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61 - 월간 대한사랑_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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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0
선독립단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도 직접 의병 훈련에 참여하였다. 아울러
신빈 영릉에도 조선독립단 학교 분교를 두어 항일운동가 양성에 전력을 다하였
다. 조선독립단은 그의 후원 아래 큰아들 유돈상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한중연합
군 180여 명의 규모였다.
꿈을 이루지 못하고
그러나 1935년 6월 맏아들 돈상이 항일투쟁을 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유돈상은 1928년에 귀국하여 강원도 춘천, 충북 제천 등지에서 민족교육
을 실시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기도 하
였다. 1931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무순에서 독립단을 재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5년 일제의 급습으로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그해 7월 19일 42세를
일기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한 것일까? 식음을 전폐한 그는 맏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11일 뒤인 8월 1일 그 뒤를 따랐다. 그의 나이 만 일흔다섯, 정든 고향을 떠나 만
주로 망명한 지 24년째 되던 해이다.
의병장 윤희순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윤희순은 국내에서는 의병 투쟁을, 국권 피탈 후 만주로 망명하여서는 독립군
과 함께 30여 년간 항일투쟁을 벌였다. 여성 의병대를 조직하고 탄약 제조소를
운영하는 등 적극적 의병 투쟁을 하고, 여성들이 항일투쟁에 나서게 하는 계몽운
동에서 큰 역할을 하였고, 노래와 경고문을 지어 선무(宣撫) 활동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이런 윤희순에 대한 예우는 소홀해 보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그에게 건국훈장도 아닌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1990년 상훈법 개정으로 건
국훈장이 3개 등급인 대한민국장, 대통령장, 국민장에서 5개 등급인 대한민국
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확대 재조정되었는데, 이때도 최하등
급인 애족장을 받았다. 차후라도 올바른 예우가 이루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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