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4 - 대한사랑 6호 특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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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천교의 독립운동
참동학 보천교 바로 알기 동학 3백 만은 1894년 갑오동학혁명에서 30만 명이 학살을 당했
고, 일본 제국주의 총칼에 처참히 무너졌다. 동학이 이루지 못한 미
참동학 ‘후천 선仙’ 운동(1911년)
완의 혁명은 천도교와 보화普化(보천교)로 이어졌다. 나라를 잃은
➡ 보화로 개명(1921년)
암울한 시대에 방황하던 민중들은 천도교나 보화를 구심점으로 뭉
쳐나갔다. 천도교는 3·1 만세 운동을 이끌었고 보화는 식민지 민중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켰
고, 국권 회복을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하였다. 독립자금을 지원하였고 비밀 결사적 조직운동을
펼쳤고,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상해 임시정부로 거액의 독립군자금을 지원한 사령
탑이 정읍 대흥리에 보화의 본부인 것을 알고 난 뒤, 조선총독부에 정식 등록을 하면 적극 도와주
겠다는 거짓 유혹을 해왔고, 보화는 1921년 보천교로 등록했다. 그러나 일제는 보천교를 철저하
게 유사종교 단체로 규정하고 탄압
했다. 이후 철저한 탄압과 왜곡 조
작으로 차경석 교주가 세상을 떠나
자 보천교 건물을 경매에 붙였다.
그 중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궁전
인 십일전을 뜯어 현재 한국 불교
조계종의 총본산인 조계사(종로 2
가 소재)의 대웅전을 지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교단 차원에서
창씨개명과 친일노선을 공식화한
불교, 기독교만을 공인종교라 하여
인정했고 그 외에 항일 민족단체들
은 유사종교라 하였고 특히 보천교
는 유례 없는 “보천교신법”까지 만
들어 탄압했다.
조선의 유사종교 지도
빨간 점은 천도교이고 검은 점은 보천교이다. 그러나
당시 천도교보다 더 많은 지역으로 전국적으로 퍼진
보천교를 지금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이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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