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9 - 국제학술문화제-가야사/환단고기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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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와 남한 강단 가야사학계 김수지
벌 이야기가 나옴.=>야마토왕은 자기 신하중에 기비노가미츠미치노오미다사(吉備上道臣多佐)(吉
備上道臣田狹)를 임나국사로 파견.(여기서 임나는 가야이고, 기비씨 성을 가진 ‘다사’라는 사람을
임나(任那)에 국사(國司)로 파견. 국사란 지방국의 행정사업을 맡아보는 우두머리)=>기비노가미
츠미치노오미다사가 임나국사로 결정되기 전에 다사는 자기 아내 와카히메(稚媛)가 천하에 둘도
없는 미인이라고 자랑하고 다녔다. 그 말을 들은 야마토왕이 기비노가미츠미치노오미다사를 임나
국사로 파견한 후에 와카히메를 취했고, 국사로 파견되었던 다사는 신라로 들어가려고 했다. 신라
는 야마토 말을 듣지 않는 거의 적대적인 관계였다. 그 말을 들은 야마토왕은 기비노아마베아카오
(吉備海部赤尾) 등에게 신라를 공격하라고 함. =>위의 기사들의 내용은 기비지방에 문제가 생기자
야마토왕이 기비지방의 기비씨족들을 죽인후, 일을 수습하기위해 기비지방을 잘 아는 기비출신
사람을 국사로 파견해서 기비지방의 혼란한 상황 등을 안정 수습시키려고 했다는 것을 알수 있음
=>기비지방에 ‘임나’가 있었기 때문에 임나국사로 기비씨를 임명했다고 봐야함.=>기비지방은 오
늘날 오카야마현이다. 그런데 웅략기에 실린 기사 내용의 일들은 5세기 사건들인데, 5세기 당시에
는 ‘기비’라는 지방명이 없었고, 기비라는 지명은 8세기 일본서기 편찬 당시 지명이다. 기비지역에
‘임나’가 있었고, 그 지역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그 지역출신 기비씨족 사람을 파견했다고 보는
것이 상식에 부합한다. =>그리고 기비유게베노오오조라(吉備弓削部虛空), 기비노가미츠미치노오
미다사(吉備上道臣多佐), 기비노아마베아카오(吉備海部赤尾) 각 인물의 이름에 나오는 ‘유게(弓
削)’, ‘가미츠미치(上道)’, ‘아카오(赤尾)’는 아직도 기비지방 오카야마현에 지명으로 남아있다.
② 「계체기」에 나타난 인명 ‘기비노가미츠미치노오미다사’와 지명 ‘대사(帶沙)’
계체기 23년 (530년) 3월조 부터 24년 9월조까지에는 임나(가야)의 소국인 가라(아라)와 신라,
백제 그리고 야마토의 군사들 사이에서 벌어진 복잡한 전쟁과정이 기록되어있다.=>이 과정에서
가라국의 다사(帶沙)강과 다사쯔(다사나루)라는 지명이 등장 =>임나국사로 파견된 인물인 ‘기비
노가미츠미치노오미다사(吉備上道臣多佐)’는 ‘기비(吉備)’지방의 ‘가미츠미치(上道)=윗쪽나루’
지방의 신하(臣)인 ‘다사(多佐)’ 사람.=>기비노가미츠미치노오미다사(吉備上道臣多佐)의 ‘多佐’가
웅략기에는 ‘田狹’으로 되어있고, 『국조본기』 와 『가야아손씨세계도초』에는 ‘多佐’로 되어있
다.=>‘다사’란 개별 개인의이름이지만 ‘죠도고을(가미츠미치)’에 있는 지명에서 유례된 것이
다.=>『국조본기』에의하면 ‘가미츠미치노구니노미야츠코(국조) 나가히코노미코토’의 아들 ‘다사
노오미(多佐臣)’를 비로소 ‘구니노미야츠코(국조)’로 봉하였다 라는 기록이 있음. 즉, ‘기비노오미
다사’는 ‘기비’ 지방 ‘죠도(가미츠미치)’의 ‘다사’라는 곳의 토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다
사’는 ‘기비’의 ‘가미츠미치(죠도)’의 ‘다사’ 지역의 ‘다사’ 이다.=>‘다사’에는 ‘다사강’이 있었고,
이것은 ‘대사(帶沙)’ ‘대사강’과 같은 것.=>현재 오카야마현인기비지방, 가미츠미치(죠도) 지역을
흐르는 강은 아사히강과 요시이강이 있는데, 그 사이를 흐르는 ‘스나강’이 ‘다사강=대사강’이
다.=>‘스나가와(砂川)’는 본래 ‘다(多)’ 또는 ‘대(帶)’와 ‘사(沙)’자를 써서 ‘다사강(대사강)’ 이라고
부른, 계체기에 나오는 다사강이었다. 이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첫 글자 ‘다’ 또는 ‘대’가 떨어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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