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
[한글날 특집] 자방고전字倣古篆: 훈민정음 창제의 미스터리
# [한글날 특집] 자방고전字倣古篆: 훈민정음 창제의 미스터리
훈민정음이 반포될 때(1446년 음9.10)쯤 서양에서도 뜻깊은 일이 있었다. 1456년 8월 24일 쿠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통해서 성경을 출판한 것이다. 금속활자를 통한 성경출판의 문명사적 의미는 성직자들만이 공유되던 신의 말씀이 대중에게로 확산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수직적 구조의 사회가 수평적 구조의 사회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도 이와 같은 궤를 갖고 있다. 일부 양반에게만 공유되었던 학문 지식들이 ‘언문’의 한글로 일반평민에게 확대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글은 시민사회의 발판을 놓았다. 더 나아가 임금의 권위를 높인 업적이기도 하다.
오늘은 한글 창제의 과정에서 일어난 역사적 과정을 한번 살펴볼까 한다.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무無'에서 뚝딱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한글날 창제의 역사과정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가지 미스테리가 있다. 그러한 내용에 대한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가지 자료가 있다.
①자방고전
훈민정음 창제의 미스터리는 단순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이렇게나 위대한 문자를 어떻게 세종개인이 창조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단서는 이 짧은 네 개의 한자에서 찾을 수있다.
‘字倣古篆(자방고전)’(옛날 전서에서 모방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훈민정음의 시작을 찾을 수 있겠다. 전서는 한자의 서체 중 하나를 지칭한다. 그러나 한자는 표의문자(뜻글자)이기에 표음문자(소리글자)인 한글의 모체가 되기에는 불가능하다. 그럼 이 ‘篆’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② 세종의 스승이었던 행촌 이암의 손자: 용헌容軒 이원李原
용헌 이원이원은 정몽주의 제자로서 세종 당시 좌의정을 지냈고 세종의 스승이었다. 이원은 고성 이씨로 『단군세기』의 저자 행촌 이암의 손자이다. 책읽기를 즐겨했던 세종에게 이원이 『단군세기』를 전해주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세종의 아버지였던 태종도 『삼성기전하』의 저자였던 원천석이 스승(https://mnews.joins.com/article/23879699#home ‘시조가 있는 아침 (39) 회고가(懷古歌)’ 중앙일보 2020.09.24.)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환단의 역사를 전해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원천석은 『삼성기』의 주를 달며 ‘문자’에 대한 언급을 한다.
想必桓檀上世(상필환단상세)에 必有文字摸刻也(필유문자모각야)라
생각컨대 필시 환단의 상고시절에 문자를 본떠서 새기는 방법이 있었으리라.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열 때 하필 이름을 ‘조선’으로 했을까? 태조, 태종, 세종 모두는 환단의 역사와 관계를 맺었을 수 있다. 태조로부터 문종 심지어 훈민정음의 교정을 보았던 수양대군인 세조까지 환단의 역사를 알았을 것이다.
<세계환단학회 공동춘계학술대회 훈민정음의 비밀 ‘이맥의 태백일사와 훈민정음’ 2018.5.31>
③ 환단고기에 실린 가림토
단군조선이 열린지 3대가 지난후 3세 가륵단군은 삼랑 을보륵에게 문자를 짓기를 명하신다. 각 족속으로 나뉘어진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이다. 진시황도 진나라를 열고 나라를 통일하고자 ‘전서’체를 만들었다. 사투리 등을 정의공주를 시켜서 세세히 살펴보았던 세종의 모습을 보아도 세종은 훈민정음을 통하여 국민 대통합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인다.
庚子二年(경자이년)이라
재위 2년 경자(BCE2181)년,
時俗(시속)이 尙不一(상불일)하고 方言(방언)이 相殊(상수)하야
이 때 풍속이 일치하지 않고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달랐다.
雖有象形表意之眞書(수유상형표의지진서)나 十家之邑(십가지읍)이 語多不通(어다불통)하고
비록 상형 표의 문자인 진서가 있어도 열 가구 정도 모인 마을에서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 많고
百里之國백리지국이 字難相解(자난상해)라.
땅이 백 리가 되는 나라에서는 서로 문자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단군세기』 <3세 가륵단군조>
④ 가림토와 비슷한 모습을 가진 신대문자
우리 고대 모습의 박물관은 가까운 나라 일본이다. 도래인의 역사라 그런지 일본인의 역사에는 우리의 옛 모습의 자취가 남아있다. 우리는 고조선시기부터 일본에 문물을 전해주었다. 그도 그럴듯이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대한민국의 고대사에 관심을 갖는다. 『환단고기』가 국내가 아닌 일본에서 먼저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의 고대사에서 자신들의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반대로 한국의 옛 모습의 자취는 일본에서 만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神代文字신대문자이다. ‘신이 내려준 문자’라 하는데 한글과 매우 유사하다. 그들 신화의 모티브는 우리나라인데(광주, 부경대 환단고기 북콘서트 참조)이 이 고대문자를 신대문자라고 하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다.
신대문자를 다룰 때 주의할 점은 일본인들이 역으로 신대문자를 한글의 뿌리로 볼려는 불의한 언동이다. 그래서인지 국내학계에서는 신대문자를 언급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괜히 긁어부스럼 만들지 말자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신대문자를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구더기 무섭다고 장 안 담그는 것과 같다. 신대문자는 한글의 모체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KBS1TV 특파원 현장보고 “일본이 섬기는 ’신의 문자‘ 한글”. 2013.6.15.방영>
➄ 또 다른 고대 문자의 흔적: 첨수도
바다 넘어 일본과 마찬가지로 대륙의 인접국인 중국에서도 한글의 고대문자의 흔적을 살펴보는 것이 가능하다. ‘첨수도尖首刀’라하는 돈 역할을 했던 일종의 칼에서 문자들이 보이는데 놀랍게도 고조선시기 가림토와 유사한 문자들이다. 중국인들은 이 첨수도를 사용했던 적족이 자신들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첨수도의 출현은 가림토의 증거를 밝히는 매우 중요한 단서이다.
<2019.12.6. 세계환단학회 추계학술대회 “고대 화폐 첨수도에 나타난 ‘원시형태 한글’의 이해” 이찬구 겨레얼 살리기 운동본부>
➅ 훈민정음에 나타난 철학적 사유: 천지인 삼재와 오행의 이치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본』 출현으로 훈민정음의 가치는 한 단계 높아졌다.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에 천문과 하도 낙서 등, 동양철학의 정수가 모아져있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천·지·인 三才삼재와 오행의 이치가 서로 교합을 하여 최고의 문자가 만들어졌다. ‘古篆’의 발전적 성장을 이룬 것이다.
https://youtu.be/gHXa1M7z1fo <훈민정음 창제원리와 동양 천문도와의 상관성 1강>
https://youtu.be/o7tPeAX8obw <훈민정음 창제원리와 동양 천문도와의 상관성 2강>
https://youtu.be/RpCBi1By1Rc <훈민정음 해례에 담긴 천지인 삼재와 하도 상수학>
https://youtu.be/JDClHReNujY <훈민정음과 가림토의 연관성 고찰>
환단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민족의 문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신시(녹서), 자부선생(우서), 치우천황(화서), 복희(용서), 단군(신전), 왕문(부예). 중국 진나라의 해서를 지은 왕차중은 바로 부여사람 왕문의 먼 후손이다. 모두 배달 신시 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법이다.
『留記(유기)』에 云(운)
유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神劃(신획)이 曾在太白山靑岩之壁(증재태백산청암지벽)하야 其形如(기형여)ㄱ하니
신령한 글자 획이 일찍이 태백산의 푸른 암벽에 새겨져 있었는데, 그 형태가 ‘ㄱ’자오 같다.
世稱神誌仙人所傳也(세칭신지선인소전야)라 或者(혹자)가 以是(이시)로 爲造字之始(위조자지시)하니
세상에서는 이것을 신지 선인이 전한 것이라 하고, 혹자는 이것을 문자의 기원으로 삼는다.
則其劃(즉기획)이 直一曲二之形(직일곡이지형)이오 其義(기의)는 有管制之象(유관제지상)이오
그 획이 곧게 나가서 굽은 형으로 관제하는 뜻이 있으며,
其形其聲(기형기성)은 又似出於計意然者也(우사출어계의연자야)라.
그 형태와 소리는 어떤 의도된 뜻에서 나온 것 같다.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세종은 ‘意然者’를 밝혀내었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는 배달신시의 법이 조선에 와서 꽃을 피운 것이다. 대한민족의 환단의 DNA가 한글로 스스로 발현했다.
오늘날 한글은 세계최고의 문자로 우뚝 서 있다. 이것은 한민족의 문화가 세계에 우뚝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현재 이런 모습은 심심챦게 나타나고 있다.
<다시보는 훈민정음의 위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