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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년, 바꿔야 할 한국사] 사그러들지 않는 ‘식민사학 청산’ 논란

[광복 70년, 바꿔야 할 한국사] 사그러들지 않는 ‘식민사학 청산’ 논란

일제 관점서 재단… 학계 권위·학맥 막혀 주체 역사 못세워

1945년 8월 광복을 맞은 역사학계의 최대 화두는 ‘식민사학’의 극복이었다. 일제가 식민통치 35년간 난도질한 한국사의 온전한 복원은 지상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광복 70년을 맞은 2015년, “식민사학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조선총독부 사관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직설적인 비난까지 있다. 이런 비판과 주장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학계 내부에서의 논쟁은 물론 소송으로 번지거나, 정치권으로 확대되기도 했었다. 강산이 일곱 번 바뀔 세월이 지나고도 ‘식민사학 청산’의 주장이 반복되는 이유는 뭘까. 역사학이 근대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을 무렵인 20세기 초 일본인 학자들의 막강한 영향력, 광복 직후의 정치 상황과 식민 잔재의 불완전한 청산, 주류 학계의 학맥 형성 과정을 들여다봐야 이해가 가능하다. 학계의 권위주의와 소통 부재도 짚어야 할 대목이다.


 
정한론도 일본의 한국사 왜곡의 뿌리는 깊다. 17세기에 이미 ‘일본서기’ 등을 근거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다”는 주장을 펼쳤고, 19세기 ‘정한론’으로 이어졌다. 일본인들이 정한론을 두고 논쟁을 하는 모습.   < 만권당 제공 >
 
 
◆한국사에 드리운 식민사학의 짙은 그림자


역사학이 근대적인 학문으로 자리 잡기 시작할 무렵인 20세기 초, 역사학계는 민족사학과 식민사학으로 크게 양분됐다. 한국사를 어떻게 정리하고, 해석할지에 대한 양 진영의 힘겨루기는 치열했다.

일본에서 한국 연구는 17세기에 이미 시작됐다. ‘고사기’, ‘일본서기’ 등 일본 고전을 근거로 “일본이 과거 한국을 지배했다”고 주장했고, 19세기 ‘정한론’(征韓論·일본이 한국을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식민사학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과 함께 본격화되어 1920년대에 이르면 체계화된다. 1925년과 1926년 잇달아 설치된 ‘조선사편수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는 두 축이었다. 두 기관에 소속된 학자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료만 골라 모은 ‘조선사’를 1937년에 완성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식민사학은 ‘타율성론’(한국사는 외세의 간섭과 압력에 의해 전개됐다), ‘정체성론’(조선은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를 수 없는 낙후되고 정체된 후진사회다), ‘일선동조론’(한국과 일본은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으로 한국사를 재단했다. 

 

신채호, 신석우, 신규식(왼쪽부터)이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찍은 사진이다. 신채호는 한국사학을 근대적인 학문으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 학자이자 독립운동가다.   < 만권당 제공 >
 
 
민족사학은 학문적 차원을 넘어 항일운동의 수단으로 전개됐다. 1910년대 일제의 박해를 피해 만주, 연해주 등으로 망명한 신채호, 박은식, 김교헌, 이상룡 등 독립지사가 진영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분명한 특징이다. 이들은 ‘민기’(民氣), ‘국혼’(國魂) 등 정신력을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삼으며 왕조사관에서 벗어나는 발전을 보였다. 또 고대사의 무대를 만주, 중국 동북지대로까지 확대해 한국사의 자주성, 진취성을 강조했다. 신라, 발해의 병립을 ‘남북조 시대’로 이름 붙이고, 조선시대의 당쟁을 ‘붕당발전론’으로 해석해 일제의 ‘당파망국론’에 맞서기도 했다. 이국 땅에서 개발된 민족사학의 주요 이론은 국내의 신문, 잡지 등에 연재되며 주목을 끌었고, 일제를 긴장시켰다.

민족사학자들은 분투했지만, 식민지의 현실에서 힘의 차이는 분명했다. 무엇보다 양적인 면에서 식민사학자들이 쏟아내는 연구 결과물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조선사편수회, 경성제국대학, 청구학회 등을 결성한 식민사학자들과 달리 민족사학자들은 연구조직을 결성할 조건도 되지 못했다. 

조선사편수회 야유회 1925년 설립된 조선사편수회는 식민사학을 만든 한 축이었다. 조선사편수회의 야유회 모습을 찍은 사진에 한복을 입은 참가자들도 보인다.  <만권당 제공>
 
 
◆친일경력 이병도를 정점으로 형성된 역사학계

광복 후 역사학계의 흐름을 짚을 때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은 이병도다. “역사를 완전히 독립된 학문으로 정착시킨 이를 꼽는다면 아마 이병도를 첫째로 들어야 할 것”이란 평가를 받는 학자였고, ‘누구도 그 그늘을 벗어날 수 없는’ 학계의 1인자였던 인물이다.

1910년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한 이병도는 대표적인 식민사학자인 이케우치 히로시와 쓰다 소키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을 맡으면서 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이런 경력 때문에 광복 직후 학계의 ‘친일파 제명운동’ 대상이 되면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족사학자들이 광복 직후 정치에 참여하고, 6·25전쟁 와중에 월북, 납북되면서 학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극심한 반공주의 정책으로 친일파 청산문제가 잠잠해진 것도 유리한 상황이었다.

식민사학 청산을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이병도는 ‘공적’(公敵)과도 같은 존재다. 식민사학의 틀 속에서 형성된 그의 학설이 제자들을 통해 학계의 통설로 군림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병도의 학설에 대해 “종래에 일본인들이 세워놓은 한국사 체계의 범위 안에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식민사학이 타율성론의 근거로 삼았던 ‘한사군 한반도설’이다. 그는 낙랑이 지금의 평양에 있었다고 하는 등 한사군의 중심지가 한반도에 있었다고 인식했다. 일본인 학자들과 같은 견해이며 지금도 학계의 통설이다.

한계가 분명했지만 학계에서 이병도의 권위는 누구도 넘볼 수 없었다. 1989년 세상을 떠난 뒤 나온 ‘역사가의 유향-두계 이병도 선생 추념 문집’이란 제목의 책에서 이런 위상은 확인된다. 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이기백, 김원룡, 전해종, 이성무, 고병익, 이기동 등은 주요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광복 이후 한국사 학계를 주도한 1세대 학자들이다. 이들은 이병도를 “한국문화의 연구에 획기적인 기틀을 마련하셨다”, “한국사학의 수립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셨다”고 추켜세웠다.

◆“변화 거부하는 ‘학(學)피아’가 무섭다”

“스승 없이 혼자서 공부해야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스승의 주장을 의심하지 않고, 그 범위 안에서만 논문을 읽다 보니 세뇌가 되는 거다.” 한 중견 역사학자의 고백이다. 기존의 학설에 얽매여 건설적인 비판과 극복이 어렵다는 의미다. 학계의 토론 부재와 경직된 권위주의에 대한 지적이기도 하다. 식민사학 청산 주장이 반복되는 또 다른 이유다.

주류 학설에 대한 도전과 문제 제기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1975년 10월에 ‘국사찾기협의회’가 발족했고, 1978년 9월에는 국사 교과서 서술상의 문제를 지적하며 소송이 제기됐다. 1981년 11월에는 국회에서 단군실존설, 고조선 영토 문제 등을 두고 토론회가 벌어지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윤내현, 최재석 등이 고조선 성립 시기, 중국·일본 등 주변 국가와의 관계 등을 두고 주류 학설을 강하게 비판했다. 문제는 이런 주장이 잠시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깊이 있는 토론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도 이런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한 역사학자는 “통설에 반하는 논문을 학회지에 싣기가 어렵다. 그래서 아예 학회를 따로 만들어 버린다”고 말했다. 지방 소재 대학의 한 교수는 “토론회를 해도 자기 말만 한다. 말 그대로 토론일 뿐 결과가 바뀌는 것은 없다”며 “다른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따돌림을 받은 경우가 왕왕 있다”고 전했다. 주류 학자들이 비주류 학자들과의 토론에 거부감을 보인다는 증언도 있다.

신진 학자들의 기존 학설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를 기대하기도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학계에 안정적인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득 될 게 없기 때문이다. 국립연구기관의 한 교수는 “학계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눈치를 많이 봐야 한다. 다른 이론을 주장하면 손해를 보는 구조인데 누가 제 목소리를 내겠냐”고 꼬집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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