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92 - 월간 대한사랑_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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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논문




                           한반도 남부 임나일본부설 근거로 활용된 인물,

                               강수의 실체를 밝히다



                                          논문요약. 李梅林









            이달의 논문은 『역사와 융합』 제13집(2022.12)에 수록된 「강수열전(强首列傳) “본(本)”의 재해석
            을 통한 임나가량(任那加良) 위치 비정」 논문에 대한 요약 본입니다. 매월 주목할 논문을 ‘이달의
            논문’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100년 통설(通說)이 하루아침에 낭설(浪說)이 되다.


              한국사에서 임나 존재를 거론하는 주된 논리는 다음 세 가지 자료를 근거로
            든다. 「광개토왕태왕비」의 ‘임나가라(任那加羅)’와 『삼국사기』 강수열전의 ‘임나가

            량(任那加良)’, 그리고 창원에서 발굴된 「진경대사탑보월능공탑비」의 ‘임나왕족(任
            那王族)’이란 기록이다. 이 세 가지 기록을 조선총독부는 『일본서기』 임나일본부가
            실제로 한반도 남부 가야를 중심으로 존재했다는 증거로 조선인들에게 교육하

            기 시작했다.

                (태종무열) 왕이 크게 기뻐하여 서로 늦게 만남을 한스럽게 여겼다. 그 성명

                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인으로 이름은 우두(牛
                頭)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두골(頭骨)을 보니 ‘강수선

                생(强首先生)’이라 불러야겠다.(王驚喜, 恨相見之晩. 問其姓名, 對曰, “臣夲任那加良人,
                名牛(字)頭.” 王曰, 見卿頭骨, 可稱強首先生. 『삼국사기』「권46 열전 제6 강수」)


              이 기록에서 일본 학자들에게 주목을 받은 구절이 강수가 태종무열왕에게 자
            기를 ‘임나가량(任那加良)인’으로 밝혔다는 대목이다. 정한론의 일본인 학자들과

            광복 후 한국의 가야 관련 학자들도 강수는 가야인으로 가야가 멸망 당한 후 다
            른 지역으로 이주한 가야의 왕족이나 귀족으로 보고 “가야=임나”라는 논리를 고

            수하고 있다. 이 논문은 사료 원문을 기초로 강수의 실체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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