이 만주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고 한나라가 고조선
을 일거에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했다면, 한사군은 만주를 지나 한반도까지 유입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가정은 우리 한민족이 고조선 이래 연속적으로 만주를 지배하고 생활 터전으로
삼았던 연속성에도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고조선 멸망 이후 만주에 부여가 있었다지만
부여가 만주 전체를 지배하고 생활권으로 삼았다는 근거가 부족하므로, 고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부터 고구려가 건국되었다고 알려진 기원전 37년까지는 한나라가 만주의 중심부를 지배하
며 생활 터전으로 삼았다고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에는 한나라가 만주는 물론 한반도
까지 침공했다는 사대・식민적인 사관에 대항할 논리가 부족해질 뿐만 아니라, 중국이 왜곡하고
있는 동북공정에 대한 빌미를 제공하는 구실 중 하나로 작용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한사군이 한반도
는커녕 만주 중심부에조차 진입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혀야 함은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
나라 침공 당시 만주에 있던 나라와 영역을 올바로 밝힐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사군의 위치가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그 위치에 따라서 만주의 영토권이 향방을 달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존 학설처럼 한사군이 한반도와 만주에까지 존재했다면 만주와 한반도에 한나
라의 주를 이루던 한족(漢族)이 상당수 진출해서 지배하며 생활했을 것이고, 그에 따라서 만주의
영토문화 역시 한족으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통설에 의하면 임
둔군과 진번군은 설치된지 25년 만에 각각 현도군과 낙랑군에 통합되었다. 현도군은 기원전 75년
부터 군치를 옮겨다니며 제구실을 못 했지만 315년까지는 버티다가 이후 소멸되었고, 낙랑군은
313년 고구려 미천왕 때 고구려에 귀속되기까지 중국의 정치・경제・문화적 침투의 전초기지 역
할을 했다. 무려 400여년 동안 만주뿐만 아니라 한반도 영토문화에도 한족이 영향을 줬다고 주장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문화가 영토’라는 문화영토론의 기준이 되는 만주와 한반도의 영토문
화가 온전히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산물이 아니라는 논쟁의 여지가 될 수도 있다. 만주와 한반도
의 영토문화가 동일하다는 이유로 우리 한민족이 만주의 영토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희석될 수 있
다는 것이다. 반면에 한사군이 난하 유역과 요하 서쪽에 머물렀다면 만주는 물론 한반도의 영토문
화는 온전히 우리 한민족이 서로 동일한 문화를 형성한 것이 된다. 이것은 영토 분쟁지역의 영토문
화를 분석하여 동일한 문화를 누리는 민족이 문화주권자가 된다는 영토문화론과 문화주권자가 영
토권자가 된다는 문화영토론에 의해서 만주의 영토권은 자연스럽게 우리 한민족에게 귀속된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다.
본 연구는 고구려 건국연대를 올바르게 재설정함으로써 고구려의 초기 영역과 한사군의 위치를
바르게 비정하여 문화영토론에 의해서 만주의 영토권이 우리 한민족에게 귀속된다는 것을 규명하
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사군의 위치를 규명하는 방법은 당시 만주에 있던 우리 한민족의 나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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