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9 - 월간 대한사랑_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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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촉구하였다. 그의 노래 특징은 의병을 하려는 뜻과 의병이 나아갈 길을 간
단명료하게 전달하였고, 의병 활동을 막는 관군에게도 한 나라 백성, 형제간의
싸움처럼 애달픈 것이 없으니, 의병을 함께 하자고 권하는 내용이었다.
노래의 힘은 대단하다. 사람들을 한뜻으로 모이게 하고, 긍정적인 힘을 실어
준다. 노래를 부르면서 의병 돕기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모두 합심하게 되었다.
이제 의병이 동네에 찾아오면 누구나 밥을 해 주고, 도와주게 되었다. 그는 항일
활동을 하면서 총 8편의 의병가와 4편의 경고문을 남겼으며, 이는 최초의 한글
의병가이자 민족 저항 시가이다.
스스로 의병대를 조직해 항일 전선에 나서다
1907년 일제가 고종황제를 강제로 폐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자,
전국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시아버지 유홍석은 다시 궐기하여 의병 600명
을 모아 일본군과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이에 윤희순도 고흥 유씨 집안 부인들
과 인근 동네 여성 76명으로부터 군자금 355냥을 모아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놋
쇠와 구리를 사들이고 탄환, 유황 등으로 화승총에 쓸 화약을 직접 제작·공급하
는 탄약 제조소를 운영하였다.
또한 ‘남정네만 의병을 하면 무슨 수로 독립 하오리까?’라며 가정리 여성 30여
명을 규합하여 ‘안사람 의병단’을 결성하였다. 이들은 일본군과 직접 전투에 참
여하는 의병들의 취사와 세탁을 도맡아 하는 한편 직접 훈련에 참여하기도 했다.
윤희순은 남장하고 정보수집에 나서는 등 그야말로 전천후로 활약하였다.
국권이 피탈되어 만주로 망명하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시아버지는 크게 낙담하여 가족들과 자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후일을 기약하자며 만류하고, 먼
저 망명해 간 유인석과 합류하자고 하였다. 먼저 유홍석과 유제원이 만주로 떠
났다. 그런데 그다음 날 일본 경찰과 조선인 앞잡이들이 집으로 들이닥치며 시아
버지와 남편의 행방을 대라며 겁박하였다. 큰아들 돈상을 매질하면서 겁박하였
지만, 오히려 분노에 찬 목소리로 일경을 향해 호통을 치며, 끝까지 행방을 말하
지 않았다. 1911년 음력 4월 51살이 되는 윤희순은 아들 돈상, 민상, 교상 3형제
와 일가를 이끌고 시아버지와 남편의 뒤를 따라 만주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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