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18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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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따라서 논리의 전개 순서는 먼저 기본 이론인 문화영토론과 함께 그 기준이 되는 영토문화론에
대해서 논한다. 그리고 고구려 건국연대가 기원전 37년이 아니라 그 이전으로 소급되어야 한다는
이론에 대해서 검토한 후 가장 타당한 이론에 의해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17년으로 재설정
한다. 재설정된 고구려 건국연대를 근거로 기원전 108년 당시의 고구려 영역을 밝힘으로써, 요하
서쪽에 머무를 수밖에 없던 한사군의 위치를 비정(比定)한다.
한사군이 요하 서쪽에 있었으므로 만주는 물론 한반도 영토문화의 문화주권자가 우리 한민족으
로, 문화주권자가 영토권자라는 문화영토론에 의해서 만주의 영토권이 우리 한민족에게 귀속됨
을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 주제어 】 만주의 영토권, 고구려 건국연대, 문화영토론, 한사군의 위치.
Ⅰ. 서론
그동안 많은 학자가 한사군의 위치가 한반도 안에 자리했는지 아니면 요하와 난하 유역에 머물
렀는지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개진했다. 하지만 아직도 결론을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방법
을 통해서 연구해도 결론은 서로 다르게 나오며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예를 들면 문헌을 근거로
한사군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있어서도, 복기대는 현재 난하는 고대의 패수였고 북위 시기에 이 패
수라는 이름이 없어졌는데, 6세기경 당시 북위의 지리학자였던 역도원이 고구려 평양이 패수의
북쪽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이 패수를 근거로 하여 낙랑군을 현재의 중국 요녕성 요양지역으로 이동
시켰다. 이때 낙랑군과 평양의 등치관계가 설정되었으며, 그 후 명나라 시기에 현재 한반도에 평양
이라는 지명이 보편화되면서 낙랑군도 이 지역으로 옮겨온 것이다. 고구려와 고려의 평양이 요양
에서 지금의 평양으로 전환되며 낙랑군 위치도 한반도설로 둔갑한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소중화
(小中華)라고 하며 사대사상에 취해있던 학자들이 한반도 안에 한사군을 가두는 역할을 했으며 일
2)
제 강점기에 고착되었다고 했다. 이에 반해서 이정빈은 대중역사서 저술가들이 인용한 문구에
1)
대한 번역 등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한사군이 난하 유역에 있었다는 것은 영토순수주의에 입각한
논리일 뿐이며 대동강 유역이 맞는다는 입장이다. 똑같이 문헌에 의해서 연구를 했음에도 불구
3)
하고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은 문헌을 선별하거나 해석하는 데 있어서의 차이다.
따라서 단순히 문헌에 의한 방법만으로는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것은 논쟁의 연속
일 뿐이라고 본다. 한사군이 요하 서쪽에 위치했다는 설이 맞는다고 보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한사
군이 왜 난하 유역과 요하 서쪽에 머물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득하는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면 더
1) 복기대, 「한사군은 어떻게 갈석에서 대동강까지 왔나?」 선도문화 25권, (2018), 229~298쪽.
2) 이정빈은 기존 학설과 동떨어진 주장을 편 역사서를 대중역사서라고 명명한 것으로 사료된다.
3) 이정빈, 「한사군, 과연 난하 유역에 있었을까?」 역사비평 115, (2016), 252~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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