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
[펌] 대륙을 누빈 백제(하) - 백제는 대륙에서 어떻게 활동했을까?
지난번에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에 대해 다룬 것은 다들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번에 사료들을 보면서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가 고구려 동천왕의 서안평 점령(서기 242년)으로부터 4년 뒤인 고이왕 13년(서기 246년)이라는 것과 백제의 요서 공략이 고구려와 백제의 합동 작전이라는 것을 밝혀냈으며 이것이 중국의 <송서>와 <양서>의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나는 여기서 지난 번에 못다한 이야기들과 분서왕 이후의 백제의 대륙에서의 활동을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서들을 살펴보면서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지난번에 설명했던 것들을 복습하는 차원에서 지난번에 못다한 이야기를 추가하면서 지난번에 설명한 고이왕부터 분서왕까지의 백제의 대륙진출 역사를 정리해보자.
서기 242년, 고구려의 11대 태왕인 동천왕이 위나라의 요동 서안평을 점령하자 서기 246년(삼국지 기준으로는 244년),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대방태수 궁준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백제의 8대 고이왕은 그 틈을 타 낙랑,대방을 기습하여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시키고 요서를 점령하여 진평군을 세웠다. 백제의 요서 공략은 고구려의 요동 공략으로부터 불과 4년 뒤이므로, <송서>와 <양서>에서 고구려가 요동을 공략하자 백제가 요서를 공략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백제는 고구려와 손을 잡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많은 기록들이 이를 증명해준다. <삼국사기>를 보면 고이왕 때에 백제와 신라는 서로 적국이었다. 고이왕 때에 백제와 신라는 서기 240년,255년,266년,283년에 총 4차례의 전쟁을 치루었다. 그런데 서기 245년에 고구려가 백제의 적국인 신라를 공격했다.
동천왕 19년(서기 245년) 겨울 10월,군사를 내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조분 이사금 16년(서기 245년) 겨울 10월,고구려가 북쪽 변경에 침입하였으므로, 우로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 마두책(馬頭柵)을 지키고 있었다.
본래 동천왕 이전만 해도 고구려와 신라는 서로 아무런 충돌이 없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한 시기는 서기 245년으로, 서기 240년에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인지 불과 5년 뒤의 일이다. 즉 당시 백제와 사이가 나쁘던 신라를 고구려가 먼저 공격한 것인데, 이것은 고구려와 백제가 서로 동맹관계였을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게다가 동천왕이 신라를 공격한 시기는 백제의 요서 공략(서기 246년)으로부터 불과 1년 전이다.
백제의 요서 공략이 고구려와 백제의 합동 작전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위의 기록이 다가 아니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 나오는 최치원이 쓴 글에서도 이것이 고구려와 백제의 합동 작전임을 암시해준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 때에 강병 백만으로 남으로는 오·월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유·연·제·노 등지를 흔들어 중국의 큰 좀이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강병 백만이라는 말은 조금 과장이 있지만 이 글의 핵심은 고구려와 백제가 전성기 때에 중국의 동쪽 지역을 침략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은 고구려와 백제가 동반으로 등장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합동 작전이 있었다는 암시를 준다. 참고로 단재 신채호 선생 또한 이것을 고구려와 백제의 합동 작전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나의 주장과 다른 점은 이것이 고이왕 때에 일어난 일이라는 나의 주장과 달리 단재 신채호는 최치원의 글에서 나오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력이 연개소문 때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건 백제의 요서 공략이 고구려와 백제의 합동 작전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백제의 대륙진출을 부정하는 자들은 백제의 국력이 중국에 비하면 매우 약했고 당시의 항해술이 해안가를 따라서 가는 연안항해라서 바닷길이 고구려에 의해서 중간에 가로막히기 때문에 백제가 대륙에 영토를 마련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주장한대로 고구려와 백제가 합동 작전을 펼쳐 각자 요동과 요서를 차지한 것이라고 본다면 이런 주장들은 충분히 반박이 가능하다.
나는 백제의 국력이 학계에서 주장하는 것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저들이 주장하는대로 백제가 대륙에 진출할 수 있을 만한 국력이 못 되었다고 치자. 그러나 그렇다고 쳐도 백제의 요서 공략은 고구려와 백제의 합동 작전이었기 때문에 백제는 충분히 대륙에 진출할 수 있다. 당시 중국과 대등하게 맞서던 고구려와 연합을 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중국에 맞서 싸울 정도로 강한 국가라는 것은 주류 사학계에서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을 한다면 백제가 충분히 요서를 공략할 수 있다.
당시의 항해술이 연안항해라서 바닷길이 고구려에 의해 막히기 때문에 백제가 대륙에 진출할 수 없다는 주장 또한 마찬가지로 쉽게 반박이 가능하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서로 연합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백제는 충분히 고구려의 해안을 지나서 요서까지 도달할 수 있다. 아마 고구려는 백제의 수군이 고구려의 해안을 마음껏 경유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은 물론이고 백제의 수군이 요서까지 도달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줬을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의 요서 공략에 대해서는 쉽게 설명이 가능하다.
백제의 대륙진출은 고이왕 대에서 끝나지 않았다. 백제의 대륙진출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으며 고이왕의 요서 공략은 그 기반이었다. 서기 286년, 대륙에 영토를 넓힌 백제의 위대한 군주인 고이왕이 죽자 그의 아들인 책계왕이 왕위를 이어 백제의 9번째 왕이 되었다.
책계왕(責稽王)<혹은 청계(靑稽)라고도 하였다.>은 고이왕의 아들이다. 키가 크고 뜻과 기품이 웅장하고 뛰어났다. 고이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왕은 장정들을 징발하여 위례성(慰禮城)을 보수하였다. 고구려가 대방(帶方)을 정벌하자 대방이 우리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앞서 왕은 대방왕(帶方王)의 딸 보과(寶菓)를 맞이하여 부인(夫人)으로 삼았기 때문에 “대방과 우리는 장인과 사위의 나라이니 그 청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고는 드디어 군사를 내어 구원하니 고구려가 원망하였다. 왕은 고구려의 침공과 노략질을 염려하여 아차성(阿且城)과 사성(蛇城)을 수축하여 이에 대비하였다.
책계왕은 대방왕의 딸인 보과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여기서 나오는 대방은 한사군의 대방군이 아니라 지금의 황해도에 있는 우리민족이 세운 독립국가인 대방국이다. 다시말해 대방군은 요서에 있었고, 대방국은 한반도에 있는 우리민족이 세운 독립국가이다. 혹시라도 착각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예전에 이 대방국에 대해서 쓴 글이 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http://blog.naver.com/cldnastp/70150459268
위의 기록을 보면 책계왕이 보과와 혼인한 시기는 책계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이 기록에서 책계왕이 대방왕의 딸인 보과와 혼인한 시기는 고이왕 때이다. 즉 고이왕 때에 백제와 대방국이 혼인동맹을 맺은 셈이다. 내가 위에 참고하라고 한 내가 예전에 쓴 글에서 나는 이것이 북방의 고구려를 막기 위해 백제와 대방국이 손을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는건 이때쯤이면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각자 요동과 요서를 공략하여 서로의 목적을 이루었으니 더이상 서로 협력할 이유가 없어졌다. 결국 책계왕 원년(서기 286년), 고구려가 장인의 나라인 대방국에 쳐들어가자 책계왕은 군사를 보내 대방국을 구원했다. 이것이 형제국인 고구려와 백제의 첫 충돌이며 이로써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은 완벽하게 깨지고 말았다.
이후 책계왕의 13년 재위기간 동안 책계왕의 행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다가 마지막에 이런 기록이 있다.
책계왕 13년(서기 298년) 가을 9월,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쳐들어오자 왕이 나아가 막았으나 적의 군사에게 해를 입어 죽었다.
한(漢)이 맥인(貊人)과 함께 백제에 쳐들어오자 책계왕이 직접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것이다. 그럼 이 기록에 나오는 한(漢)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유방이 세운 한(漢)나라는 이미 그로부터 78년 전인 서기 220년에 멸망하였다. 당시 중원을 지배하던 나라는 오늘날 서진이라고 부르는 진(晉)나라이다. 다시말해 당시에 한(漢)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는 없다는 것이다. 이 기록의 한(漢)이 흉노족인 유연이 세운 한나라라는 주장도 있지만 유연이 세운 한나라는 그로부터 6년 뒤인 서기 304년에 세워진 나라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의 한나라는 유연의 한나라도 아니다. 사실 여기서 나오는 한(漢)은 대륙백제를 설명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일단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나는 이 기록의 한(漢)이 국가 명이 아니라 종족 명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 기록의 한(漢)은 한(漢)나라가 아닌 한족(漢族)인 것이다. 한마디로 특정 국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냥 중국인들을 가리키는 말인 셈이다. 그렇다면 아마 이 기록의 한(漢)은 진(晉)나라를 배후에 둔 낙랑군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낙랑군이 고구려에 소속되지 않은 맥족들과 함께 백제에 쳐들어가 책계왕을 전사시킨 기록이다. 사실 이 기록의 한(漢)이 낙랑군이라는 것은 누구나 추측할 수가 있다. 굳이 이 기록의 한(漢)이 낙랑군이라는 것을 애써서 밝힐 필요는 없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여기에 시간을 잡아먹고 말았다. 어쨌든 이 기록 또한 백제의 대륙에서의 활동을 설명해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게 있다. 그것은 책계왕 2년(서기 287년) 이후로 재위기간 13년 동안 책계왕의 행적이 나타나지 않다가 책계왕 13년(서기 298년)에서야 위에서 본 것과 같이 낙랑으로 추정되는 한(漢)이 쳐들어오자 맞서 싸우다가 전사한다. 무려 10년이 넘게 공백기간이 있는 것이다.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책계왕 2년에서 책계왕 13년까지의 공백기간은 어쩌면 책계왕이 대륙에 진출하던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삭제했을수도 있다. 김부식이 살던 고려시대에는 사실상 한반도가 영토의 전부였으니 당시의 지리적 개념으로 봤을때 백제의 대륙에서의 활동이 터무니없어 보였을 것이다. 만약 나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책계왕 재위기간은 백제의 대륙에서의 가장 활발한 활동기간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으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결국 서기 298년, 책계왕이 전사하자 그의 장남인 분서왕이 백제의 10번째 왕이 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분서왕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거동과 풍채가 영특하고 빼어났으므로, 책계왕이 사랑하여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자신을 이렇게 사랑하던 아버지였기에 그런 아버지를 죽게 만든 낙랑에 대한 분서왕의 복수심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영토확장의 욕구 또한 맞물려서 대대적으로 낙랑군의 영토를 침공하고자 했을 것이다. 결국 분서왕은 이를 실행에 옮겼다.
분서왕 7년(서기 304년) 봄 2월, 몰래 군사를 보내 낙랑(樂浪)의 서쪽 현(縣)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서기 304년, 분서왕은 낙랑군의 서쪽 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낙랑군의 서쪽 현을 빼앗았다는 것을 보았을때 백제의 대륙영토는 낙랑군의 서쪽에 있었을 것이다. 이는 평양에 낙랑군이 있고 그 남쪽인 서울에 백제가 있었다는 주류 강단사학에서 주장하는 위치로 봤을때 말이 안 된다. 나는 참고로 낙랑군이 난하의 동쪽에 있었을 것으로 보는데, 그러므로 백제의 대륙영토는 난하 서쪽으로 비정한다. 어쨌든 분서왕은 고이왕에 이어 또 다시 요서를 공략했고 이로써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에 한발자국 가까워졌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백제의 대륙영토를 더이상 넓히지 못했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도 못했다. 그해 10월, 그가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겨울 10월, 왕은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결국 분서왕은 안타깝게도 뜻을 다 이루지도 못하고 고작 재위기간 7년 만에 생을 마감했다. 여기까지가 지난번에 설명한 백제의 대륙진출의 역사다. 참고로 지난번에 설명하지 못한 것도 덧붙였다. 이제부터 분서왕 이후의 백제의 대륙에서의 활동을 우리나라와 중국의 사서들을 살펴보면서 설명하겠다.
분서왕이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자 그의 장남인 계왕은 어려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6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인 비류왕이 백제의 11번째 왕이 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비류왕은 구수왕의 둘째 아들이라고 하는데, 비류왕의 혈통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이상하게도 비류왕은 왕위에 오른 뒤, 단 한번도 선왕인 분서왕의 원수를 갚으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비류왕은 분서왕의 복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류왕 재위기간 동안에는 대륙에서의 활동으로 보이는 기록이 전혀 없다. 비류왕은 대륙에 영토를 넓힌 고이왕,책계왕,분서왕을 비롯한 고이왕 혈통과 달리 대륙의 영토에 관심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류왕 시기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고 다음 기록을 주목하자.
<진서> 모용황의 기실참군인 봉유가 간언하였다. ...(중략) 구려와 백제 및 우문부와 단부의 사람들은 모두 전쟁으로 인해 강제로 끌려온 자들이지 중국인들처럼 의를 사모하여 온 자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두들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십만여 호에 이르러 도성을 비좁게 할 정도로 많으니 장차 우리 나라에 큰 해가 되지 않을까 염려되옵니다.
쉽게 풀이하자면 전쟁으로 인해 고구려,백제,우문부,단부의 사람들이 전연에 포로로 많이 끌려왔는데, 전연 황제 모용황의 신하인 봉유가 모용황에게 도성에 고구려,백제,우문부,단부의 포로들의 수가 많아지자 그들이 장차 전연에 피해를 주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고 간언을 하는 것이다. 위의 기록을 보면 모용선비족이 세운 전연의 도성에 백제인들이 전쟁으로 인해 강제로 끌려왔다고 한다. 그렇다는건 백제와 전연이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백제와 전연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전연은 지금의 요서 및 중원에 있었던 나라인데, 그런 전연과 백제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는 것은 대륙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매우 결정적인 증거 중 하나다. 이도학 교수는 이를 두고 백제가 만주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럼 이때의 백제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참고로 위의 <진서>에서 봉유가 모용황에게 간언을 한 시기는 서기 345년이다. 당시 백제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한번 살펴보자.
이때의 백제는 서기 344년, 비류왕이 죽고 분서왕의 장남인 계왕이 백제의 12번째 왕이 되었다. <진서>에서 말하는 시기는 백제의 계왕 때이다. 고이왕 혈통인 계왕의 재위기간에 다시 대륙에서의 활동으로 보이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고이왕 혈통이 대륙의 영토에 관심이 많았으며 고이왕 혈통인 계왕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백제의 대륙진출을 부정하는 자들은 <진서>의 기록에 나오는 백제를 실제 백제가 아니라 부여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부여를 백제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지 제대로 설명을 못하고 있다. 그저 백제가 서기 345년 이전에 대륙에 진출한 증거가 없다거나 전연과 백제가 전쟁을 벌인 기록이 없으므로 <진서>에서 부여로 기록해야 할 것을 백제로 잘못 기록했다는 말 뿐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지난번에 백제의 대륙진출 시기가 고이왕 13년인 서기 246년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므로 서기 345년 이전에 백제가 대륙에 진출한 증거가 없다는 것은 쓸데없이 트집잡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전연과 백제가 전쟁을 벌인 기록이 없는 것은 중국 측의 고의적인 삭제를 생각해봐야 한다. 참고로 <진서>는 서기 644년, 당태종 이세민의 지시로 방현령이 편찬한 역사책이다.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를 비롯한 동방의 국가들을 정복하려는 욕구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백제의 대륙진출을 의도적으로 삭제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서>에서 백제인들이 전쟁으로 강제로 끌려왔다는 것이 나오는 이유는 아마도 전쟁과 같이 직접적으로 백제의 대륙진출로 추정할 수 있는 기록들만 삭제를 하다보니 이런 포로에 관한 사소한 것은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삭제를 안 했을 것으로 보인다. 설사 이 기록의 백제가 단순히 부여를 백제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쳐도 백제의 대륙진출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것은 이미 내가 지난번에 밝혀낸 바가 있다. 이 기록 말고도 중국 측 사서에서 백제의 대륙에서의 활동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많이 보인다.
<자치통감> 처음에 부여가 녹산(鹿山)에 거처하였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部落)이 쇠잔해져서 서쪽으로 연(燕)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
처음에 부여가 녹산(鹿山)에 있었는데 백제가 부여를 침략하여 부여가 연나라 근처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참고로 이 기록에서 백제가 부여를 침략한 시기는 서기 346년으로, 백제의 전성기인 13대 근초고왕 원년이다. 위의 기록 또한 백제가 기존 통설대로 한반도에만 쳐박혀 있던 국가였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기록에 대해 단재 신채호 선생은 기록에 나오는 녹산(鹿山)이 지금의 하얼빈이며 14대 근구수왕이 요서,북경,산동,강소,절강 등지의 중국 동쪽 해안을 차지하고 지금의 만주 하얼빈까지 점령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도학 교수는 이 기록이 백제가 만주에 있었다는 증거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의문점이 드는 것은 백제가 차지한 땅은 요서인데 이 기록에서 백제는 만주의 부여를 공격하고 있으며, 백제의 침략을 받은 부여가 요서에 가까운 연나라 즉 전연 근처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분명 이 기록은 백제가 한반도에만 쳐박혀 있는 국가가 아니라는 증거 중 하나가 되지만 백제의 대륙 영토가 요서에 있다고 전제했을때 조금 이상해진다. 그래서 내가 한번 어떻게 된 것인지 추측을 해보겠다.
이때는 모용선비족이 세운 전연이 매우 막강했던 시절이다. 그래서 백제의 근초고왕은 전연과의 충돌을 피하면서 서쪽으로 영토를 넓히는 것을 잠시 포기하고 부여가 있는 동쪽의 만주로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당시 부여는 모용선비의 침략으로 매우 쇠약해져 있는 상태였으니 백제에게도 만만한 상대였을 것이다. 결국 원래 녹산(鹿山)에 있던 부여는 백제의 침략을 받아 서쪽의 연나라(전연) 근처로 옮겨갔다. 부여가 전연 근처로 간 이유는 아마 전연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제법 개연성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나의 억측에 불과하니 나의 억측에 귀 기울일 필요는 없다. 다만 추측을 한번 해본 것일 뿐이다. 어쨌든 확실한건 위에서 본 <자치통감>의 기록에서도 백제는 한반도에만 쳐박혀 있는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백제의 대륙진출을 부정하는 자들은 이 기록에 나오는 백제가 사실은 고구려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여기서 백제의 대륙진출을 부정하는 자들의 재미있는 공통점과 거기서 모순점을 발견했다. 내가 발견했다는 재미있는 공통점이라는 것은 백제의 대륙진출을 부정하는 자들이 하나같이 앞에서 본 <진서>에 나오는 전연에 포로가 끌려갔다는 백제와 <자치통감>에 나오는 부여를 침략했다는 백제가 모두 다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진서>에 나오는 백제는 부여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자치통감>에 나오는 백제는 고구려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저들의 주장대로 이게 모조리 다 중국인들이 잘못 기록한 것이었다면 중국의 역사가들에게는 만만한 것이 백제인가? 어떻게 된게 부여도 잘못 기록해서 백제라고 기록한 것이라고 하고, 고구려도 잘못 기록해서 백제라고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상당히 일관성이 없고 모순적이다. 정말 이게 다른 것으로 기록해야 할 것을 백제로 잘못 기록한 것이라면 부여만 잘못 기록한 것이거나 아니면 고구려만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해야한다. 그런데 저들은 그냥 백제가 대륙에 진출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만 보이면 이것은 모조리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말하며 사서의 내용을 마음대로 뜯어 고친다. 그래서 부여도 백제요, 고구려도 백제요. 이런식으로 북방에 있는 나라는 아무거나 다 끌어들여 사서에 나오는 백제의 대륙에서의 활동을 자기네들 꼴리는대로 바꿔버린다. 이것은 사서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고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뜯어 고치는 것이며, 이것은 역사를 객관적으로 연구하는데 매우 큰 장애물이다. 객관성을 추구한다는 자들이 정작 사서의 내용을 마음대로 바꿔서 해석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이것이 설사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 쳐도 백제의 대륙진출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겠다.
다들 아시겠지만 근초고왕 시기는 백제의 전성기이다. 그런데 정작 근초고왕 재위기간에는 백제의 대륙에서의 활동으로 보이는 기록이 많이 없다. 이를 두고 식민빠들은 근초고왕은 대륙에 영토를 넓히지 못했으며, 그러므로 백제는 대륙에 진출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근초고왕은 백제의 전성기를 이룩한 왕이다. 그런 왕이 과연 대륙에 영토를 단 한발자국이라도 넓혀보지 못했을까? 그리고 백제가 대륙에 진출한 시기는 고이왕 때이다. 그러므로 근초고왕이 대륙에 영토를 넓히지 못했더라도 어차피 그보다 더 전인 고이왕 때에 대륙에 진출했으므로 백제의 대륙진출을 설명하는데 큰 문제는 없다.
이제 근초고왕 시기의 대륙에서의 활동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루겠다. 일단 근초고왕 재위기간 동안에 대륙에서의 활동으로 보이는 기록은 앞에서 본 <자치통감>에서 근초고왕 원년인 서기 346년에 백제가 부여를 침략했다는 기록 외에 거의 없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삼국사기>를 보면 근초고왕의 재위기간 중에 무려 19년의 공백기간이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 기간이 삭제되었을 수도 있으며, 이 기간 동안 근초고왕은 대륙에 영토를 넓히는데에 치중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초반에 전연이 강했을때는 대륙진출이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연이 점점 쇠퇴해지면서 대륙진출이 적극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아마도 서기 370년, 전연이 망하면서 전연의 영토를 제법 획득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서기 372년 6월에 근초고왕은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 영낙랑태수에 책봉되었다. 내 블로그를 자주 방문하신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나는 낙랑군이 요서에 있다고 본다. 그러니 근초고왕이 낙랑태수에 책봉되었다는 것은 백제가 전연의 낙랑군을 차지했거나 가까운 곳에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이다. 식민빠들의 주장대로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다고 쳐도 식민빠들은 낙랑군이 서기 313년에 요서에 이치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설사 낙랑군이 한반도에 있다고 쳐도 백제의 대륙진출을 설명하는데에 전혀 지장이 없다. 어쨌든 많은 기록이 전해지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근초고왕 시기에도 백제는 대륙에 영토를 많이 넓혔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대륙진출을 부정하는 자들은 백제의 군사력으로는 당시 중국의 전연과 전진이 차지하던 요서는 어림도 없다고 말한다. 당시 백제의 최대 군사력은 고작 3만에 불과하며 그보다 10배가 많은 군사 를 자랑하는 전연과 전진은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것은 단순히 군사의 숫자가 다가 아니다. 단순히 군사 수가 많다고 전쟁에서 무조건 다 이긴다면 예를 들어 북한이 우리보다 군사 수가 더 많으니 무조건 북한이 우리를 이긴다는 것인가? 그리고 백제의 군사력이 <삼국사기>에 나오는게 다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삼국사기에는 단 한번도 백제의 최대 병력이 3만이라고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저들은 <삼국사기>에서 근초고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갔다는 기록을 가지고 그것이 백제의 최대 병력이라고 단정짓고 있다. 이것은 백제가 3만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국가라고 봐야 하는 것이지 백제의 병력이 3만이 한계라고 봐서는 안 된다. 이런식으로 백제의 군사력을 마음대로 단정짓는 것은 백제에 대한 과소평가다.
최치원은 고구려와 백제가 전성기 때에 강병 백만으로 중국 동쪽을 침략하여 중국의 좀이 되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강병 백만이라는 말은 과장이지만 최치원이 강병 백만이라는 말을 쓸 정도면 백제의 군사력은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설사 백제가 매우 약한 나라였다고 쳐도 대륙에 진출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식민빠들이 말씀하시는대로 백제가 전연과 전진에게 어림도 없는 매우 약한 국가였다고 치자. 그럼 전연과 전진은 무조건 백제와 싸워서 백제의 대륙영토를 점령해야 하는가? 왜 전연과 전진이 백제와 우호관계를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하는건가? 혹시 강대국이면 무조건 옆에 붙어있는 약소국을 모조리 다 가만히 안 둘거라고 생각한다면 매우 단순한 생각이다. 당시 전연이나 전진은 남쪽으로는 동진과 동쪽으로는 고구려를 견제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괜히 골치 아프게 적을 더 만들어야겠는가 아니면 백제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 고구려를 견제하겠는가? 나 같으면 백제를 같은 편으로 끌어들여 괜한 데에 힘쓰지 말고 백제를 이용해 고구려를 견제할 것이다. 그게 더 이득이 되지 않을까? 백제가 그렇게 거슬린다면 고구려나 동진을 쓰러뜨리고 나서 백제를 처리해도 된다. 약자를 제거하고 나서 강자를 제거하는 것은 어렵지만 약자와 손을 잡고 강자를 제거한 다음에 나머지 약자를 처리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이제 근초고왕 시기의 대륙진출에 대한 설명이 끝났다. 근초고왕 시기의 대륙진출에 대해서는 나의 추측에 불과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근초고왕 시기에 대해서는 내 추측이 100% 맞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백제의 전성기인 근초고왕 시기라면 백제가 충분히 대륙에 영토를 크게 넓혔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서기 375년, 백제의 전성기를 이룩한 근초고왕이 죽자 그의 아들인 근구수왕이 백제의 14번째 왕이 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근구수왕이 지금의 요서,북경,산동,강소,절강 등지를 차지하고 하얼빈까지 점령했다고 하며 백제의 전성기는 근구수왕이 이룩했다고 주장했다. <양서>를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양서> 태원 연간(서기 376년~396년)에 그 왕 수(須)가, 의회 연간(서기 405년~418년)에는 그 왕 여영(餘映)이, 원가 연간(서기 424년~453년)에는 그 왕 여비(餘毗)가 각자 사신을 파견하여 생구(生口)를 바쳤다.
여기서 수(須)는 백제의 14대 근구수왕이며, 여영(餘映)은 18대 전지왕, 여비(餘毗)는 20대 비유왕이다. 이 기록을 쉽게 설명하면 근구수왕이 서기 376년~396년, 전지왕이 서기 405년~418년, 비유왕이 서기 424년~453년에 중국의 동진과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생구(生口)를 바쳤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구(生口)란 사로잡은 포로를 말한다. 즉 백제가 중국의 남조의 국가들에게 사로잡은 포로를 바쳤다는 것이다. 동진과 송나라는 지금의 양쯔강 일대에 있던 나라이다. 만약 기존 통설대로 백제가 한반도에만 쳐박혀 있는 국가였다면 이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분명 이 기록은 백제가 동진과 송나라로부터 사로잡은 포로들을 돌려주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는 것은 백제와 동진,송 등의 남조의 국가 간에 서로 전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의 영토는 동진,송 등과 서로 맞닿아 있었던 것이며 지금의 양쯔강 일대까지가 백제의 영토로 보인다. 아마 이 영토는 백제의 전성기인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때에 넓힌 영토일 것이다. 이렇듯 백제의 대륙에서의 활동은 중국의 정사로 인정받은 사서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백제의 전성기가 끝나고 16대 진사왕과 17대 아신왕 시기가 되면서 백제는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에게 밀려 서서히 세력이 약해지고 대륙에서의 힘 또한 역시 위축되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진사왕 때에 백제가 해외의 영토를 다 적국에게 빼앗겼다고 말했다. 이도학 교수는 그와 반대로 오히려 아신왕 때에 백제가 요서를 공략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확실한건 백제의 힘이 서서히 위축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는 대륙의 영토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송서> 여비(餘毗)가 방물을 바치며 국사를 보내어 사사로이 대사(臺使) 풍야부(馮野夫)를 서하태수(西河太守)로 삼을 것을 추인해 주고, 표문으로 역림(易林)·식점(式占)·요노(腰弩)를 요구하자 태조는 모두 들어주었다.
위의 기록을 보면 백제의 비유왕이 풍야부를 서하태수로 삼을 것을 요구하자 송나라의 태조인 문제가 이를 모두 들어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서하란 대륙에 있는 지명이다. 백제가 그곳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고 쳐도 아예 연고가 없는 곳은 아닐것이다. 이미 앞에서 많이 밝혀냈지만 백제의 대륙진출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니 이것 또한 백제의 대륙에서의 활동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양서>에서 살펴봤듯이 백제는 전성기인 근구수왕 이후의 전지왕,비유왕 시기에도 대륙에 영토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신왕 이후부터 백제는 대륙에서의 힘이 많이 약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예전과 같은 큰 세력은 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중원의 왕조들과 충돌을 피하고자 했을 것이다. 근초고왕 이후부터 백제가 중원의 왕조들과 충돌한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안 보이는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인듯 싶다. 게다가 고구려가 북쪽에서 끊임없이 위협을 가하고 있었으니 대륙의 영토에 많은 신경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대륙백제가 본국과 점점 멀어지면서 대륙 영토에 대한 본국의 통치권이 많이 약화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록들을 잘 보면 백제는 꾸준히 대륙 영토에 관리를 파견했을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 서기 472년, 백제의 21대 개로왕이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를 북위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우리는 여기서 장무의 관직 중에 대방태수라는 관직을 주목하자. 이 대방태수라는 관직은 뭔가 석연치않다.내가 누누히 설명하지만 대방군을 비롯한 한사군은 한반도가 아닌 요서에 있었다. 설사 대방군을 비롯한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쳐도 기존 통설에서는 한사군이 한반도에서 요서로 이동을 했다고 주장을 하기 때문에 결국은 당시의 대방은 대륙에 있는 지명이다. 그런데 백제의 개로왕이 대방태수를 중국에 파견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백제가 대륙에 관리를 보냈다는 증거로 보기도 한다.
개로왕은 백제의 영광을 다시 되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서기 475년, 고구려의 장수태왕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결국 백제의 국력은 점점 쇠퇴해져 갔다. 윤내현 교수는 오히려 이 시기의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고구려와 대치하여 국력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그곳을 포기하고 한반도 남부와 중국 동부해안의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확실한건 당시의 백제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영광을 잃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고구려에 의해 사신도 마음대로 보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주왕 2년(서기 476년) 3월, 사신을 송(宋)나라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길을 막아 도달하지 못하고 되돌아 왔다.
동성왕 6년(서기 484년) 가을 7월,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약사(若思)는 서해중(西海中)에 이르러 고구려의 군사를 만나 가지 못하였다.
바다 건너까지 영토를 넓힌 해상강국인 백제가 고구려의 수군에 막혀 중국에 사신도 보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백제로서는 엄청난 타격이며 대륙백제에 관리 파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백제가 그만큼 전성기에 비해 쇠약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근거로 백제가 고구려에 막혀 중국에 사신도 보내지 못할 정도로 수군이 약한 나라였으니 백제는 해상강국이 아니며 대륙에 진출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고구려의 수군이 강했다는 증거로 봐야하는 것이지 백제의 수군이 약했다는 증거로 보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을 백제의 대륙진출이 불가능하다는 증거로도 볼 수 없다.
백제는 바다를 잘 이용할 줄 아는 나라였다. 대표적인 예로 백제 성왕대의 승려 겸익이 뱃길로 인도까지 가서 불경을 가지고 온 사실이 있다. 만약 백제와 인도 간 교류가 없었다면, 승려 겸익이 쉽게 해로를 이용하여 인도로 불경을 구하러 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백제가 인도로 가는 항로를 알고 있었고, 인도와 교류가 있었다면 불가능하지 않다. 다음 기록을 살펴보자.
<일본서기> 백제가 부남(캄보디아)의 재물과 노비 2구를 왜에 주었다.
<일본서기> 백제 사인들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적인 무역을 시도한) 곤륜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다.
위의 기록들을 보면 백제는 동남아시아의 캄보디아와도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동남아시아에 있는 곤륜이 백제를 거치지 않고 왜와 독자적인 무역을 시도하자 곤륜의 사신을 바다에 던져버렸을 정도로 활발한 해상활동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백제가 고구려의 수군에 막혀 중국에 사신도 보내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백제의 대륙진출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래서 이미 앞에서 본 동성왕 6년(서기 484년)의 기록을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다.
동성왕 6년(서기 484년) 가을 7월, 내법좌평(內法佐平) 사약사(沙若思)를 남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약사(若思)는 서해중(西海中)에 이르러 고구려의 군사를 만나 가지 못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서해중(西海中)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자. 서해중(西海中)은 말 그대로 서해 한가운데이다. 동성왕이 보낸 백제의 사신은 서해 한가운데에서 고구려의 군사를 만난 것이다. 당시의 항해술은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횡단항해가 아닌 해안가를 따라서 가는 연안항해이다. 연안항해는 바다를 가로지르는게 아니라 해안가를 따라서 항해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다 한가운데까지 갈 일이 없다. 그런데 백제의 사신이 비록 고구려의 군사를 만나 남제까지 가지는 못했지만 서해 한가운데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당시의 백제가 이미 바다를 가로지르는 횡단항해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 이 시기에 동성왕은 고구려로부터 다시 해상강국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2년 뒤, 그 성과를 거두었다.
동성왕 8년(서기 486년) 3월, 사신을 남제에 보내 조공하였다.
고구려의 수군에 가로막히지 않고 중국의 남제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게다가 그 이후로 동성왕 재위기간 동안에는 백제의 사신이 고구려 수군에 붙잡히는 일이 없어졌다. 이때 백제는 24대 동성왕에 의해 다시 국력이 회복되고 대륙의 영토 또한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그 증거가 동성왕 10년(서기 488년)에 일어난 백제와 북위의 전쟁이다.
<삼국사기> 동성왕 10년(서기 488년), 위(魏)나라가 군사를 보내 침공해 왔으나 우리에게 패하였다.
<자치통감> 북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백제에게 패하였다.
<남제서> 그 해(서기 490년) 위로(북위)가 또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의 국경을 침범했다. 모대(동성대왕)가 사법명,해례곤,목간나 등을 보내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북위가 백제에 쳐들어 왔으나 백제의 동성왕이 북위의 대군을 막아낸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예전에 자세히 다룬바 있으니 내가 예전에 쓴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http://blog.naver.com/cldnastp/70148600213
이미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대해서 예전에 이미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확실한건 백제와 북위의 전투는 육지에서 일어난 전투이며, 그러므로 백제와 북위는 국경이 맞닿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는건 백제가 대륙에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럼 당시 백제의 영토는 어디까지였을까? 다음은 동성왕이 남제에 보낸 표문의 일부이다.
신(臣)이 보낸바 있는 신하인 고달(高達)에게 건위장군(建威將軍) 광양태수(廣陽太守) 겸 장사(長史) 직을 수행하게 하였고, 신하인 양무(楊茂)에게 건위장군(建威將軍) 조선태수(朝鮮太守) 겸 사마(司馬) 직을 수행하게 하였고...(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건위장군(建威將軍)·조선태수(朝鮮太守)인 고달(高達)은 변방의 공로가 일찍이 드러났고, 공무에 힘썼으므로 지금 임시로 용양장군(龍驤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직을 수행시켰습니다. 선위장군(宣威將軍) 양무(楊茂)는 마음과 행동을 맑게 지탱하고, 공무를 폐지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지금 임시로 건위장군(建威將軍) 광릉태수(廣陵太守) 직을 수행시켰습니다. 회매(會邁)는 마음을 지키고 즉, 굳센 마음으로 주도면밀하고 빠르게 시행하고 부지런히 살피므로 지금 임시로 광무장군(廣武將軍) 청하태수(淸河太守) 직을 수행시켰습니다.
신(臣)이 사신으로 파견한 바있는 용양장군(龍驤將軍) 낙랑태수(樂浪太守) 겸 장사 직을 수행하는 신하인 모유(慕遺), 건무장군(建武將軍) 성양태수(城陽太守) 겸 사마(司馬) 직을 수행하는 신하인 왕무(王茂), 참군(參軍) 겸 진무장군(桭武將軍) 조선태수(朝鮮太守) 직을 수행하는 신하인 장새(張塞), 양무장군(揚武將軍) 직을 수행하는 진명 등은 관직에 있으면서 사적인 생활을 잊고서 오직 공적인 업무만 바로 잡고, 위태로움을 보고 명령을 내리면 어려움을 밟고 (자신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지금 사신의 임무를 맡아 파도와 험한 길을 건너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은 지극 정성을 다합니다. 그렇기에 참으로 마땅히 작위를 진급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각기 임시로 수행할 직무에 임명하였습니다. 엎드려 원하오니 성조에서 특별히 관작을 내려 제수하여 바로잡아 주십시오.
쉽게 말하자면 북위와의 전쟁이 끝나고 난뒤 동성왕이 낙랑,대방,조선,광양,광릉,청하,성양에 자신의 신하인 고달,양무,회매,모유,왕무,장새를 태수로 봉하고 그것을 남제의 무제에게 허락받았다는 것이다. 그럼 낙랑,대방,조선,광양,광릉,청하,성양은 과연 어디에 있는 지명일까? 우선 낙랑,대방,조선이라는 이름은 익숙할 것이다. 내가 언제나 강조하지만 한사군은 한반도가 아니라 요서에 있었다. 그리고 설사 식민빠들의 주장대로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 치더라도 식민빠들이 한사군은 요서에 이치되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당시 낙랑,대방이라는 지명은 요서에 있는 지명이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지명은 옛 위만조선이 있던 땅을 가리키는 것이니 마찬가지로 요서에 있는 지명이다. 이제부터 광양,광릉,청하,성양이 어디에 있는 지명인지 알아보겠다. 광양군은 지금의 하북성 융화 지역으로서 난하 상류유역에 있었고, 광릉군은 지금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었으며, 청하군은 지금의 산동성 익도 지역이었고, 성양군은 서진의 성양군이다.
이 지역들은 요서에서 양쯔강 일대까지의 땅이다. 그 정도나 되는 땅이 백제의 영토인 것이다. 이 땅들은 아마 동성왕이 북위와의 전쟁으로 얻은 영토일 것이다. 그리고 이 땅들은 백제의 전성기인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이 차지했던 영토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동성왕은 근초고왕의 영토를 되찾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 정말 이것이 백제가 그 땅들을 차지한 것이 맞는지 의심하거나 이 땅들이 백제의 영토였다면 북위의 영토는 어떻게 된 것인지 의문을 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번 당시 북위가 차지하고 있던 군현들에 대해서 보겠다. 이것을 보다보면 꽤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일단 백제가 점령한 지역의 군현들만 대충 살펴보겠다. <위서> 지형지의 기록에 따르면 북위 시대의 요동군은 2개현 131호에 총인구 855명이며, 요서군은 3개현 537호에 총인구 1,950명이며, 동성왕이 태수를 봉한 대방현이 속한 낙랑군은 2개현 219호에 총인구수 1,008명이며, 동성왕이 태수를 봉한 조선현이 속한 북평군은 2개현 430호에 총인구수 1,836명이다. 그런데 한나라 때의 요동군은 18현 55,972호에 총인구수는 272,539명이고, 요서군은 14현 72,954호에 총인구 352,325명이고, 낙랑군은 25현 62,812호에 406,748명이었다.
북위의 요동군은 한나라 때의 요동군보다 현이 16개, 인구가 대략 5만호, 20만명이 부족하다. 그리고 북위의 요서군은 한나라 때의 요서군보다 현이 11개, 인구가 대략 7만호, 30만명이 부족하다. 그리고 북위의 낙랑군은 한나라 때의 낙랑군보다 현이 23개, 인구가 대략 6만호, 40만명이 부족하다. 이것은 엄청난 차이이며 도저히 같은 군현이라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는다. 게다가 북위 시대의 군현들은 규모가 군현이 아닌 고작 마을 규모에 불과하다. 이것은 그만큼 북위의 요동군,요서군,낙랑군이 그보다 200년 전인 한나라 때의 요동군,요서군,낙랑군보다 면적이 더 작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왜 북위의 동쪽에 있는 군현들이 200년 전인 한나라 때보다 면적이 더 작아졌을까? 그 이유는 다른 나라에게 영토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북위의 영토를 빼앗은 나라는 당연히 고구려와 백제다. 북위의 군현들을 차지한 나라가 고구려라는 주장도 있지만 나는 고구려와 백제 둘 다라고 생각한다. 다시말해 고구려와 백제가 북위의 동쪽 군현들의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자 북위는 고구려와 백제에게 영토를 빼앗겨 크기가 쪼그라든 동쪽 군현들을 이름만 그대로 유지하고 원래 위치와 다른 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때 북위의 요동군,요서군,낙랑군,북평군은 원래 위치보다 서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위는 왜 크기도 쪼그라들어 도저히 군현의 역할을 할 수가 없는 군현들을 한나라 때의 군현들과 이름만 그대로 한 것일까? 그것은 고토 수복이라는 대의명분을 갖기 위한 것일 것이다. 이는 1948년 정부수립 후, 함경남북도, 평안남북도, 황해도의 5도 도지사와 이북 5도에 속한 시·군의 시장 군수를 임명해온 남한정부의 정책과도 같은 것이다.
이 정도면 동성왕 시기의 대륙진출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짚고 넘어가야 할게 있으니 추가 설명을 하겠다.
내가 예전에 쓴 동성왕의 대륙진출에 대한 글에서 <남제서>에 백제 장수인 목간나가 선박을 빼앗았다는 나오는 것이 강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에 대해 요서에는 배로 전투를 할 만한 깊고 폭이 넓은 강이 없기 때문에 목간나가 선박을 빼앗은 일이 강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백제의 대륙영토는 요서가 다가 아니었다. 이미 앞에서 밝혔듯이 백제의 대륙영토는 요서 뿐만 아니라 양쯔강 일대까지였다. 그러므로 백제의 대륙영토에는 황하라는 큰 강이 있다. 황하 정도면 충분히 배를 타고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깊고 폭이 넓다.
설사 백제의 대륙영토가 요서가 다라고 치자. 그래도 강에서 배를 타고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단순히 지금의 요서에 있는 강 중에 배를 타고 싸울 정도로 깊고 폭이 넓은 강이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단정을 짓는 것은 지금의 기후,지리,풍토가 고대의 기후,지리,풍토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백제와 북위의 전쟁이 일어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500년 전이다. 그 정도면 강산이 150번은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의 요서 지역에 배를 타고 싸울 수 있는 크기의 강이 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원래 지리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바뀌는 것이다. 호수였던 곳이 바다가 되기도 하고, 바다였던 곳이 산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고대의 기후,지리,풍토가 지금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단순한 생각이다.
이제 동성왕 시기의 대륙진출에 대해서도 설명이 끝났다. 이제 이 긴 여정을 슬슬 마무리 할 시간이다. 지금부터는 동성왕 이후로 대륙백제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사서들을 통해 살펴보겠다.
서기 501년, 근초고왕의 영광을 되찾은 백제의 위대한 영웅 동성대왕이 자신의 신하인 백가에 의해 암살을 당해 아직 젊은 나이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래도 다행히 백제의 중흥기를 이끈 무령왕이 동성왕의 뒤를 이어 백제의 25번째 왕이 된다. 무령왕은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할 정도로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무령왕 이후 26대 성왕이 그 뒤를 이어 백제의 중흥하려 했으나 서기 554년, 그가 신라의 진흥왕에 의해 전사하면서 백제는 다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백제가 성왕 초년에 고구려에게 패하고 말년에 신라에게 패하여 나라의 형세가 일시 쇠약해졌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해외 식민지가 거의 다 몰락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윤내현 교수는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면서 백제가 대륙에서 밀려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백제의 대륙영토가 성왕이 죽으면서 백제가 쇠약해지자 서서히 사라져 갔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정확한 시기가 언제라고 콕 집어낼수는 없다.
<양서> 천감 원년(서기 502년), 고구려가 백제가 있는 곳을 공격하여 깨뜨림으로써 백제는 쇠약한 나라가 되기 수년 만에 남쪽의 한 땅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위의 기록을 보면 동성왕이 죽은 이후부터 백제는 대륙에서의 영향력이 서서히 사라졌고, 결국에는 한반도로 완전히 밀려나게 된 듯 싶다. 그러나 기록이 부족해 대륙백제가 소멸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백제의 대륙진출에 대한 설명이 모두 다 끝났다. 이제 몇몇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만 짚어가면서 마무리를 하겠다.
백제의 대륙진출을 부정하는 자들이 백제의 대륙진출이 믿을 수 없다는 근거 중에 이런게 있다. 백제가 정말 대륙에 진출했다면 왜 남조 측 사서에서만 이게 나오고 북조 측 사서에서는 이것이 안 나오냐는 것이냐? 한마디로 이것은 남조 측에서 북조의 국가들에게 치욕을 주기 위해 백제가 북조의 영토인 요서를 차지했다고 왜곡을 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 반대로 북조 측에서 치욕을 감추기 위해 왜곡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해보는가? 참고로 중국은 고대부터 자신들에게 치욕스러운 것을 감추기 위해 쉽게 삭제시킬 수 있는 것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삭제시켜 버리고, 삭제시킬 수 없는 너무나도 확실한 진실의 경우에는 미화를 시켜 최대한 치욕을 줄여버리려고 한다. 어쩌다 한번 그대로 기록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는 것일 경우이다.
물론 남조 측에서도 왜곡을 할 수 있다. 남조 또한 중국이니 말이다. 그러나 남조 측에서 북조의 국가들에게 치욕을 주기 위해 백제가 요서를 점령한 것으로 기록했다는 것은 기존 통설로 보면 말이 안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기존 통설대로라면 백제는 한반도 서남쪽에 쳐박혀 있는 한반도의 듣보잡에 불과하다. 그런데 남조 측에서 북조에 치욕을 주려고 아무 상관도 없는 한반도의 듣보잡을 끌어들인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나 같으면 왜곡을 해도 신빙성이 있게 차라리 백제보다 강한 고구려가 요서를 차지했다고 기록을 하겠다. 한번 예를 들어보자. 내가 엄청 싫어하는 놈이 있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꾸며내서 그놈에게 치욕을 주려고 한다. 그럼 그놈이 옆 동네 찌질이한테 쳐맞았다고 거짓말을 하면 사람들이 믿을까 아니면 그놈이 옆 동네 일진한테 쳐맞았다고 거짓말을 하면 사람들이 믿을까?
적어도 이게 남조 측의 왜곡이라면 대체 왜 백제를 이런 왜곡에 끌어들였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설사 백제가 요서를 점령하고 대륙에 진출한게 아니라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백제가 중국을 자주 침략했거나 중국을 두렵게 만들 정도로 강한 국가였기 때문에 남조 측에서 이런 왜곡에 백제를 끌어들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참고로 최치원은 백제가 고구려와 더불어 강병 백만으로 중국의 동쪽을 침략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산 정약용은 백제가 삼국 가운데 가장 강성했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백제가 요서를 점령하고 대륙에 진출한게 아니라고 쳐도 중국을 두렵게 만드는 강한 나라였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기존 통설에서는 백제를 과소평가하고 있다. 백제를 그저 고구려에게 짓밟히고 신라에게 뒤통수나 맞는 한반도 서남쪽에 쳐박혀 있는 약소국 정도로 볼 뿐이다. 이것은 매우 잘못되었으며 모순적이다.
그리고 백제의 대륙진출을 부정하는 자들이 제시하는 의문점이 또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백제의 대륙진출을 설명할 만한 제대로 된 유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물이 없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백제가 차지한 지역들은 수많은 국가들이 들어서던 곳이며 전쟁이 수없이 많이 일어나던 곳이었다. 게다가 중국인들은 중화사상 때문에 웬만하면 자신들의 문화가 아닌 이민족의 문화는 무시하고 천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백제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문화로 만든 일본과 달리 중국에서는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 백제의 유물이나 문화가 남아있기가 힘들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측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유물을 발굴하는 것을 제한시키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어떻게 고고학적 근거를 제시하라는 것인가?
내가 보기에는 이런 경우에는 발상을 반대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본다. 어렵게 중국에서 백제의 유물을 찾는 것 보다는 한반도에 있는 백제의 영역에서 중국의 유물들을 찾는 것이다. 백제가 대략 300년 정도는 대륙을 지배했으니 그럼 백제의 대륙영토를 통해 중국대륙에서 한반도로 중국의 문화가 전달되지 않았겠는가? 비슷한 예로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기 때에 일본이 우리를 침략하거나 지배하면서 우리의 유물이 일본으로 반출되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니 백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대륙을 지배하면서 대륙의 문물들이 한반도로 유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에 있는 백제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중국의 유물들을 백제의 대륙진출의 증거로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제 짚고 넘어갈 것도 다 짚고 넘어갔으니 대륙백제에 관한 지도를 보면서 이 글을 마치겠다.
올바른 한사군 지도
내가 백제의 대륙진출에 대해서 설명할때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닌 요서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이제부터 백제의 대륙영토를 보겠다. 참고로 여기서 요점은 백제의 대륙영토이기 때문에 한반도의 영토는 제외시켰다.
고이왕 시기의 백제의 대륙영토(서기 246년)
백제의 8대 고이왕은 서기 246년, 고구려와 합동 작전을 펼쳐 낙랑,대방을 습격하여 요서를 점령했다. 고이왕의 아들인 9대 책계왕 또한 고이왕의 뜻을 이어받아 대륙의 영토를 넓혔다.
분서왕 시기의 백제의 대륙영토(서기 304년)
백제의 10대 분서왕은 서기 304년, 낙랑군의 서쪽 현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동성왕 시기의 백제의 대륙영토(서기 490년경)
백제의 24대 동성왕은 북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영토를 넓혀 백제의 영광을 되찾았다. 동성왕은 낙랑,대방,조선,광양,광릉,청하,성양에 자신의 신하들을 태수로 봉해 다스렸다. 아마 이때 근초고왕의 영토를 되찾은 것으로 보인다.
위의 지도들은 다 내가 직접 그린 지도들이다. 근초고왕 시기의 영토는 어느 정도였는지 확실히 장담을 못하기 때문에 그리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를 드리자면 이 지도가 절대적으로 맞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길 바란다. 나는 이것보다 더 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드는데, 문헌을 바탕으로 객관적으로 검증을 하면서 그리다보니 이 정도 크기의 지도가 나왔다. 현재 부족한 기록들만 가지고 객관적으로 검증을 하면서 그린 지도인데도 제법 큰 영토인데, 기록이 풍부하다면 과연 어느 정도의 크기일까? 다음으로 김종서 박사가 그린 지도를 보자.
김종서 박사가 주장한 백제의 영토
이것은 김종서 박사가 주장한 백제의 영토이다. 내가 그린 지도와 비슷하지만 내가 그린 지도보다는 더 크다. 확실히 기존의 주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나는 이번에 백제의 대륙진출에 대해서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아마 내가 여태껏 쓴 글 중에서는 가장 길고, 다 쓰는데 걸리는 시간 또한 가장 길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여기서 백제의 대륙진출에 대해 인정받은 정사들만으로 매우 실증적이고 객관적으로 백제의 대륙진출이 사실이라는 것과 백제의 대륙영토가 대략 어디까지였는지를 밝혀냈다. 참고로 나는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닌 요서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백제의 대륙진출에 대해서 밝혀냈으니 이것을 반박하려면 괜히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한사군이 한반도에 없다는 나의 주장부터 반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간 주류 강단사학에서 백제는 지나치게 과소평가되었다. 나는 이번에 백제의 대륙진출에 대해 종합적으로 다루면서 바다 건너 대륙까지도 세력을 넓힌 백제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백제를 다시 봐야 할 때가 아닐까?
[출처] 내가 생각해본 백제의 대륙진출에 대한 총 정리 下 - 사서에 나오는 백제의 대륙에서의 활동|작성자 위궁
쾌창수 2013/10/10 21:19 답글 | 수정 | 삭제
실로 훌륭하십니다. 백제의 대륙 경략을 이렇게 입체적이고 종합적으로 밝히신 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한 가지 추가해 드리고 싶은 것은, 광개토대왕비문, 북사, 만주원류고 등등에 나오는 거발성(居拔城)이 백제의 대륙 영토의 거점이라는 사실입니다. 백제의 동서에 두 서울이 있는데 하나는 고마성(웅진)이고 또 하나는 거발성이라는 기록을 볼 때, 백제의 대륙 경략이 사실이므로 두 서울이 모두 반도에 있었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동서 2경이 각각 대륙과 반도에 하나씩 있었다고 하면 자연히 이해가 되지요. 더구나 만주원류고는 거발성을 곧바로 대륙의 진평성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396년 고구려가 백제를 칠 때 수군을 내었다는 점과 정벌 과정에서 거발성을 점령했다는 점으로 볼 때, 광개토대왕은 대륙 백제와 반도 백제를 동시에 정벌했고 그 과정에서 대륙 영토의 거점인 거발성도 점령한 것이 됩니다.
위궁 2013/10/11 12:30 답글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개마무사 2013/10/18 23:39 답글 | 수정 | 삭제
백제의 해외 영토가 언제쯤 사라졌는지 알 것 같습니다.
양서에서 502년에 고구려가 백제를 쳤다고 했죠? 이 기록의 진상이 환단고기 고구려국본기의 아래 기록일 것입니다.
‘백제는 군사를 일으켜 제 · 노 · 오 · 월 땅을 차지하였다. 문자왕 명치 11(502)년에 고구려가 제 · 노 · 오 · 월 땅을 평정했고, 12(503)년에는 요서와 진평을 빼앗아 백제군(百濟郡)을 없앴다.’
당시 산둥 반도, 장쑤 성, 저장 성까지가 동성왕 때 백제 땅이란 사실과도 일치하며, 삼국사기 동성왕 이후에 백제의 대륙에서의 활동 기록이 없음을 볼 때, 환단고기의 위 기록은 사실로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따라서 백제의 대륙 영토는 503년에 없어졌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바로 고구려가 없앤 것입니다. 또한 같은 고구려국본기에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밖에서 함께 경쟁하며 공존하였다.’
이는 서토를 칠 때 두 나라가 협력하였다는 위궁 님의 주장을 증명해 줍니다. 특히 이 주장은 환단고기 기록이 아니더라도 삼국사기에 책계왕 이전 고구려와 백제가 충돌한 기사가 전혀 없다는 근거만으로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