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황금 허리띠 고리(국보 89호)를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의 유물이라고 하는 주장을 주류역사학계에서 현재까지도 펼치고 있고 이를 고착화하려합니다. 이에 황금허리띠 고리가 과연 어떤 유물인지 팩트체크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박물관 간다』의 공동저자 김용호 님의 글 중 황금허리띠 고리 부분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고조선 전시실에서 열국 시대로 넘어가는 공간 한편에 낙랑 유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중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유물이 황금 허리띠 고리(금제교구金製鉸具)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낙랑 금동허리띠 (사진=한문화타임즈) |
이 역사적 유물에는 그 당시 최고의 기술들이 적용되었습니다. 금판을 두드려서 입체적 형상을 표현하는 단조 타출기법打出技法은 금이나 은과 같이 늘이기 쉬운 전연성展延性이 좋은 금속을 이용하여 공예품을 제작할 때 사용되는 기법입니다. 금선(얇은 황금 실 모양)과 금 알갱이를 금속 표면에 붙여서 장식하는 누금세공기법鏤金細工技法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물방울 등 특정 모양의) 난卵집을 만들고 작은 보석(터키석 등)을 끼워 넣는 감옥기법嵌玉技法이 보입니다. 낙랑 유물들에서는 금판뿐만 아니라 은판에 위 세공기법들을 사용하여 만든 다양한 허리띠 고리들도 출토되었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학습을 받아 온 역사 패턴을 생각해 보면, 훌륭하고 좋은 것은 외부로부터 전래되거나 가져와야 됩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이 인접한 중국이라고 단정을 짓습니다. 중국은 수준 높은 기술과 문화를 보유했고, 우리 민족은 그렇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활동 무대를 동아시아 구석으로 한정시켜 소극적으로 외래문화만 전수받는 입장으로 각인시켜 왔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식민주의적 관점입니다. 황금 허리띠 고리를 두고도 위와 같은 해석을 강요했습니다. 한漢나라 제왕이 지역 태수에게 준 선물(하사품)이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흉노와 같은 기마 유목 민족 영역에서 멋진 유물이 나오면 한나라에서 조공을 받거나 약탈한 것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박물관 유물들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흥미롭게도 황금 허리띠 고리를 만든 3가지 기술 모두 그 당시 한나라에는 없던 기술입니다. 한나라 지나支那(CHINA) 영역권에서 발견된 유물의 세공 기술은 고대 조선(대부여, 북부여)이나 북방 흉노에 비해 낙후한 상태였습니다. 황금 허리띠 고리 수준의 세공품은 몇백 년 후에 나타납니다. 더구나 지나(CHINA) 인들은 단조 기술이 빈약하여 세 가지 기술을 복합적으로 구사하지 못했습니다. 얇은 금속판을 단조 및 타출하여 장신구를 만드는 누금세공기법은 기원전 7세기 이전 중근동中近東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7~6세기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고도로 발달했습니다. 이 기술과 함께 다채롭게 색색의 보석들로 상감象嵌 장식하는 양식은 기원전 3세기 전후부터 흑해 연안이나 중근동을 중심으로 발달하여 몽골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전 지역에서 널리 유행했습니다.
최근 몽골 지역 흉노 고분(기원전 2세기로 추정되는 노용 올Noyon-Uul, 골 모드Gol-Mod 유적)의 주요 유물 조사를 통해서, 야만적이고 비문명적이라고 생각했던 흉노와 북방 기마 민족들이 수준 높은 세공 기술을 보유했음이 밝혀졌습니다. 흉노와 주변 기마 유목 민족들의 금속 공예품은 철과 비철 금속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사용하여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발달된 철기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수준 높은 금속 공예 기술까지 구사했습니다.
금은 세공 기술의 발생 및 전래 과정을 정리해 보면, 중근동 지역에서 발생하여 중앙아시아로 전래되어 동서 중계 무역을 통해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라시아에는 수많은 국가들이 존재했습니다. 그 유라시아 지배자(지배계층 혹은 고위 귀족들)에게 금은 세공품 수요는 뜨거웠습니다. 금은 세공품들은 기마 이족들의 초원길을 통한 동서 교류를 통해서 대륙 동쪽까지 전해지고, 세공 기술도 같이 전해졌습니다. 동쪽으로 전해진 세공 기술은 동시대의 흉노 및 고대 조선(부여)과 그 연맹국가들에게도 전파됩니다.
특히, 흉노와 인접한 낙랑 지역(현 중국 내몽고자치구 남부, 허베이 성河北省, 랴오닝 성遼寧省 일부)을 차지하고 있던 한민족(혹은 동이족)도 금은 세공 기술에 적극적이었으며, 나아가 그 기술을 흡수하여 자체적으로 발달시켰습니다. 낙랑 사람들이 마한 북부 지역으로 이주 건국하면서 문화적 소양과 세공 기술을 보유한 장인 집단도 한반도 북부로 이동하게 됩니다.
평양 낙랑 지역에서 확인된 철기 및 청동기 공방지工房址(단조 철기 공방지)는 금은제 공예품들을 자체적으로 제작했을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이 공방지들은 금은 공예품들이 한나라 중앙 공방에서 만들어서 사여賜與, 혹은 약탈된 것이라는 기존 일본 학계 연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증거물들입니다. 낙랑왕 최숭崔崇과 낙랑 사람들은 낙랑 건국 이전부터 낙랑 지역(내몽골 남부, 허베이 성河北省, 랴오닝 성遼寧省 일부 지역)에서 이미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부를 축적했는지 낙랑 지역에서 어떤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유라시아 전역에서 인기 높은 금은 세공 상품을 통해서도 부를 창출했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사진 출처 : 월간개벽 |
말발굽을 닮은 황금 허리띠 고리
- 기마 유목 민족의 문화적 특성
낙랑국 유적에서는 현대인들의 옷차림에서 벨트 버클 형태와 거의 흡사한 허리띠 고리가 발견됩니다. 제가 평소에 청바지를 입을 때 사용하는 허리띠 버클과 모양이 거의 똑같습니다. 이러한 허리띠 고리가 발달하게 된 이유는 기마 문화의 특성상 격렬한 동작에도 몸에 착용한 의복이나 물건 또는 말에 장착한 물건을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해서 고안되고 발전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한 황금 허리띠 고리는 앞서 보여드린 현대식 허리띠 고리와도 디자인이 다릅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말발굽의 외형과 비슷한 형태입니다. 그래서 마제형馬蹄形 황금교구라고 부릅니다. 한나라 유적에서는 아직까지 이러한 교구들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말발굽형 황금 허리띠 고리는 평안도 낙랑국 유적 말고도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었습니다. 신강위구르 지역 카라샤르, 몽골 북부 골 모드와 몽골 중부 노용 올, 요령성 대련, 운남성 곤명에서 출토된 허리띠 고리는 제작 기법과 소재와 디자인이 유사합니다.
낙랑국 황금 허리띠 고리와 가장 많이 비교되는 황금 허리띠 고리는 신장위구르 카라샤르에서 발견된 1∼2세기 황금 허리띠 고리입니다. 신장위구르자치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2008년도에 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어 한국에 소개되었습니다. 제작기법과 소재가 낙랑국 허리띠고리와 아주 유사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큰 용이 한 마리 작은 용이 7마리로 용이 모두 8마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용의 등 부분을 표현하는 부분이 낙랑 것에 비해 다소 투박스러워 장인들의 예술적 기술적 수준 차이가 확연합니다.
유물 분포 지도를 보면 한나라 강역과 황금 허리띠 고리는 무관합니다. 일본 학자들 주장처럼 한나라 변방에서 출토된 한나라 하사품이 아닙니다. 2천 년 전 한나라와 무관한 기마 유목 민족 세력권에서만 이러한 말발굽 형태의 허리띠 고리가 제작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그래픽 출처 : 월간개벽 |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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