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
한국인들! 환단고기를 다시 손에 들기 시작하다 韓民族 정체성의 根幹 ‘桓檀古記’ 열공(2부)
● 배달민족 기원 ‘백두산 아래 神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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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한국인들은 스스로를 배달의 민족이라 칭한다. 하지만 배달의 어원은 잘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에 따르면 인류최초의 연합 국가인 ‘환국’의 환인으로부터 천부(天符)와 인(印) 세 개를 받은 환웅이 엘리트 집단인 문명개척단 3천명을 동방으로 이끌고 이동하여 태백산(백두산) 아래 신시(神市, 배달)을 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신시를 ‘배달’이라고 칭하며 그로부터 우리민족을 ‘배달민족’이라고 스스로 부르고 있다. 배달이란 ‘밝은 땅’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달’국이 역사에서 살아지게 된 것이 대일항쟁기를 거치면서이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인들 주체적 역사관을 무너뜨리고 일본이 만든 식민사관을 틀로 만든 조선 국사 교육을 1920부터 강력하게 시행한다. 그들이 만든 조선역사에는 환국, 배달. 조선, 단군은 제거되고 기자, 위만, 한사군 등의 중국 식민지로부터 한국사가 시작된 것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2020년 한국사의 현실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다. 일제는 조선총독부에서 계속적인 식민사학 교육을 진행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이 계속 한국사 책을 출간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자 아예 법을 통해 ‘삼일’,‘환웅(桓王)’,‘배달’,‘무궁화’,‘사천년 역사’, ‘만주 고토’ 라는 금기어를 설정하여 관련 내용이 있는 서적은 압수와 삭제를 감행하였다.(1928년 경성지방법원 문서)
조선총독부가 법적으로 ‘환웅, 배달’을 금지 시켰기에 조선인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배달’이란 말의 기원을 잃어버리고 지금은 음식 배달하는 ‘배달의 민족’ 정도로 인식하는 국민들이 많다. 우리 민족을 ‘배달민족’으로 노래하였고 광개토태왕이 군사들과 함께 불렀다는 노래가 대일항쟁기까지 전해져 내려왔었다.
1909년 신한국보, 1921년 독립신문, 1921년, 1925년 개벽지에 실려 있다. 단군조선의 두 번째 단군이었던 부루단군이 지어 조선 국민들에게 부르게 했다는 ‘어어가’(於阿歌)를 ‘신가’로 소개하고 있다. 이 어아가(於阿歌)는 독립투사들이 즐겨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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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국은 18분의 환웅천황이 다스렸다고 삼성기와 신시본기는 전하고 있다. 한국과 중국에 널리 알려진 배달국의 대표적인 인물이 태극기 8괘를 처음 그었으며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는 “하도(河圖)‘를 天垂象(천수상)한 인문의 시조 태호복희씨와 농업과 약학의 시조인 신농씨(강씨 시조), 그리고 동양 역사에서 武神(무신)으로 받들어진 도철문(도깨비문양)의 주인공 치우천황이다.
특히 치우천황은 배달국의 14번째 환웅으로 ’청구‘지역으로 배달국 도읍지를 옮겼다. 소전씨의 별파인 공손씨의 후손으로 동이족이지만 지나족의 대표가 되어 치우천황에게 대항했던 황제헌원과 탁록에서의 전쟁사는 동양 전쟁사의 백미로 이야기 된다.
이 전쟁에서 결국 헌원은 치우천황의 신하로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배달국의 국사(國師) 자부(紫府)선인으로부터 인간의 진정한 자아(自我)를 체득하는 수행법을 전수 받아 한(漢)족 문화권에 심어 주는데 그것이 바로 현재 신선사상의 원류인 仙道(선도)라고 일컬어지는 도교(道敎)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는 결국 붓 아래 좌우되는 것으로 사마천은 동방 원정(북부여 침공)이 강력한 고두막한(북부여의 5대 단군, 박혁거세 외할아버지)의 저지에 의해 실패 되었기에 붓대를 돌려 버렸다.
즉, 그 실패를 사기(史記) 역사 속에 기록하지 않고 오히려 고대 동이족의 천자였던 치우천황과 한족의 시조로 대표되는 황제헌원과의 전쟁에서 헌원이 치우를 죽였다고 붓대를 놀려 버렸다. 치우천황의 신하인 ‘치우비’를 ‘치우’로 기록한 의도적 망필(妄筆) 인 것이었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숨길 수 없는 법. 강태공이 제나라 8신제를 올리면서 치우천황을 병주(兵主)로서 모셨고 진시황과 한고조 유방이 대전쟁에 앞서 치우 군신에게 제사를 모시고 출전했는데 반드시 하늘에서 표시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순신장군도 치우천황에게 제사를 모시고 전쟁을 수행하였다. 사마천의 사기가 진실이라면 패장인 ‘치우’가 군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헌원’이 대상이 되었을 것은 자명한 것이다. 치우천황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는 묘족 자치구에는 그 전쟁 실상을 바위에 새겨놓았는데 내용은 치우천황이 황제헌원을 무릎 꿇렸다는 내용이다.
● 배달국 승계 ‘신인 단군왕검’
그러한 배달국도 1565년간의 세월 속에 말기에는 기후의 변동으로 해체기를 맞으며 전쟁의 연기가 자욱하게 된다. 그 때 혼란기의 아홉 동이족인 구이(九夷)를 통일하고 조선의 새 역사를 여신 분이 ‘단군왕검’이다. 당시 중원지역에서는 방훈인 요임금이 형제인 ‘지’를 죽이고 왕이 된지 25년이 되는 해이다. 성덕의 표상이 요임금이 형제를 죽였다는 것에 놀라는 분이 계실지 모르나 사실의 역사다.
초대 단군은 조선의 영역을 세 개로 나뉘어 다스렸는데, 삼한의 기원이 되는 진한은 단군이 직접 다스리고 번한과 마한은 부단군을 두어 다스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준왕(기준)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 아니라 번한(번조선)을 다스린 마지막 부단군 왕인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한국사에서 단군을 제거하고 기자, 위만, 한사군의 역사가 한국사의 시작으로 만들어 준왕을 고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만든 것이다. 단군조선의 마지막 단군은 ‘고열가 단군’으로 절에 있는 산신각의 원주인이다.
단군은 47분(世), 2096년간 존속된다. 단군 47세 기록은 단군세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전고대방, 조선세가호보, 대일항쟁기 김해김씨문헌보, 조선시대 개인 문헌 등에 여러 기록에 등장하고 있다.
그렇기에 단군이 47세였다는 것을 ‘유사사학, 환빠, 국뽕’ 타령 하면서 단군조선사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왜놈보다 나쁜 왜놈의 작태인 것이다. 독립운동가 이시영선생의 ‘감시만어’를 살펴보면 단군의 아들이 네 분이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고 있건만 조선총독부 추종자들은 오늘도 단군은 신화, 없는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그들의 사악한 독사 독무를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뿌려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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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강효석이 엮은 전고대방 초판본에는 단군이 47전세 되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 출판물에서도 결국은 판본을 바꾸어 “단군 47전세” 기록은 삭제된다. 단군조선이 세 개의 나라로 나뉘어 통치된 것을 삼한관경(三韓管境)이라고 칭하는데 이러한 기록은 고려사와 김종직의 시집, 조선총독부가 엮은 고대 시집 ‘청구시초’에도 소개되어 있다.
이 역사관을 재조명한 학자가 신채호선생이며 이 삼한관경을 통해 세계일가를 구상했던 분이 조소앙 선생이다. 조소앙 선생은 삼한관경제를 삼균제도로 이화하여 개인, 민족, 국가 간의 균등을 통한 홍익인간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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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도 삼한관경의 체제 속에 2096년간의 역사를 이어간다. 서울대 철학교수에게 천부경을 문의한 하이데거도, 조선에 들어와 고종의 옆에서 조선의 국익을 위해 노력했던 헐버트 선교사도 단군을 언급하며 2천년 역사를 실현한 것에 대해 강한 존경심을 나타내었다.
단군조선의 말기에 들어서면서 삼한관경체제가 흔들리고 44세 구물단군이 국호를 ‘대부여’ 칭하면서 47세 고열가 단군으로 이어지면서 단군조선은 역사 속에 사라진다.
1세 단군부터 44세 단군이 대부여로 국호를 바꾸기 전까지가 1908년인데 이것이 바로 여러 역사서에 언급된 단군의 수명 ‘1908’의 진실이다. 대부여 체제가 188년간으로 총 2096년의 역사를 단군조선은 영위했다.
● 단군조선을 이어 ‘해모수가 북부여 건국’
삼한관경 무너지며 강력했던 동방주역 국가가 흔들리는 것을 본 해모수는 웅심산을 기점으로 새 나라 건국을 선포한다. 6년간의 공백기에 들어선 단군조선의 중심지 진한(진조선, 대부여)의 영역을 인계 받아 ‘북부여’ 건국을 선언하며 번조선과 막조선(한반도)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해모수는 자신의 ‘천제지자’라 선언하며 천자임을 선포한다. 삼국사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부여사는 전체적인 맥락 연결이 혼동을 일으켜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너무 어렵다. 특히 해모수와 고주몽의 관계에 대해서는 천륜을 파괴하는 역사해석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알고 있는 해모수와 고주몽은 부자관계가 아니다. 삼국사와 삼국유사를 잘 분석해 보면 이 정도는 간파된다. 해모수는 부루와 연결고리가 기록되어 있는데, 갑자기 그 가운데 유화부인이 등장하고 고주몽이 등장한다.
이러한 상황은 광개토태왕비의 비문 해석의 그릇됨으로부터 시작된다. 첫 구절 고주몽은 북부여 출신(혈맥)이었다는 구절에 이어 ‘천제지자’의 문구에서 ‘천제’를 해모수로 번역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해모수 자신이 ‘천제지자’라고 자칭했는데 ‘천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문구에서는 ‘천제를 황천’으로 기록했기에 여기서 천제는 본래 천신 즉 하느님(황천)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뒤 구절에 어머니 유화부인의 언급이 기록되어 있기에 거의가 다 천제를 해모수로 번역하고 이어서 유화부인을 부부로 해석하는 블랙 코디미를 만들어내는 촌극을 벌이게 되었다.
북부여기를 보면 해모수의 4대 손자가 고주몽으로 기록 되어 있기에 유화부인은 해모수의 부인이 아니라 증손자며느리인 것이다. 그런데 부부라고 번역해서 드라마까지 만들었으니...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는 4대 고우루 단군 때 한무제의 우거점령(위만정권)에 이은 북부여 침입으로 국가적 위기를 겪는데 이 때 고두막한이라는 구국의 영웅이 나타나 한(漢)의 침략을 막는다.
이후 고두막한은 고우루 단군에게 북부여지역을 이양할 것을 요구함에 심적 충격으로 고우루 단군이 돌아가시고 그 동생 해부루가 가섭원 지역으로 이동하여 북부여에서 분리된 또 다른 계보를 이어가는데 그것이 동부여이다.
해부루-금와-대소가 나오는 역사가 바로 이주한 동부여 역사이다. 이 부분이 삼국사와 삼국유사 속의 흐트러진 실타래 같은 부여사의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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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의 5대 단군이 된 고두막한. 그 딸이 파소이며 박혁거세의 어머니이다. 이것이 밀양 박씨 탄생과 신라건국의 비밀역사이다. 6대 북부여의 단군인 된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 단군은 황권을 전할 자식이 없고 딸 둘이 있었는데, 동부여에서 탈출해 본 고주몽과 딸 소서노를 결혼시켜 사위로 받아들여 그 계보를 다시 북부여 건국자 해모수의 혈족에 돌려준다.
북부여의 7번째 단군이 된 고주몽은 북부여 건국자 해모수를 시조를 받들어 다시 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해 국호를 ‘고구려“로 바꾼다. 광개토태왕비의 17세손은 고구려 역사가 바로 북부여 해모수로부터 시작됨을 표기한 것이며 신당서 동이열전에 기록된 ’고구려 900년 역사‘가 이것이다.
북부여에서 다시 동부여로 이어진 부여는 결국 대소왕 때 고구려에 의해 멸망당하지만 계속적인 부여사가 대륙에서 이어진다. 그리고 고구려의 황권은 소서노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아닌 고주몽의 첫 아들 유리에게 전해지면서 소서노와 두 아들은 백제건국의 역사를 만들어 내며 자신들의 성을 북부여를 건국 시조로 하여 ‘부여’씨 칭한다. 후에 백제의 성왕이 백제를 ‘부여’라고 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사에 기록된 부여사를 정리하면 위의 도표 한 장으로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다. 한국사의 잃어버린 링크라고 이야기 되었던 부여사가 완벽히 정리된 것이다. 이것을 인정하기 싫은 한국의 일부 주류사학자들은 자신들 전공분야도 아니면서 오늘도 부여사에 대해 소설을 쓰고 있다.
그 다음으로 환단고기에서 속 시원하게 전하고 있는 역사가 바로 대진국(발해)의 역사이다. 대진국의 연구가 부족한 한국사학의 현실 속에서 하나의 서광이 된 사서가 ‘대진국본기(大震國本紀)’이다.
최근 중국에서 발굴된 발해 유적에서 등장하는 연호와 역사적 사실이 대진국본기와 하나로 부합하며 그 시대를 정확히 밝혀주고 있다. 하지만 국내 식민사학자들은 고고학적 발굴로 환단고기 기록의 진실성이 밝혀지니 이내 그들이 위서라고 운운하던 주장을 목구멍 속으로 감추고 후학들을 등 떠밀며 자신들의 그릇된 주장을 계속 외치게 하고 있다.
그리고 남북국의 대진국시대를 거쳐 고려가 건국되는 역사적 사실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이다.
● 드디어 1911년! ‘광명찾은 환단고기’
삼성기 상, 삼성기 하,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가 1911년 독립운동가 계연수 선생에 의해 합본되어 오동진, 홍범도 장군의 지원으로 이 세상에 드러나기 까지 천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인류와 한국사의 원형 틀을 볼 수 있는 이 사서를 하늘광명 환(桓), 땅 광명 단(檀)이라 정명하여 “환단고기”라 하였다. 독립운동가 조소앙 선생은 대한민국을 줄여 ‘한국’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광명의 나라 ‘환국(桓國)’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광명의 이상향이 실현되는 나라의 의미로 한국(韓國)이라고 한다고 이야기 하였다. 실로 “하늘-桓, 땅-檀, 나라-韓”의 천지인의 삼재의 본 정신을 규명한 정의이다.
하늘과 땅의 광명을 세상에 실현하기 위해 삼신(三神) 정신을 그대로 역사 통치로 실현한 단군의 삼한관경에서 “韓민족”이란 말이 나왔다. 한국사의 마지막 皇朝史(황조사)의 고종황제는 단군의 삼한관경을 실현하는 의미로 국호를 ‘大韓제국’이라 칭하였다.
● ‘한국사 원형’ 한민족의 정신사!
인류의 시원정신문화는 어떤 것이었을까? 한민족의 정신사의 고갱이 사상은 무엇일까? 한국의 고유한 철학은 무엇이 있는가? 이것을 알고자 한다면 환단고기의 골수인 태백일사의 삼신오제본기, 소도경전본훈을 반드시 탐독해야 한다.
그러면 전 세계에 남겨진 역사유적에 담겨진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눈이 열린다. 동서 사상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지혜의 눈이 열린다. 하지만 환단고기 위서론자들이 이 부분을 읽어볼 리 없다. 천박한 역사의식 속에 동서지혜의 보물이 담겨질 리 있겠는가? 그러니 위서론을 운운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 동서정신문화를 하나로 관통하여 인간론의 극치인 태일 (太一)의 경계를 열기위한 심법과 행법을 전한 내용이 바로 행촌 이암의 ‘단군세기 서문’의 명문장이다. 이 서문을 읽어 내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지식의 양이 아닌 자신이 직접 자신의 性命精(성명정) 삼진(三眞)을 구현해 보기 위해 노력해 보았든지 실현해 본 분만이 이 구절을 체득할 수 있다. 그렇기에 많은 환단고기 번역가들이 지식의 눈으로 접근하다보니 정작 저자들이 전하고자했던 ‘역사 진수’는 가려지게 되었다.
이처럼 환단고기는 단순한 한국사의 위대성을 주장한다고 돌팔이 사학자들이 운운하는 위서가 아니라 동서 시원역사의 맥락과 정신사의 골수가 기록되어 있다. 한 인간으로서도, 동서 종교가이든 어떤 철학자를 물론하고 인류문화의 진수를 맛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사서를 죽기 전에 읽어봐야 한다. 진짜 스스로 감동하고 감사함을 느낄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침탈 속에 한국인의 원형을 잃어가고 정체성이 파괴되고 있는 이 시기, 세계가 코로나19의 팬데믹 병겁 시간 속에 기존의 문명패러다임이 과감히 파괴되고 있다.
이 혼란기 속에서도 어둠이 아닌 광명을 세계를 열어 미래를 홍익인간의 세상으로 만드는 역사관이 천년의 사서인 ‘환단고기’ 속에 들어 있다. 코로나 19 여파가 역으로 가정과 가족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 역사적 대세 속에 자신에 대해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 줄 것 수 있는 것이 지금 한국사회에 시민역사학의 바람을 일으키는 ‘환단고기’이다. 반드시 탐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