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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퉁 고조선인 위만조선의 영토가 수천리인가?
■ 1) 위만조선이 사방 수천리의 큰 영토를 가졌다는 것은 뻥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에
위만이 작은 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땅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라고 되어 있으나
수천리 큰 나라들을 항복시키면, 작은 읍들은 항복할 수 있어도 작은 읍이 항복했다고 수천리의 큰나라가 항복하기는 어렵기에 작은 읍들을 항복시켰으니 진번 임둔도 작은 읍일 것이니,
위만 조선의 영토 수천리는 뻥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2) 고대 중국 사서 위만 조선 기록
한사군 설치 당시인 BC 100년경의 기록인 사마천 사기 조선 열전에는
위만이 왕험성을 탈취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서기 약 300년에 작성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위만이 조선에 와서 왕 되었다는 기록만 있고요
서기 450년 경에 작성된 후한서 동이열전에
위만이 기자조선 준을 깨트리고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으니
삼국지와 후한서 기록은 맞다고 볼 수 없고 중국 후대 사학자가 부풀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에
위만이 왕험성을 탈취했다는 것은 중국의 춘추필법으로 가장된 것으로 저는 봅니다
서기 450년 경의 동이열전
--> 그 뒤 40여世를 지나 朝鮮侯 準에 이르러 스스로 王이라 칭하였다. 漢初의 대혼란기에 燕·齊·趙나라 사람으로서 그 지역으로 피난간 사람이 수만명이나 되었는데, 연나라 사람 衛滿은 準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스스로 朝鮮의 왕이 되어 나라가 손자 右渠에게까지 전하여졌다.
서기 300년 경의 삼국지 위서동이전
--> 연나라 사람 衛滿이 북상투를 하고(魋結), 오랑캐의 복장으로 [조선에] 와 그 王이 되었다.
[朝鮮]侯 準이 참람되이 王이라 일컫다가 燕나라에서 亡命한 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魏略: 秦나라가 天下를 통일한 뒤, 蒙恬을 시켜서 長城을 쌓게 하여 遼東에까지 이르렀다.
이때에 朝鮮王 否가 王이 되었는데, 秦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한 나머지 政略상 秦나라에 服屬은 하였으나 朝會에는 나가지 않았다. 否가 죽고 그 아들 準이 즉위하였다.
그 뒤 20여년이 지나 [중국에서] 陳[勝]과 項[羽]가 起兵하여 天下가 어지러워지자, 燕·齊·趙의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차츰 차츰 準에게 亡命하므로, 準은 이들을 서부 지역에 거주하게 하였다.
漢나라 때에 이르러 盧綰으로 燕王을 삼으니, 朝鮮과 燕은 浿水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盧]綰이 [漢을] 배반하고 匈奴로 도망간 뒤, 燕나라 사람 衛滿도 亡命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東쪽으로 浿水를 건너 準에게 항복하였다. [衛滿]이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 주면 中國의 亡命者를 거두어 朝鮮의 藩屏이 되겠다고 準을 설득하였다. 準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博士에 임명하고 圭를 下賜하며, 百里의 땅을 封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準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王宮]에 들어가 宿衛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準을 공격하였다. 準은 滿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準王]은 그의 近臣과 宮人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韓王이라 칭하였다.
BC 100년 경의 사마천 사기 조선열전
-->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배반하여 흉노(匈奴)로 들어가자 위만도 망명하여
무리 천여 명을 모아 상투를 틀고 만이(蠻夷)의 옷을 입고는 동쪽으로 달아나 변경을 나와
패수를 건너 진(秦)나라의 옛 비어 있는 땅 상하장(上下鄣)에 거주하면서
점차 진번과 조선의 만이와 옛 연나라와 제(齊)나라의 망명자들을 복속시켜 그들의 왕이 되어 왕험(王險)을 도읍으로 정했다.
마침 효혜(孝惠)황제와 고후(高后) 때에 이르러 천하가 비로소 안정을 찾자
요동 태수가 위만이 한나라 조정의 외신(外臣)이 될 것을 약속받고
요새 밖의 만이(蠻夷)를 보호하게 하고 변방을 노략질하지 않도록 할 것이며,
만이의 군장들이 한나라로 들어와 천자를 알현하고자 하면 금지하지 못하게 했다.
이를 보고하니 황제가 허락했고, 이로써 위만은 그 땅의 군대의 위세와 재물을 얻어 부근의 작은 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임둔(臨屯)이 모두 와서 복속하여 그 땅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
■3) 그러면 위만 조선에 대한 진실은 무엇인가?
>>> 가설 하나
진번조선이 기자조선이고 진번조선의 도성이 왕험성일 수는 있겠지요
연나라 진개에 의해 진번조선이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의 땅을 모두 잃어 버리고
현 정도가 진번조선 영토였고 왕험성이 도성이었는데
위만에게 현 정도 크기의 진번조선과 왕험성을 빼았겼다고 이해하면 문헌 해석이 가능 할 수도 있겠지요
>>> 또하나 가설은
위만조선 동쪽에 있었던 창주시의 예 즉 예맥조선이 기자조선일 수 있습니다
위만이 형수시 무강현에 위만조선을 세웠고
위만조선 동쪽인 창주시에 있었던 예맥조선과 전투했는데 예맥조선(기자조선)왕인 준왕이 패하였고 패한 준왕은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창주시에 남아 있던 예맥조선 백성들이 임금에 남여를 세우고 예를 계속 존속시켰다
(위만조선 과 예맥조선 사이는 그 당시 대요하라는 큰 강인 지금의 부양하가 있었기에
전쟁에서는 이겼다고 하더라도 위만이 창주시의 예땅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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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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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 조선(짝퉁 고조선), 진번조선, 예맥조선, 기자조선 당시의
고조선은 동호인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입니다
따라서 동호인 북부여의 제후국들이
위만 조선(짝퉁 고조선), 진번조선, 예맥조선, 기자조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