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9 - 대한사랑 6호 특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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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출처: 안후상, 「보천교와 물산장려운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19, 1998.


                 가장 많은 항일항쟁을 펼친 보천교

                 1920~1940간의 조선일보 항일기사 색인을 검색해 보면 보천교(증산교 계열)의 항일기사 검색수가 타종교의 검색 숫자
                 를 다 합친 것보다 많이 나온다. 기사 중 54%를 차지할 정도로 격렬하게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이것은 보천교가 그 만
                 큼 일제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항일투쟁과 민족독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한규숙(보천교 북방주)의 말에 만일 이 일이 발각되면 곤란하므로 보천교를 내세우지

                     말고 개인적으로 한다고 말하고, 이춘배는 이 일은 절대 비밀로 하고 만일 도중에

                     체포되더라도 보천교 와의 관계는 말하지 않을 것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덧  조만식 심문조서











                 보천교가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못한 이유

                 우리가 보천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이유는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으려 한 것과 마찬가지로 항일운동을 위하여
                 보천교 신자들도 역시 자신들의 신분노출을 꺼렸기 때문이다. 보천교

                 의 항일운동 때문에 교주였던 차경석은 갑종요시찰인甲種要視察人이 되

                 어 일본인들의 1급 감시대상이 되었다.                                                             요시찰인명부

                                                                                       국통맥 특집 | 대한민국 임시정부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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