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5 - 대한사랑 6호 특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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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보천교는 신도수가 조선총독부 통계와 미국 국무성 공식기록(밀러 총영사 <조선보고서>,
1925년)에 의하면 600만 명이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902만 명임을 감안하면 3명
6~7백만의 보천교
중에 1명이 보천교를 믿고 태을주를 외웠으니 그 교세가 실로 엄청났다.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군자금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요인들의 환국 때 김구 주석은
“우리는 전라도 정읍 보천교에 많은 빚을 졌다”라고 말했다.
비서실장 조경한의 증언에 의하면 백범은 보천교의 지원에
대한 감사의 뜻을 자주 밝혔다고 한다.
어려웠던 시절 상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군자금을 정읍의
보천교에서 수차례에 걸쳐서 보냈던 것이다. 1924년에 김좌
진 장군 부대에 2만원과 5만원, 두차례 지원했는데 지금 돈
으로 수십억에 해당한다. 이는 당시 군정부 신민부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재정이었다고 추정된다. 1925년에는 조만식과
박자혜(신채호의 처) 등이 관련된 임정 정의부에 거금을 보내
기도 하였다.
국통맥 특집 | 대한민국 임시정부 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