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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설치 위치는 왕검성이 아닌 원래 한나라 영토

1. 사료 

『사기』 「조선열전」

朝鮮王滿者,故燕人也。自始全燕時 嘗略屬真番朝鮮, 為置吏築鄣塞。秦滅燕,屬遼東外徼。漢興,為其遠難守,復修遼東故塞,至浿水為界,屬燕

[朝鮮王 滿은 옛날 燕나라 사람이다. 전 연의 시기에 진정(自) 처음(始)으로, 진번조선을 침략하여 속하게 함을 경험하였다.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으려 하였다. 秦이 燕을 멸한 뒤에는 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러 경계로 하고 燕에 소속시켰다.]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燕王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들어가자 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千餘人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도망하여 秦의 옛 空地인 上下鄣에 살았다.]

『한서』 「지리지」 樂浪郡,武帝元封三年開。莽曰樂鮮。屬幽州。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有雲鄣。

[낙랑군, 무제 원봉 3년(서기전 108년) 열었다. 왕망은 낙선이라 했다. 유주에 속한다. 호는 62,812, 인구는 406,748명이다. 높은 장새가 있다]

『사기』 「흉노열전」

其冬,匈奴數入盜邊,漁陽尤甚。漢使將軍韓安國屯漁陽備胡。

[그해 겨울, 흉노는 자주 변경으로 들어와 약탈했는데 어양군의 피해가 심하였다. 그래서 漢은 한안국을 어양에 주둔시켜 흉노에 대비했다]

漢使博望侯及李將軍廣出右北平,擊匈奴左賢王

[漢은 박망후와 장군 이광으로 하여금 우북평에서 나가 흉노의 좌현왕을 공격하게 했다]

其明年,匈奴入右北平、定襄各數萬騎,殺略千餘人而去。

[그 다음 해, 흉노가 수만 기병으로 우북평과 정양을 침범하여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2. 사료의 합리적 해석

연나라가 진번조선을 침략하였고, 진나라가 연나라를 멸한 뒤에는 연나라의 점령지를 요동외요에 속하게 했는데, 한나라가 들어선 후 그곳이 멀고 지키기 어려워 원래 연나라의 요동고새를 수리하고 요동고새 밖의 패수를 조선과의 경계로 하였다. 위만은 패수를 건너 자리잡았으므로 소위 위만조선의 영토는 漢나라 영토가 아님은 당연하다. 위만의 정착지가 상하장인 것은 요동고새와 요동외요 사이에 있는 땅이기 때문이다.

흉노는 변경을 약탈했는데, 흉노가 약탈한 어양과 우북평은 요동고새와 패수 사이로 추정된다. 그런데 낙랑군에는 장새가 있다. 낙랑군에 있는 장새가 요동외요일 수도 있지만, 漢이 요동외요를 활용하지 않고 요동고새로 후퇴하였다는 것은 요동외요가 요새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왕검성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주민을 이주시키면서 왕검성보다 더 먼 곳으로 보내기는 어렵다. 먼 곳에는 원래의 漢나라 주민을 보내고 점령한 곳의 주민은 원래의 漢나라 영토로 이주시켜야 통제가 실효적이다. 따라서 낙랑군의 장새는 요동고새이고 낙랑군은 원래의 漢 영토에 설치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秦도 회수와 사수의 조선인들을 이주시켰는데(『후한서』 「동이열전」 秦幷六國, 其淮·泗夷皆散爲民戶.) 이러한 이주정책은 토착세력을 약화시켜 점령지를 실효지배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낙랑군에도 패수가 있는데 이는 조한의 국경이었던 패수와는 다른 강이다. 조선인들은 거주지 주변에 흐르는 강을 패수라 하였으므로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낙랑군으로 흐르는 강을 조선인들이 패수라 하였을 것이다.

3. 강단유사사학의 똥설

강단유사사학은 아무 근거없이 왕검성 등 소위 위만조선(예맥조선)의 영토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예맥조선이 망하면서 낙랑군이 설치되었으므로 당연히 예맥조선의 영토에 설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에만 근거한다.

4.

조선인들은 도시 옆의 강을 패수라고 하였다. 왕검성을 흐르는 강도 패수이고, 낙랑군을 흐르는 강도 패수이고, 고구려의 평양을 흐르는 강도 패수이다. 중국인들은 패수 옆의 도시가 漢나라가 정복한 예맥조선의 왕검성(漢의 낙랑군)이므로 고구려의 평양은 漢나라의 영토였다고 주장하며 고구려를 정복하려 하였다. 즉 왕검성=낙랑군은 중국인들의 오해와 침략의 명분으로 만들어진,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한, 무지의 산물일 뿐이다.

예맥조선의 왕검성은 북경 동남쪽의 낙방시로 추정되고, 고구려의 평양은 요양이고, (한 상고사 참조) 지금의 평양은 한반도 내에 있다. 왕검성에 낙랑군이 설치되었다 가정하더라도, 한반도의 평양과, 漢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강단유사사학은 일제 중제 똥을 처먹으면서, 패수와 평양의 이름이 같다고 같은 곳을 의미한다는 전근대적 무식을 근거로, 한반도의 평양이 예맥조선의 왕검성이고 중국 왕조의 낙랑군이었다는 똥가루를 뿌리고 다닌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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