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4 - 국제학술문화제-동북공정 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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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분과
인가? 고려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위치를 찾아내려는 노력과 시도가 있었다. 그 대강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의 의무려산 아래 의주에서부터 조선시대 발해 솔빈부, 성주(성천)을 거쳐 광
개토경평안호태왕비, 성지(성터)의 발견, 답사 등으로 통구나 본계시 환인현으로 대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환인의 오녀산성이 거의 확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근래 『삼국사기』 의
무려산 아래 의주를 주목하는 시도가 나오고 있다.
졸본은 서기전 239년 해모수가 흘승골성에서 북부여를 건국한 이후에, 고두막한이 졸본부여를
세운 곳이고, 고추모가 고구려의 첫 도읍을 삼은 곳이다. 해모수는 흘승골성에서 일어나 무너져
가는 (고)조선의 백악산 아사달을 점거하고, 조선을 이어 단군이 되었다. 145) 고두막한은 한나라의
침략에 일어나 세상을 구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졸본에서 즉위하여 동명이라 하고, 북부여 성읍을
인계받아 146) 북부여를 계승했다. 고추모 또한 동부여(북부여 제후국)에서 도망하여 졸본에 온 후
북부여를 계승했다. 이후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나라들을 차례로 복속시켰고, 북옥저 성읍으로
옮겨갔다. 해모수, 고두막, 고추모가 터를 잡은 졸본은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한 나라(즉 세 나라)
창업의 수도였다는 것이 첫째고, 졸본을 발판으로 이전의 주도 세력을 굴복시켰으며, 셋째, 그 주
도 세력을 계승하고, 이후 수도를 천도한 것이다.
졸본은 한마디로 북부여와 졸본부여, 고구려의 발판이요, 전진기지라고 할 것이다. 졸본은 해모
수가 일어난 서기전 239년부터 고구려가 북옥저의 상춘 주가성자로 도읍을 옮긴 서기전 27년까
지 147) 거의 200년의 역사를 지켜왔다. 때문에 졸본의 위치가 어디인가를 알아내는 작업은 고구려
의 첫 도읍이 어디인가의 의미를 넘어서는 일이다. 지금까지 졸본은 흘승골성이나 졸본부여의 의
미는 퇴색되고, 고구려 첫 도읍이라는 한정된 역할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졸본은
위만과 한나라의 도적질을 지켜보았고, 그들을 물리치는 중심에 있었다. 또한 (고)조선의 멸망으
로 흩어졌던 소국들을 통합하는 다물의 정신이 뿌리내린 곳이다.
현재 우리 역사 학계가 외면한 역사 영역인 요서지역은 물론 압록강 이북의 만주, 간도 땅도 중국
역사에 속한 지 오래되었다. 더구나 고구려를 그들 역사에 귀속시키면서 충청도 지역까지 옛 그들
의 영역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졸본은 한사군 현도 특히 고구려현과 지리적 근접 관계에 있다고 보이기 때문에 한사군 및 현도
의 위치는 졸본 위치를 추정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 현재 한사군은 크게 한반도 및 그 인근으로
보는 견해와 요동에 걸쳐 있었다는 견해, 난하 인근에서 요하 인근까지 보는 견해가 있다. 한반도
안에 있었다는 설의 가장 큰 조건은 북한지역의 평양이다. 즉 낙랑 평양설이다. 평양이라는 지명의
확고함과 일제가 한국의 역사를 연구할 당시 고고학적 발견을 근거한 추정으로, 문제점이 제시되
지 않은 채 정설이 되어 오랜 기간 유지되어 왔다. 148)
145) 이암(李嵒), 『檀君世紀』, 先是宗室大解慕漱 密與須臾約 襲據故都白岳山 稱爲天王郞 四境之內皆爲聽命
146) 백악산 아사달을 뜻하는 듯하다.
147) 주 59) 참고
148) 김영섭, 「평양 대동강면 무덤떼 축조집단 연구」, 『인하대』 박사, 2021. 평양 대동강면의 무덤떼 축조집단이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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