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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백제유민
김성호,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제1부에서 많은 부분을 인용함
왕건의 증조부는 753년 패강(浿江)의 서쪽 나루터에 와서, 배 안에서 돈을 꺼내어 뿌리고 상륙하였다. 『고려사』 「고려세계」 唐肅宗皇帝潛邸時, 欲遍遊山川, 以明皇天寶十二載癸巳春, 涉海到浿江西浦. 方潮退, 江渚泥淖, 從官取舟中錢, 布之, 乃登岸. 後名其浦爲錢浦
그는 왕건의 증조모에게 자신이 당나라의 귀인이라 말하고 떠나갔다. 『고려사』 「고려세계」 我是大唐貴姓
당귀인이 당나라에서 왔으며 배에 돈을 싣고 다녔다는 것은 그가 중국 동해안에 근거지를 둔 백제유민 무역상임을 의미한다. 김성호,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1』, 맑은소리, 1996. 214쪽.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감』과 『편년강목』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왕건의 증조부를 당 숙종이나 선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성호, 위 책, 214-217쪽.
왕건의 조부가 唐父를 만나러 상선(商船)에 의탁하여 바다로 갔으며, 『고려사』 「고려세계」 問母曰, ‘我父誰?’ 曰 ‘唐父.’ 盖未知其名故耳. --- 欲覲父, 寄商船, 行至海中,
왕건 집안의 근거지가 예성강변의 개성이었고, 왕건은 903년 수군으로 나주를 점령하였고, 『고려사』 「태조총서」 天復三年癸亥 三月 率舟師, 自西海抵光州界, 攻錦城郡拔之, 擊取十餘郡縣. 仍改錦城爲羅州, 分軍戍之而還.
909년에는 견훤이 오월국으로 보내는 배를 사로잡았고, 『고려사』 「태조총서」 獲萱遣入吳越船而還, 裔喜甚, 優加褒獎
909년 진도를 점령하였고, 『고려사』 「태조총서」 又使太祖修戰艦于貞州, 以閼粲宗希·金言等副之, 領兵二千五百, 往擊光州珍島郡. 拔之, 進次皐夷島, 城中人望見軍容嚴整, 不戰而降.
912년 덕진포에서 대승하였다. 『고려사』 「태조총서」 及至羅州浦口, 萱親率兵列戰艦, 自木浦至德眞浦, 首尾相銜, 水陸縱橫, 兵勢甚盛. 諸將患之, 太祖曰, “勿憂也. 師克在和, 不在衆.” 乃進軍急擊, 敵船稍却. 乘風縱火, 燒溺者大半, 斬獲五百餘級, 萱以小舸遁歸.
『삼국사』 「견훤열전」 乹化二秊, 萱與弓裔戰于徳津浦.
이러한 사실로 보아 왕건은 중국 동해안의 백제유민을 조상으로 하는 해상세력이었다고 추단할 수 있다.
후당은 왕건이 장회무족이고 창해웅번이라 한다. 『고려사』 태조 16년(933년) 3월 5일, 卿, 長淮茂族, 漲海雄蕃, 以文武之才, 控玆土宇, 以忠孝之節, 來禀化風.
장회무족은 양자강과 회수의 백제유민을 의미한다. 김성호, 위 책, 225쪽.
북송도 성종 책봉 시 “늘 백제(百濟)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길이 장회(長淮)의 겨레를 무성하게 하라.”라고 한다. 『고려사』 성종(985년) 4년 5월, 常安百濟之民, 永茂長淮之族.
북송이 고려의 국호를 모르거나 고려가 후백제와 싸웠던 것을 모르고, 백제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고 할 리는 없다. 고려왕의 혈통이 백제유민에서 비롯된 것임을 당시에는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외교문서에 백제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고 한 것이다.
고려는 이들 백제유민 무역상에게 항구를 개방하여 자유무역을 하였다. 현종 원년(1010년)에 거란의 침공으로 궁궐과 왕실문적이 소실됨에 따라 100년간의 기록이 망실되었는데, 그 이후인 현종 3년(1012)부터 충렬왕 4년(1278년)까지 약 260년 동안 송상(宋商)들이 125 차례 고려를 왕래하였다. 김성호, 위 책, 229쪽.
송상은 백제유민이다. 125회의 내왕 건수 중 초기의 20회 가량에 대하여는 이들의 출신지가 기입되어 있는데, 복건인(福建人) 10회, 절강인(浙江人)이 6회, 광동인(廣東人)이 3회, 강소인(江蘇人)이 1회이다. 김성호, 위 책, 239쪽.
이들 지역은 모두 과거 백제 영토였고, 당시 백제유민의 활동 영역이다.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 제197책 번이 정화 8년(1118년) 5월 15일조에 “명주태수(知明州) 누이(樓异)가 조칙에 따라 고려좌선(高麗坐船) 100척을 건조토록 조치하여 방금 공정을 필하였으며, 고려인 강수(綱首: 선장)와 소공(梳工: 키잡이)에게 매월 곡식 1석 2두를 지급토록 계약을 체결하였다.”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명주가 주산군도 건너편이고, 배를 고려좌선이라 하였고, 선장과 키잡이를 모두 고려인이라 하고 있어, 백제유민의 해상활동이 북송 시에도 계속 유지된 것이 확인된다. 김성호, 위 책, 230쪽.
중국인은 백제유민을, 한반도가 신라였을 때는 신라인, 고려였을 때는 고려인이라고 불렀다. 이는 중국인들이 백제유민이 조선인임을 명확히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려는 이들 백제유민 무역상을 위해 객관을 설치하였고 김성호, 위 책, 229쪽.
1034년부터는 팔관회에도 참석시켰다. 고려의 팔관회는 국토신앙이 관련된 의식으로, 백제유민의 참석은 고려왕에 대한 신하로서의 배알이었다. 김성호, 위 책, 232쪽.
이들은 고려로 이주하기도 하였다. 『송사』는 “명주 정해현(定海縣)에서 고려로 달아났던 백성 약 80명이 환국을 원한다고 보고하였다. 도착하는 날을 기다려 고려선장 탁영 등에게 헤아려 보상하라고 하였다”라고 한다. 『송사』 권487 「고려전」 소흥 2년(1132년) 閏四月, 定海縣言 民亡入高麗者約八十人,願奉表還國。詔候到日,高麗綱首卓榮等 量與推恩。
고려로 왔던 극히 일부가 돌아갔을 것인데, 그 숫자가 80명이라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고려로 왔음을 의미한다. 고려는 유능한 백제유민을 정책적으로 이주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송사』의 “王城에는 중국 사람이 수백 명 있었는데, 장사하기 위해 배타고 간 민(閩, 복건성 지역) 지방 사람들이 많았다. 高麗는 비밀리에 그들의 재능을 시험해 보고 벼슬을 주어 유혹하거나 강제로 체류시켜 일생을 마치도록 하기도 하였다. 朝廷에서 사신이 갔을 적에 첩(牒)을 올려 하소연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귀국시켰다.”라는 『송사』 권487 「고려전」, 王城有華人數百,多閩人因賈舶至者,密試其所能,誘以祿仕,或強留之終身,朝廷使至,有陳牒來訴者,則取以歸。
기사로 확인된다.
고려청자의 발생은 분명 중국 오대 월주요의 기술을 습득한 것이라 하는데 (우리역사넷) 이는 백제유민이 가장 많이 살았던 주산군도 등 절강성 북부에서 백제유민들이 고려로 귀화하였기 때문이다. 즉 고려청자는 백제유민이 고려로 이주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얼마나 많은 백제유민들이 이주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한국인의 족보」(1981)와 중앙일보사가 간행한 「성씨의 고향」(1989)에 수록된 260 성씨 800여 본관 중 59 성씨 90 본관의 시조가 고려 때 중국에서 이주해 와서 고려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았다고 하며, 고려 때부터 중국 성씨제와 족보제가 보편화되었다 하므로, 대규모의 이주가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김성호, 위 책, 240-241쪽.
고려가 자유무역을 한 이유는 왕건이 백제유민이었다는 결정적 증거이다. 왕건이 고려의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백제유민들이 고려로 이주했다. 자유무역이나 대규모 이주를 설명해줄 다른 이유는 없다. 이것이 후당과 북송이 장회를 언급한 이유이다.
중국유사사학은 장회무족을 근거로 고려가 漢족이 세운 나라라 하지만, 당시 중국에서도 백제유민을 신라 때는 신라인, 고려 때는 고려인이라 하여, 백제유민이 漢족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강단유사사학은 중국유사사학에 대항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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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의 오영선 학예사는 "우리 역사기록에 대한 검토없이 중국인이 한화(漢化)해서 쓴 책봉조서를 두고 왕건이 한인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왕건의 선계(先系)는 고려사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전한다. 고려세계에 나타난 왕건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호경-강충-보육-진의(여)-작제건-용건-왕건 순으로 이어진다.
고려세계 어느 구절에도 왕건 가문이 중국에서 왔다는 구절은 전하지 않는다. 예성강 유역의 호족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훗날 왕륭으로 불리는 용건을 제외하면 성도 없는 것으로 추정되는 보잘 것 없는 집안이다.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1367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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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실은 동이족 중 명문거족” 반론
그런 점에서 왕건의 출신을 ‘장회무족’이라 한 구절은 새롭게 해석할 근거를 얻게 된다. 가장 권위 있는 해석은 다음과 같다. “회수(淮水)라는 이름은 회이(淮夷)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회이는 동이족(東夷族) 가운데 가장 저명한 족속이다. ‘장회무족’은 고려왕실이 동이족 가운데 명문거족이라는 뜻이다.” (김상기, 『역주 고려사』, 동아대).
중국 황하 상류 지역에서 일어난 동이족은 기원전 12세기 무렵 주나라와 항쟁하면서 점차 하류 지역으로 내려온다. 동남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한 동이족은 한(韓)·예(濊)·맥(貊)족으로 갈린다. 산둥 반도 쪽으로 이동한 동이족은 우이(嵎夷:청주(靑州)지역, 동부연안), 내이(萊夷:등주 지방), 회이(淮夷:강소성 양주(楊州) 일대, 회수 유역에서 산동성의 동남부 지역), 서융(西戎:서주(徐州)를 중심으로 한 노(魯)의 동남지역)이 된다. 특히 회이와 서융은 서주와 춘추시대 한족(漢族)과 대립하면서 그 세력이 약화돼 전국시대에는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서융은 기원전 515년에 오(吳)나라에 망한다. 이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동이족은 한족(漢族) 사이에 분산 배치되면서, 중국 대륙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김상기, 『동이와 회이, 서융에 대하여』1954).
https://www.joongang.co.kr/article/11289956#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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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에서는 왕건 집안이 미천한 성도 없는 가계의 사람이었다고 하고(오영선)
한쪽에서는 동이족이 황하 상류 높은 산이나 사막에서 기원한 원시부족이 중국을 지나서 만주와 한반도로 이주한 민족이라 한다. (김상기)
오영선의 견해는 잘 모르겠다는 것으로 중제유사사학에 대한 반론이 되지 않는다. 고려사에 중국에서 왔다는 기록이 없는 것은 고려를 다스리기 위해 필요한 내용이 아니라 생각하여 기술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따라서 이를 근거로 책봉조서라는 공식 외교문서에 기록된 사실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상기 등 강단유사사학은 동이족이 중국 동북부 황하 상류등 사람이 많이 살 수 없었던 어떤 곳을 동이족의 기원지로 주장하는데, 이는 소위 환빠들의 파미르기원설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의 유사사학에 불과하다. [동이족의 기원지는 한반도이다 (신용하, 석회암동국이 한반도에 밀집되어 마지막 빙하기 이후 한반도는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 동이족은 한반도에서 기원하여 요하문명 지역으로 이주하고, 요동반도에서 산동반도를 통해 중국 동부로 이주하였다. 그래서 동이가 된 것이다. ] 이들의 주장은 근거가 없으므로 중국의 주장에 맞설 수 없다.
어떻든 백제유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강단유사사학에 의하면, 고려까지 중국의 지방정부였다는 동북공정에 대항할 수 없다. 일제소설을 위해서라면 고려까지도 팔아먹는 그들의 일제를 향한 충절에 그 누가 감동하지 않으리.
[한 상고사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