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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이 된장되는 강단유사사학 (7.낙랑군 점령국의 변동)
1. 강단유사사학이 주장하는 낙랑군 이동의 소설성
미천왕이 313년 낙랑군을 314년 대방군을 점령하여 고구려의 영토로 하였고 낙랑군은 어딘가로 이동되었다고 주장하며, 근거로 삼국사기와 자치통감의 다음 기사를 제시한다.
(1) 『삼국사기』 「髙句麗本紀」
美川王 十四年, 冬十月, 侵樂悢郡, 虜獲男女二千餘口. 美川王 十五年秋九月 南侵帶方郡.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대방군을 침공했다
기사에 고구려가 점령했다고 쓰여 있지는 않다. 전혀 근거가 되지 않는다.
(2) 『자치통감』 권88 진기10 효민황제(孝愍皇帝) 상 건흥(建興) 원년 夏,四月 --- 王浚使棗嵩督諸軍屯易水,召段疾陸眷,欲與之共擊石勒。疾陸眷不至,浚怒,以重幣賂拓跋猗盧,並檄慕容廆等共討疾陸眷。猗盧遣右賢王六修將兵會之,為疾陸眷所敗。廆遣慕容翰攻段氏,取徒河、新城,至陽樂,聞六修敗而還,翰因留鎮徒河,壁青山。初 --- 遼東張統據樂浪ㆍ帶方二郡,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遵參軍事.
왕준은 조숭을 보내 군사들을 독려하면서 역수에 주둔하게 한 후 단질육권을 불러 그와 같이 석륵을 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질육권이 오지 않자 왕준은 화가 나서 거액으로 탁발의로를 매수하는 한편 모용외 등에게 격문을 보내 질육권을 함께 토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탁발의로는 우현왕 육수를 파견하여 병력을 거느리고 그와 회동하게 했으나 질육권에게 패하였다. 모용외는 모용한을 파견하여 단씨를 공격하고 도하, 신성을 얻고 양락에 이르렀으나 육수가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환하고 모용한은 그 일로 남아 도하의 벽청산에 주둔하였다. 당초, -- 요동인 장통은 낙랑, 대방 두 군에 근거지를 삼고 있었는데, 고구려의 왕 을불리와 서로 공격하면서 해가 바뀌어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낙랑인 왕준의 설득으로 (장통이) 그 백성 1,000여가를 이끌고 모용외에게 귀순하니 모용외가 그를 위하여 낙랑군을 설치해주고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에게는 군사관련 참모를 맡게 하였다.
ㅇ 初 이하의 문장은 이 사건에서 등장하는 왕준과 모용외와 관련된 인물들을 설명하는 문단으로 313년 이전에 일어났던 일. 편년체 역사서의 경우 初(당초)에 이어지는 문장은 편년기사의 배경이나 원인, 이미 발생한 관련된 사실을 편년기사에 부기하여, 편년기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관련사실을 통합하여 기술함으로써, 편년체 역사서의 단점을 보완하려는 것 (똥 처먹느라 역사서 기초 해석도 못하고 313년이라 주장)
ㅇ 이 기사 자체가 낙랑군 평양설을 부정하고 있다. ‘요동의 장통’이라 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동에 있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동설은 위 『자치통감』의 기사를 ‘요동 출신의 장통’이라 날조하여 해석]
ㅇ 지금의 평양에서 장통이 1천여 가를 이끌고 고구려를 지나 강단유사사학이 주장하는 어딘가로 가는 것은 불가능 당시 사람은 국가의 중요자원으로 전쟁에서 승리하면 사람을 끌고 오는 것이 주요 전과, 고구려가 놔두지 않음
2. 『진서(晉書)』 「지리지」는 낙랑군을 漢에서 설치한 이후 위치 변화 없다고 함
『진서』 「지리지」 平州。案禹貢冀州之域,於周為幽州界,漢屬右北平郡。後漢末,公孫度自號平州牧。及其子康、康子文懿並擅據遼東,東夷九種皆服事焉。魏置東夷校尉,居襄平,而分遼東、昌黎、玄菟、帶方、樂浪五郡為平州,後還合為幽州。及文懿滅後,有護東夷校尉,居襄平。咸寧二年十月,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置平州。統縣二十六,戶一萬八千一百。
생각컨대 우공(禹貢)에서 기록하기를 평주는 기주(冀州)의 영역인데, 주국(周)에서 유주(幽州)의 경계로 했으며, 한국(漢)때에는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했고, 후한(後漢) 말엽에는 공손도(公孫度)가 스스로 평주목(平州牧)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에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과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文懿)이 요동을 병합하고 그곳에 의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국(魏)에서는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설치하여 양평(襄平)에 거하였고, (이를) 나누어 요동(遼東) 창려(昌黎)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등 5개의 군을 평주(平州)로 하였고 후에 유주(幽州)와 합하였다. 이에 공손연(文懿)이 망한 후에 호동이교위(䕶東夷校尉)로 하여 양평(襄平)에 거하였다. 함녕(咸寧) 2년(276년) 10월에 나누어 창려(昌黎) 요동(遼東)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등의 군국(郡國) 5으로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현은 26이고 가구수는 1,8100이다.
『진서』 「지리지」 樂浪郡 漢置。統縣六,戶三千七百。
漢에서 설치하였다. 여섯 현이 속해 있다. 호는 3,700이다.
3. 낙랑군 점령자가 모용외라는 사료
『晉書』 「載記 慕容廆」 裴嶷 至自建鄴 帝遣使者拜廆監平州諸軍事、安北將軍、平州刺史
배억이 건업으로부터 돌아올 때(320년) 황제가 사자를 보내 모용외에게 감평주제군사 안북장군 평주자사의 벼슬을 주었다.
『晉書』 「帝紀」 中宗元帝 司馬睿/太興四年十二月, 以慕容廆為持節、都督幽平二州東夷諸軍事、平州牧,封遼東郡公。
321년 모용외에게 지절 도독유평이주동이제군사 평주목으로 하고 요동공에 봉하였다.
『진서(晉書)』에 의하면 낙랑군이 평주이므로 낙랑군 점령자는 모용외
4. 낙랑군 점령국의 변동
ㅇ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서진의 유주 평주는 모용외가 점령하여 전연이 되었고, 낙랑군 대방군은 고구려가 차지하지 못함
ㅇ 372년 동진은 근초고왕을 진동장군으로 삼고 낙랑태수를 거느리도록 하여 백제가 낙랑군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모용씨의 전연이 망하자 백제가 낙랑군을 영토로 하였음을 의미한다.
『晉書』 「帝紀」 咸安二年 六月,遣使拜百濟王餘句為鎮東將軍,領樂浪太守
ㅇ 다시 후연이 건국하여 낙랑군 차지
384년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하였다. 고구려가 385년 6월 요동과 현도를 점령하였는데, 『삼국사』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二年, 夏六月, 王出兵四萬, 襲遼東. 先是, 燕王垂命帶方王佐, 鎮龍城. 佐聞我軍襲遼東, 遣司馬郝景, 將兵救之. 我軍擊敗之, 遂䧟遼東·玄菟, 虜男女一萬口而還.
당시 대방왕은 모용좌였으므로 후연이 건국하면서 백제는 낙랑 지역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도 385년 11월 요동과 현도를 후연에게 빼앗긴다. 『삼국사』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二年 冬十一月, 燕慕容農将兵来侵, 復遼東·玄菟二郡.
ㅇ 407년 고구려는 후연을 멸하고 북연을 세우면서 진번조선의 고토를 회복하고 요동고새 남쪽 영토도 새로 획득하였다. 덕흥리고분 벽에 유주자사 소속의 13개 군 태수들이 유주자사인 진(鎭)을 알현하는 내조도(來朝圖)가 그려져 있고 13군의 이름이 쓰여있다. 연군·범양·어양·상곡·광녕·대군·북평·요서·창려·요동·현도·낙랑의 12군은 명확하며, 나머지 하나는 대방으로 추정된다. 즉 서진의 유주와 평주를 고구려가 차지하였다.
안악3호분 동수 낙랑 대방 태수 역임
판독문: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卄六日癸丑,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 都鄕侯, 幽州 遼東 平郭 都鄕 敬上里, 冬壽, 字□安, 年六十九薨官.
해석: 永和 13년 10월 무자삭월 26일 계축일에, 使持節 都督諸軍事 平東將軍 護撫夷校尉이자, 樂浪, 韓, 昌黎, 玄菟, 帶方太守이자 都鄕侯이며, 幽州 遼東郡 平郭縣 都鄕 敬上里 출신인 冬壽는 字가 □安으로, 나이 69세에 관직 수행 중 사망하였다.
평양역 구내 무덤 묘주 요동 한 현토 태수 역임
위는 장수왕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로 인정하여 고구려 지배 인정
『魏書』 「高句麗傳」, 世祖時, 釗曾孫璉始遣使者安東奉表貢方物, 并請國諱. 世祖嘉其誠款, 詔下帝系名諱於其國, 遣員外散騎侍郎李敖拜璉為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郎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ㅇ 동성왕이 장수왕 말년 480년대 초 고구려 유주를 점령 낙랑군은 백제의 것으로 됨.
남제서에 백제가 낙랑태수 대방태수 임명한 사실이 기록됨
『남제서』 「동이전」 牟大又表曰:「臣所遣行建威將軍、廣陽太守、兼長史臣高達,行建威將軍、朝鮮太守、兼司馬臣楊茂,行宣威將軍、兼參軍臣會邁等三人,志行清亮,忠款夙著。往泰始中,比使宋朝,今任臣使,冒涉波險,尋其至効,宜在進爵,謹依先例,各假行職。且玄澤靈休,萬里所企,況親趾天庭,乃不蒙賴。伏願天監特愍除正。達邊効夙著,勤勞公務,今假行龍驤將軍、帶方太守。茂志行清壹,公務不廢,今假行建威將軍、廣陵太守。(萬)〔邁〕執志周密,屢致勤効,今假行廣武將軍、清河太守。」詔可,竝賜軍號,除太守。--- 又表曰:「臣所遣行龍驤將軍、樂浪太守兼長史臣慕遺,行建武將軍、城陽太守兼司馬臣王茂,兼參軍、行振武將軍、朝鮮太守臣張塞,行揚武將軍陳明,在官忘私,唯公是務,見危授命,蹈難弗顧。今任臣使,冒涉波險,盡其至誠。實宜進爵,各假行署。伏願聖朝特賜除正。」詔可,竝賜軍號
ㅇ 494년 다시 고구려 영토가 됨
남제가 494년 7월 문자명왕을 도독영평이주로 책립하므로 『삼국사』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3년 7월 齊帝䇿王爲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
이 때에 유주를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예부여가 494년 2월 고구려에 귀부하는데, 『삼국사』 「고구려본기」 문자명왕 3년 二月, 扶餘王及妻孥, 以國來降.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 와중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으로 보이므로, 이 무렵 고구려 백제간 전쟁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ㅇ 고구려 멸망까지 낙랑군 등 서진의 유주 평주는 고구려의 영토.
1963년 경남 의령군에서 발굴된 연가7년명(539년) 금동여래입상 광배(光背)의 명문
延嘉七年歲在己未 高麗國樂良
東寺 主敬弟子僧演師徒卌人共
造賢劫千佛流布 第廿十
佛 比丘法穎所供養
연가 7년 기미년 고려국(고구려) 낙량(樂良)의
동사(東寺) 주지스님 경(敬)과 그 제자 승려 연(演)을 비롯한 사도 40인이 함께
현겁천불(賢劫千佛)을 조성하여 유포하기로 하였는데
제29불 인현의불(因現義佛)은 비구 법영(法穎)이 공양하는 바이다.
수나라 군대의 침략경로. 고구려 국경 부근의 지명임.
수군은 612년 1월 출발하면서 좌 12군은 누방 장잠 명해 개마 건안 남소 요동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의 길로 나가고, 우 12군은 점제 함자 혼미 임둔 후성 제해 답돈 숙신 갈석 동이 대방 양평의 길로 나가기로 하였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嬰陽王, 23년 左十二軍, 出鏤方·長岑·溟海·蓋馬·建安·南蘇·遼東·玄莬·扶餘·朝鮮·沃沮·樂浪等道 右十二軍, 出黏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踏頓·肅愼·碣石·東????·蔕方·襄平等道, 絡驛引途, 揔集平壤.
우문술은 부여도로, 우중문은 낙랑도로, 형원항은 요동도로, 설세웅은 옥저도로, 신세웅은 현도도로, 장근은 양평도로, 조효재는 갈석도로, 최홍승은 수성도로, 위문승은 증지도로 나와서 모두 9개군 30만이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三國史』 「髙句麗本紀」 嬰陽王 二十三年夏六月
左翊衛大將軍宇文述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出樂浪道, 左驍衛大將軍荊元恒出遼東道, 右翊衛大將軍薛世雄出沃沮道, 右屯衛將軍辛世雄出玄莬道, 右禦衛將軍張瑾出襄平道, 右武候將軍趙孝才出碣石道, 涿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出遂城道, 檢校右禦衛虎賁郎將衛文昇出増地道, 皆㑹於鴨渌水西.
양광(수양제)의 조서
양광은 “고구려의 작은 무리들이 혼미하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들면서 요(遼) 예(濊)의 경계를 자주 잠식하였다.”라고 『삼국사』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髙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勃·碣之間, 荐食遼·濊之境.
하므로, 갈석산이 낭아산이고, 요수가 당하이고, 예가 황하 어귀 해안가에 거주하는 것으로 보는 본고의 위치비정과 양광의 언급은 일치한다.
5.
낙랑군은 이동한 적이 없다.
낙랑군은 보정시 부근 중역수 남쪽이다.
고구려, 백제, 중국 왕조의 다툼은 대부분 이 지역에서 있었다.
낙랑군을 한반도로 끌어들인 것은 사대주의자와 조선총독부의 소설에 불과하다. 낙랑군이 한반도가 되면 우리의 역사강역이 축소되고, 그 땅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우리 선조들의 이야기도 사라진다.
신뢰성 있는 사료를 통해 역사연구를 하면 쉽게 밝혀지는 사실임에도, 수많은 사료를 못 본척하면서 조상을 부인하고, 일제 똥처먹는 강단유사사학자들은 하수구에 빠트려 하수정화비용을 절감하는데 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활용방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