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일본 水谷悌二郞 원탁本과 대만의 傅斯年 소장본으로 판독해낸 결과입니다. 이 분야 종사하시는 분들께 작은 도움이나마 될까 싶어서 감히 공개합니다. 기본은 왕건군 판독문이지만 방점은 제가 두 개의 정탁본에서 볼 때 확연히 판독 가능했던 글씨입니다.
당시에는 일본의 武田行男이 출판했다는 `원석정탁본집성`을 구해볼 수가 없어서 판독이 벽에 부딛첬는데 그 책으로 조금만 더 보강하면 일본 참모본부 밀정 사까와가 삭제해버린 광개토대왕비문의 진실이 명백히 밝혀지리라 봅니다. 제 느낌은 간첩 사까와가 워낙에 허겁지겁 삭제하느라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또한 글짜 하나의 크기가 밥공기 만큼이나 커서 삭제하기도 힘들었나 봅니다. 정탁본을 유심히 보면 바탕 글짜가 눈에 떠오르는 그런 상태입니다. 비문을 보면 왜구는 고구려 관군한테 워낙 많이 참살되어 이 지구상에서 멸종되지 않았을까 염려스러울 지경입니다.
일도안사님 석문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이 정도의 판독을 하기까지 꼬박 2년의 기간을 매달렸읍니다. 가령 連船擧의 擧자는 원탁본에서 보면 마치 承자를 연상시키는데 이것 하나 찻는데도 몇달씩 실성한 사람처럼 심사숙고가 필요했었읍니다. 대부분의 글자가 30~70 % 정도만 남은 상태라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야 풀리는 퍼즐게임이었읍니다. 과거 130년 동안에 韓 中 日에서 그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던거라 처음엔 성공할 수 있을까 저 자신도 반신반의였죠. 공백자로 남은 50 글자의 미스테리를 끝까지 풀어내 보면 뭔가 굉장한 보물이 숨어있을 듯 했습니다. 1988경 이형구 교수님의 僞刻倭字考 논문을 보고나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사까와가 .....倭潰逃...라는 구절을 그냥 놔두다니 도데체 그 앞에는 무슨 내용이기에 무척이나 궁금했읍니다. 제 거주지는 호주입니다. 여기서 원탁본사진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데 요새 공개되었다는 靑溟本이 흥미롭군요. 水谷本이 부사년本 보다는 앞서 제작된 것입니다. 비면에 판독할 때헷갈리라고 해놓은 장난질이 적으니까요. 헌데 집중 결락 부분을 보면 애초에 대수롭지않게 생각한듯 모서리 끝부분까지 탁출하질않아서 이 부분 판독은 부사년本을 위주로 했읍니다.
일도안사님께 참고로 제가 생각해둔 후보글짜를 몇군데 소개합니다. 이것은 제3의 탁본을 보아야 확인가능한 것들입니다.
신라매금의 징징짜는 하소연과 약소국의 아부성 인질 외교. 백제는 왕제가 인질로 잡힌 탓인지 아신왕이 무릎 꿇은 이후에 아무런 군사 행동이 없는데 그 대신에 백제의 사주를 받은 倭가 등장하여 신라성에서 고구려 관군한테 포위공격을 받은 끝에 도망했다가 4년 뒤 14년 갑진에 대방계에 들어오려고 왜구 선발대가 石城 언저리에 얼씬거리며 대거 배타고 오니까(갑진왜란?) 호태왕이 평양 부근에 친정하시어 박살을 했다는 내용이겠죠. 17년 정미에는 아예 왜구를 박멸하시려고 가라路(제 석문에는 道가 아닌 분명 路입니다.)에서 관군으로 하여금 대거 인종청소를 하신게 아닌가 보여집니다.
비문의 1799 字 가운데 판독이 완전 불가능한 글자는 이제 10 개 미만으로 줄었는데 앞으로 남은 과제는 국사편찬위원회 같은데서 전문가 판독회라도 열어서 국가 역사의 公的 결론을 매듭지어야겠죠. 이미 현장의 실물조사는 무의미해졌읍니다. 왜냐면 그간의 탁본작업 등으로 인해 비면의 훼손은 엄청났으니까요. 원석정탁본은 발견 초기의 상태가 그대로 찍혀 있습니다. 중국에 가서 유리창 너머 실물을 보는 것도 좋지만 안방에서 탁본 연구하는 것이 성과면에서 더욱 유리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