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2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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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분과 1
라’, ‘아니라’혹은 ‘아니량’으로 쓴 것으로서 ‘아니량’이 후세에 와전되어 ‘아시라’가 되고, ‘아시
라’가 또 와전되어 ‘아라’가 되었다. 12)
신채호는 안라가라에 대해 이두문으로 써 후에 와전되어 아라가 되었다고 했다. 1931년 6월 10
일 ~ 10월 14일까지 103회에 걸쳐 조선일보에 조선사를 연재하였는데 후에 조선상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상고사에서 변한과 가야에 대한 내용 중, 함안을 ‘안라’라고 표기한 것은 이두문자
를 근거로 한 것이고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안라’를 차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Ⅳ. 해방 후 함안 지역의 지명 연구
1. 남한사학계
미스터 가야사로 알려진 김태식 13) 은 그의 논문 「530년대 安羅의 日本府經營」에 대하여 14) 」에서
는 안라를 함안으로 비정해 놓지 않았지만 가야연맹체의 하나라고 기술하였다. 그는 맺음말에서
‘임나일본부라는 것은 그 구성원이 왜인계통이었다고 해도, 왜가 가야지역을 통할하기 위해서 설
치한 기구가 아니고, 백제 또는 가야제국이 왜와의 교역 및 외교교섭을 위해서 설치한 기구였다.
또한 임나일본부의 운영은 그것이 위치한 안라의 왕이 실질적으로 담당하였으며, 그런 중에 그것
이 왜를 부추겨서 백제로부터의 외교적 압력을 어느 정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
나 훗날 백제와 왜의 교역관계가 정상화되면, 실질에 기반을 두지 않는 가야의 그 구실은 허상이
될 뿐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인정하며 안라의 왕이 임나일본부를 운
영하였다는 설을 주장하였다. 그 후 그는 「咸安 安羅國의 成長과 變遷 15) 」의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함안을 안라국으로 정해놓고 그 성장과 변천을 주장하였다.
이영식 16) 은 「安羅國과 倭國의 交流史 硏究 17) 」 머리말의 각주에서 안라국을 광개토대왕릉비와
일본서기가 기록한 후기가야의 국명으로서 의미가 있다며 安羅國으로 한자표기하고 그 발음은 아
라국으로 한다고 밝혔다. 이는 안라가 일본식으로 아라로 읽히기에 그 국명을 일본식으로 읽는 것
이 아닌지 자못 의문스럽다.
그 외 남재우, 백승충, 백승옥, 위가야 등은 그들의 논문에서 함안을 안라 또는 안라국으로 비정
해 논리를 전개해 나가고 이들의 논문을 인용한 많은 양의 논문이 양산되고 있다.
12)신채호, 『조선상고사』, 비봉출판사, 제4편 열국 쟁웅시대, 가라6국의 건설, 2006, 202쪽.
13) 前 홍익대 사범대 역사교육과 교수
14) 金泰植, 『蔚山史學』, 蔚山大學校 史學科, 1991, 1-30쪽.
15) 金泰植(Kim Tae-Sik), 韓國史硏究 제86호, 한국사연구회, 1994, 29-70쪽.
16) 前 인제대 인문사회과학대 역사고고학 교수
17) 이영식,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제74호, 2004. 06, 27-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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