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3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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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9












          ①                                               ②

                                                          ① 월성(경주) 석씨 대동보에 기록되어 있는 석체와 그의 아들 강수
                                                          ② 해류 흐름으로 보는 석탈해가 이용한 해류의 위치




                        태종무열왕은 강수에게 두 가지를 물었다. 바로 성(姓)과 명(名)이었다. 이에 강

                      수는 그의 성은 본(本)으로 밝히면서 임나가량인(臣夲任那加良人)이고 이름은 ‘우두’
                      라고 하였다. 즉 직접적인 성씨를 밝히지 않고 ‘본관(本貫)’, ‘관향(貫鄕)’을 의미하

                      는 본(本)으로 아뢴 것인데, 이는 신라의 왕족인 박·석·김 씨들 간의 치열한 경쟁에
                      서 밀려난 석 씨의 후손이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석탈해를 성씨의 기원으로 하는 가문은 월성석씨(月城昔氏, 경주석씨)가 유일하다.

                      대동보 기록에는 석탈해 후손인 신라 11대 왕 조분 이사금의 3남인 6세 석지(昔
                      祉)의 후손으로 16세 석오원(昔五源)이 있었는데, 그는 첨성대와 분황사를 건립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석오원의 차남이 석체(昔諦)로 곧 강수의 아버지로 명확히 기
                      록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강수는 석탈해 왕을 시조로 하는 월성석씨 18세 후손

                      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강수가 밝힌 ‘임나가량’의 위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원문을 통해

                      석탈해의 고향 땅 다파라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석탈해가 구주의 다파라국
                      을 출발해 가야를 거쳐 신라 땅 아진포에 도착하는 뱃길은 해류의 흐름으로 본
                      다면 당시 대마도나 구주, 혹은 제3의 장소에서 출발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 논문을 통해 『일본서기』를 인용하여 임나일본부설을 자국의 정사로 설정하
                      기 위한 일본인 학자들이 설정한 『삼국사기』 강수는 가야인이 아니라 신라 왕족

                      석탈해의 18세손인 석강수였으며, 그의 성씨의 관향인 임나가량은 석탈해의 고
                      향인 다파라국으로 가야가 아님이 명백히 증명되었다. 1,300여 년 만에 통일신

                      라 대문장가 ‘강수’의 신원이 바로 잡혔으며 강수를 인용하여 임나일본부설의 정
                      당성 논리로 활용된 ‘가야=임나’라는 통설도 하루아침에 낭설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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