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관의 정통맥을 잊고자 노력하는 '대한 사랑(史郞)'이 해외동포언론사를 대상으로 2024년도 특별 역사탐방은 민족의 애환과 한일 간 부침의 역사현장 대마도였다.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외국 땅이 쓰시마섬(對馬島)이다.
옛날에 우리가 '두 섬'이라 불렀는데 그것이 '쓰(두)시마(섬)'의 어원이 됐다. 대(對)는 대답(마주)할 대, 섬(島)의미로 대만해협을 두고 서로 마주하고 있는 섬이다.
지리적으로도 부산에서 49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일본본토에서 가장 가까운 후쿠오카에서는 137km다.
이에 대마도 북서쪽에 있는해안가 마을이나 해안도로에서는 날씨가 맑은 날에는 어렵지 않게 부산항을 바라볼 수 있기에 섬 사람들 입장에서는 육지(대륙)를 동경하고, 육지 사람들 입장에서는 바다(해양)로 멀리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밖에 없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대마도에 얽힌 과거사 관련 일반인들, 특히 우리 MZ시대들을 비롯한 청소년들은 단순히 부산 앞바다에 있는 일본 섬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는 정도다.
코로나19 이전 거의 년간 30만명에 달했던 대마도를 찾는 한국 관광객의 대부분은 가성비가 좋고 가깝기 때문에 찾았다고 현지 여행가이드는 설명하고 있다.
대마도에는 한일교류의 흔적이 많이 있다. 특히 왕인 박사가 머무르다 갔다는 마을은 왕인 박사의 이름을 빌려 지었고, 마을에 현장비를 세워놓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실제로 대부분의 한국민들은 왕인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가지고 일본가는 길에 대마도를 들렸다거나 원나라때 쓰시마섬 정벌이 있었다는 정도, 해적의 근거지가 되었고 한일간 교역 거점을 맡았던 지역이었다는 역사지식을 갖고 있는 정도다.
이러다 보니 대마도의 한일관계사를 잘 모르면서 삼국시대에 일본에 이미 복속되었다거나, 고려 또는 임진왜란 때 일본에 완전 귀속되었다는 등 정확히 대마도 역사를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대마도가 섬 면적(약 700㎢)도 그리 크지 않고 산지가 대부분으로 경지 면적이 작아 인구가 적은 탓에 지역적 특색이 옅고 그렇다고 석유나 가스같은 자원이 펑펑 나오는 것도 아니니 일본 내에서의 존재감도 별로 없는 촌동네여서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위치는커녕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고, 그나마 가까운 규슈나 야마구치 사람 정도만 섬 이름 정도만 아는 수준이다.
그러나 우리의 대일본 역사와 교류사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문화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은 물론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사실이다.
청동기 와 도자기(항아리)문화의 전수는 설명되는 고대 한(韓)역사문화의 전파경로로서 고조선 역사의 종적, 백제와 신라와의 교류 역사, 고려말 박위와 세종 1년(1419년)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은 애증의 한ㆍ대마도 관계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대마도가 우리 국토임을 증명하고 있는 조선시대 숙종(1682년) 지리지 '동여비고(東與備考)'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은 머리, 대관령은 척추이며, 전라도의 탐라 와 경상도의 대마(對馬)는 우리 영토의 양발로 간주되고 있다"
역사는 가정이 없다. 어제의 역사를 반추하여 오늘을 인식하고 내일을 설계해야 한다.
이게 바로 우리 해외동포언론사협회에게 사)大韓史郞이 우리에게 대마도 역사탐방 체험교육을 안배 해 준 이유라고 여겨진다.
각자 거주하는 국가에 돌아가서 민족사관의 국통맥을 잊는 선도적인 첨병 역할과 함께 민족사관 홍보의 플랫폼을 기대하고 있다.
이창우 기자 cwlee@nvp.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