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2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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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몽가, 장옥철 등이 고대 이후 새롭게 발견되는 문헌, 갑골문, 금문, 천문(天文)의 기록 등에 의거
연구하였지만 공화(共和) 원년 이전의 역사는 명료하게 밝힐 수가 없어 중국 5천년의 역사는 『천년
의 학술 현안(千古學案)』으로 남았다. 32)
그러나 2000년 11월 신화통신사는 서기전 841년에서 1200여 년 앞당기는 「하상주연표」를 발
표하였다. 이 연표에 의하면 중국 하(夏)나라는 서기전 2070년에 시작되었으며, 상(商)나라의 기
원은 1600년, 반경의 은(殷)으로 천도는 서기전 1300년, 주(周)의 등장은 1046년이었다. 이와 같
은 사업을 책임진 자는 수석과학자 이학근(李學勤)이었다. 33) 이학근의 학설을 읽어 보면‘고힐강
(顧頡剛)’이 제기했던 ‘고사부정론’자로 철저한 의고파(疑古派)다. 의고파는 상(商) 이전의 역사를
전부 부정하였다. 뛰어난 석학인 호적(胡適)도 고힐강이 하우(夏禹)를 가공의 신화인물로 간주하
여, 제기한 “층층이 이루어진 중국사”라는 견해를 ‘오늘날의 사학계의 일대 공헌’이라고 찬양하였
다. 34)
이 시기인 1925년에 왕국유(王國維)에 의해 ‘이중증거법’이 제기되었다. 35) 즉 고대사의 연구는
전래된 문헌학과 지하에서 출토된 고고학적 자료의 이중의 증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땅 속의
직접 사료인 고고학 자료는 간접 사료인 문헌사료로 인증해야 역사의 진위를 분석할 수 있다는 것
이다. 36) 이와 같은 ‘이중증거법’으로 증명된 중국의 역사는 하·상까지 올라갔지만 하(夏)의 우왕
이전의 역사는 고고학적 증거를 찾지 못했기에 해외 학자들은 대부분 의문을 품었다. 37)
이미 1세기 전에 ‘고사부정론’에 몰입된 중국학계의 학자들은 왕국유의 ‘이중증거법’에 근거하
여 ‘고사부정론’의 허점을 고고학적 연구로 보완하려는 학자들이 속출하였다. 이학근의 그 중의
한 명인 셈이다. 이학근은 이 ‘이중증거법’의 방법론이 중국 현대 고고학의 성립의 기틀을 다졌다
고 하였다. 38) 그러나 이학근은 평생을 고고학을 연구하였지만 그 역시 ‘고사부정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이학근이 평생 연구한 중국 청동기에 대한 비정 시기는 상(商) 시기가 한계였으며, 고사부정론의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중국학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하(夏)시기 이전으로 넘어가는 법이 없었
다. 이학근은 상(商) 나라 시대를 청동기 제작 공예가 가장 발전한 시기로 보았다. 청동기 발굴사상
가장 큰 규모인 ‘사모무방정(司母戊方鼎)’을 서기전 13세기의 商 무정(武丁) 시기의 ‘후모무(后母
戊)방정’으로 비정하였다. 39) ‘의고파(疑古派)인 이학근은 상(商) 이전의 역사를 부정하였기에 ‘사
32) 岳 南, 심규호·유소영 옮김,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 (일빛, 2005), 25쪽.
33) 岳 南, 위의 책, 25-26쪽.
34) 駱貧基, 김재섭 외 옮김, 『금문신고(金文新考)』上 , (한국금문학회, 2020), 43쪽.
35) 李學勤, 이유표 옮김,『의고시대를 걸어나오며』, (글항아리, 2019), 25쪽.
36) 弘의, 정우석 역,『이것이 중국의 역사이다』1, (애플북스, 2018), 26-27쪽.
37) 위의 책, 29쪽.
38) 이학근, 2019, 앞의 책, 25쪽.
39) 李學勤, 이유표 옮김, (금항아리, 2019). 62쪽. 이학근은 서기전 24세기 초의 帝禹시기의 ‘사모무(司母戊)방정’을
서기전 13세기 ‘武丁’시기의 ‘후모무(后母戊)방정’으로 보았다 ; 李學勤, 심재훈 옮김,『중국 청동기의 신비』, (학고재,
2005), 81-82쪽. : 李學勤의 저술에서, 청동기의 명문은 상대 중후기에 발달했다는 점과 요서 일대에서 발견된 청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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