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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보다 우리 학자들의 태도가 더 문제”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보다 우리 학자들의 태도가 더 문제”

인터뷰_ 1980년대 파격적 고조선 연구 제출했던 윤내현 단국대 명예교수

2012년 09월 25일 (화) 11:27:25 최익현 기자

교수신문 링크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5913



▲ 공고를 나와 과학도가 되려했던 윤내현 명예교수는 특허만도 수십개를 갖고 있는 ‘과학자’ 역사학자다. 단국대에서 박사를 했으며, 하버드대 대학원 동아학과에서 연구하기도 했다. 『한국고대사신론』으로 학계에 파장을 일으켰지만, 그의 고조선 연구는 안타깝게도 계승되지 못했다.

중국의 동북공정, 즉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역사학자들의 떳떳하지 못한 학문적 태도입니다.”

1980년대 초중반 「고조선의 강역」, 「중국문헌에 나타난 고조선 인식」, 「위만조선의 재인식」 등을 발표했던 윤내현 단국대 명예교수(72세)의 지적이다. 2005년 정년퇴임을 한 그는 지금 파킨슨씨병으로 말도 어눌하고 거동까지 불편한 상태다. 중국 고대사를 전공한 그가 한국 고대사의 예민한 부분을 거론하고 뛰어든 것은, 1983년 44세의 나이에 「箕子新考」를 발표하면서부터다. 그리고 30여년이 지났다. 그는 지금 잊혀져가고 있다.

현행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린 고조선 관련 내용을 보면,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의 왕이 됐으며, 이후 漢의 침략으로 왕검성에서 1년 동안 항전하다 지배층의 내분으로 고조선이 멸망했고, 한 군현이 설치(낙랑군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곧 사라짐)됐다고 기술돼 있다. 이러한 교과서의 설명 어디에도 그가 힘겹게 연구한 내용은 반영돼 있지 않다. 위만이 몰아낸 준왕은 ‘기자의 후예’이며, 위만이 권력을 차지한 곳도 고조선의 일개 변방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한 군현은 한반도에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 등 주장 하나하나가 주류 학계의 시각과 첨예하게 구별됐다.

중국문헌 연구를 배경으로 제출된 윤 교수의 학설은 학계 ‘소수 의견’으로도 남지 못하고 그야말로 변방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10여년 전부터 중국측이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을 압록강까지 무리하게 확장하는 공정을 펼쳐온 데는 만주 요동이 중국 영토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그러나 30여년 전 이미 ‘고조선’의 위치와 강역을 ‘중국문헌’을 중심으로, 중국의 시각에서 확인한 윤 교수의 시각에서 본다면, 중국측의 역사왜곡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태풍 산바가 비바람을 몰고 오던 지난 17일 서울 보라매공원 자택 근처에서 그를 만났다.

△ 중국 고대사 전공인데, 1980년대 고조선 강역, 기자조선, 한사군 등과 관련 독특한 주장을 했다. 이때부터 주류학계와 불편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재야 사학자들과 주류 사학자들과의 마찰이 굉장히 컸다. 그들이 주류 사학계 학자들을 ‘식민사학’으로 비판을 많이 했다. 학자들이 국회에 불려가서 망신도 당하고 하는 사건도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새로운 것을 발표하니, 재야 사학자들이 나를 굉장히 지지했다. 주류 사학계에서 나온 자신들 편으로 생각해 지지했던 것이다. 주류사학계는 지금도 그렇지만, 일본 총독부에서 만들었던 한국사, 그 기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원래 중국 고대사를 했던 사람이다. 중국 문헌을 보다보니까, 우리 역사가 일제가 가르쳤던 내용과 다른 것을 알게 됐다. 우린 흔히 중국인들이 역사왜곡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우리 역사를 잘 못 쓰는 것도 있다. 그런 것도 많다. 자기네가 자기 역사도 바로 잡지 못하면서, 남한테만 자꾸 책임 전가하는 것은 안 되지 않나.

△ 「箕子新考」는 정말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왜 ‘기자’를 언급했나.

“나는 중국 사료를 보면서, 기자가 중국과 한국에 걸쳐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기자를 이해하면 우리 고대사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갑골문을 조사해보니 기자가 언급된 갑골문이 10~20여개 나왔다. 그가 조선에 갔다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기자가 생존했던 인물이라는 근거 자료는 됐다. 기자에 대해 더 조사 해보고, 갑골문, 청동기 조사해보니, 기자의 청동기가 중국의 동북부에서 발전한 청동기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기자가 우리나라 쪽으로 왔을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기자신고」를 써서, 도대체 기자는 누구였으며, 그가 정착한 곳이 어디였는지를 밝혔다.

내 결론만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만, 기자는 중국으로부터 고조선 서쪽 변경으로 이주해온 실제 인물이며, 그가 고조선 사회의 중심 세력이 된 것이 아니라, 작은 자치국가 형태의 小國을 유지했다고 본다. 즉, 기자나 기자국은 한국고대사의 주류에 위치할 수도 없으며 ‘기자조선’이라는 용어는 전연 부당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학술 발표회장에서 이런 내용을 발표했더니 원로 선배 사학자들이 막 화를 냈다. 영토만 넓어서 뭐 할 거냐고. 영토의 문제가 아니라 사료의 문제, 역사 연구의 문제였는데 말이다.”

△ 그런 마찰이 어떤 불이익으로 돌아왔나.

“그 이후 자주 어울렸던 많은 분들과 거리가 멀어졌다. ‘윤내현이 이상해졌다’라고 학술 모임에도 부르지 않았다. 주류사학계로부터 멀어졌다. 그 뒤부터 아예 연구비 신청도 하지 않았다. 모두 자비로 연구했다. 언젠가 단국대에서 100만 원 연구비를 내 명의로 줬는데, 이것도 학교에서 준 것이지 신청해서 받은 건 아니다. 하버드 옌칭 연구소로 공부갈 때, 단국대가 지원해줬다.”

△ 결국 역사 연구의 기본 원칙이랄까, 태도 문제가 중요할 것 같다.

“역사 연구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하나는 사료이고 다른 하나는 해석이다. 두 가지가 충족될 때 역사가 된다. 사료에 근거해서 일단 사실을 밝히고 이게 확실하게 밝혀진 다음에 해석의 문제가 따른다. 오늘날 역사 연구가 반성할 부분이 많다. 해석을 사료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순된 모습이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우리의 근대사학 연구방법이 들어왔는데, 일본이 강조했던 게 실증사학이다. 실증사학이야 독일에서 시작했고 옳은 거다. 그런데 일본이 우리에게 실증사학을 가르칠 때, 그것을 왜곡해서 사료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중국기록의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 그러나 신하는 아니었다’라는 기자 관련 대목에서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건 말하지만, 신하는 아니었다는 부분은 의도적으로 빼버렸다. 고조선의 국경 문제도, 先學들은 일본사람들이 말한 것을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문제가 됐다. 앞뒤 문맥을 조금만 맞춰보면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다. ”



△ 중국의 한국 고대사 왜곡이 반복되고 있다. 10년 전부터는 만리장성의 동단 기점을 압록강으로 잡고 있을 정도다.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지혜로울까.

“원론적이지만, 원전을 철저하게 해석하고 연구하는 것, 중국 사람이 봐도 이것은 뒤짚을 수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해석과 연구를 내놓아야 한다. 우리한테 유리하다고 왜곡하면 그런 것은 중국이 보면 금방 알지 않겠나. 문헌을 사실대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류 없도록, 그렇게 해서 거기에 의견을 달아야 하지 않을까. 고고학 자료도, 해석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 중국에서 고고학 조사 자료를 발표하면 우리 학계에서는 그걸 그대로 따른다.

정치한 해석을 하고, 합리적 설명이 가능해야 인정할 수 있는 데도 말이다. 연진장성에서 유물이 출토됐다고 한다면 이것도 논리적으로 따져봐야지, 중국측 발표를 그대로 믿는 건 아니라고 본다. 한 번은 중국 중학교 역사시간 수업을 견학해본 적 있다. 중국 지도를 그려놓고 설명을 하는데, 거기에 청천강까지 만리장성이 그려져 있다. 그 근거가 한국의 유명한 역사학자가 고증한 내용이라고 가르친다. 이런 태도가 중국의 역사 왜곡을 불러왔다고 본다.

또 하나, 학계에서는 주류사에 반하는 학설도 들여다봐야 하는데, 그걸 폐쇄해버리면 학문의 발전은 어렵다고 본다. 나 같은 사람은 주류학계의 주장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해왔다. 그렇다면 한번쯤 불러서 ‘당신 얘기도 해보시오’ 해야 하지 않나. 동북아역사재단은 단 한 번도 내 얘기를 경청한 적이 없다.”

△ 학계 일부에서는 고대사 특히 고조선 관련 자료가 너무 적다라고 말한다.

사료가 적다라고 말하는 것은 학자가 자기 학문을 스스로 낮게 평가하는 거다. 사료가 얼마나 있어야 풍부하단 말인가. 하나나 둘이나 있는 것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고조선을 많이 언급하고 있지만, 거기에 있는 내용을 국사책에서 어느 정도 인용하고 있는가? 단군왕검이라는 이름 말고는 전혀 인용이 없다. 어떤 국사책에서는 고조선 도읍이 왕검성이었다고 기록했다. 그것은 ‘위만조선’의 도읍이지 고조선의 도읍이 아니다.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왜 있는 사료를 놓고 그렇게 가르치나.

그러니까 사료가 없다는 게 아니라 있는 것도 안 쓰면서, 사료가 부족하다는 이야기 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고조선의 영토는 우리 기록에는 없어도 중국기록에는 나오지 않는가. 중국과 경계를 하고 있다고. 그럼 서쪽 국경을 알 수 있다. 중국이 우릴 위해 쓴 게 아니라 자기네 국경을 알리려고 쓴 거다. 그런 식으로 사료를 알아가야 하지 않을까. 고대사는 우리 역사의 뿌리에 해당한다. 역사는 지식도 키우지만 의식을 키우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사가 제대로 교육이 안 되면 민족의식이 바로 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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