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6 - 월간 대한사랑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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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암살단
기산도(奇山度)와 암살단
호남의 유학자인 기산도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에 이기, 박인호 등 11
명과 함께 자강회를 만들고, 을사오적(이완용, 이근택,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을
제거하기로 했다. 그는 “우리가 역적을 죽여 사람들의 마음을 격동시키고,
국내 청년들에게 용기를 복돋우면 민족이 다시 일어날 기반을 세울 것이
다.”라고 하여 암살의 목적을 밝혔다. 조소앙 선생은 이 암살단을 한말 암
살당의 원조로 보았다. 후에 기산도는 오적 중 한 명인 이근택의 집을 습
격해서 상해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5년의 옥고를 치른 뒤 반신불수가 된
몸을 추스르며 떠돌이로 살다가, ‘유리언걸지사(流離焉乞之士: 떠돌이 거지지사)
기산도지묘(奇山度之墓)’란 나무 비 하나만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나철과 대종교
홍암 나철은 1863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마을에서 태어났
다. 유학자 집안 출신인 그는 서울로 올라와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김윤식
의 문인이 되었다. 이후 홍암은 1891년 과거에 급제해 승정원 가주서, 병
조정랑, 승문원 부정자 등 정부요직을 거쳤다. 스승이었던 김윤식이 제주
도에 유배를 가게 되자 그를 봉양하며 모셨는데, 이때 스승이 닦아놓은 국
내외 인맥을 그대로 소개 받았고, 온건개화사상과 외교독립론을 배웠다.
1902년 다시 서울로 올라온 홍암은 개혁성향의 유교지식인과 일본 유학
생 출신들을 많이 사귀게 되었다. 오기호, 이기, 홍필주, 이건, 정운복, 김
인식, 이회영 등 향후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이런 기반위에
1904년 유신회라는 민족운동단체를 만들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홍암은 본인이 배운 바대로 외교적인 방
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일본에 가서 유력인사들을 만났지만 허
사가 되었다. 1907년 홍암은 자신회(自新會)를 조직하였다. 정신을 개조하
여 새로운 사상과 사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들이 먼저 시작한 것은 을사
오적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매국대신 1명당 3명의 결사대를 배치하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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