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칼럼
[최재목 대한사랑 기자]한가닥 실처럼 아직 남아있던 대한의 국통은?
고대의 불완전한 역사라도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국가의 '주족(主族)'인 단군 후예의 발달한 실적이 명백하거늘
어떤 이유로 우리 선민을 왜곡함이 이에 이르렀느뇨.
금일에 민족주의로 온 나라의 완고한 꿈을 일깨우며,
국가 관념으로 청년의 새로운 두뇌를 단련시켜,
우울하면 살아남고 열등하면 망하는 갈림길에서 함께 나가서,
한 가닥의 실처럼 아직 남아있는 국가의 명맥을 지켜내고자 할진대,
역사를 버리고서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할 수 있으니
- <대한매일신보>1908년8월27일 단재丹齋 신채호申菜浩(1880~1936) -
가장 가슴 아픈 표현은 '한 가닥의 실처럼 아직 남아있는 국가의 명맥을 지켜내고자 할진대, 역사를 버리고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1908년, 한 가닥의 실과 같은 역사맥이 끊어지면 국가와 민족의 명맥이 단절된다는 것이다.
그럼 한 가닥 실처럼 아직 남아있던 대한의 국통은 무엇인가?
아시다시피 단채 신채호 선생은 1910년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휴대하고 중국으로 망명했고, 만주의 고구려 옛 영토를 여행하고 광개토대왕릉을 답사했다. 단재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보면, 대한의 올바른 국통맥 인식의 관건인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제}를 기술했다. 삼한관경제는 단군조선이 넓은 강토를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으로 나눠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국시대의 북부여, 동부여를 전하고 위만의 근거지와 한사군은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 요동에서 구해야 한다고 기술하였다. 한마디로 지금의 국통맥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현 교과서를 보라. 어떻게 국통맥을 전하고 있는가?
단군왕검의 개국을 논하고, 이어서 기자의 후손 기비와 기준왕을 강력한 왕으로 소개하고, 위만을 단군조선의 계승자로 칭송한다. 이후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멸하고 그 땅에 한사군을 설치했다가 고구려가 수복한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현 교과서에서 말하는 국통체계는 한마디로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 - 한사군 - 고구려'라 할 수 있다.
그럼 언제부터 이런 국통을 중심에 두게 되었는가? 어떻게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고, 한 가닥 실처럼 겨우 남은 대한의 국통을 되살릴 수 있는가?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이 망하면서 그들이 주체의식으로 기록한 원형사료는 애석하게도 사라졌다.
그러나 고려 시대, 대한의 뿌리를 찾을 단서가 될 세 가지 맥이 전수되었다.
첫째 맥은 일연 수님의『삼국유사』에 실려 있고,
둘째 맥은 고려 말 이승휴라는 유학자가 남긴『제왕운기』와 이후 조선의 선비들이 정리한 역사맥이 있고,
셋째 맥은 고려 공민왕때 인물인 행촌 이암(1297~1364)이 전한 국통맥이다.
이중에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와 달리 행촌이암의『단군세기』는 소중화사관과 일제 식민사관이 등한시 한 낭가의 정신으로 기술된 고서를 뼈대로 하고 있다.
행촌 이암은 이 고서를 소전거사를 만나 전수받아 단군세기를 집필했다. 그럼 행촌 이암 선생이 천보산(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소재)을 유람하다 태소암에서 소전거사를 만난 장면을『태백일사』<고구려본기>를 통해 확인해보자.
행촌 이암과 더불어 이명, 범장 선생은 대한의 옛 고서를 소장하고 있던 소전거사로부터 '득신서得神書'했다고 한다. 고려 말, 조선 초 유교 관료가 집구너해 소중화사관이 득세하기 전에 대한의 혼과 역사정신이 전수된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고려 중기까지 환단전수지진결桓檀傳授之眞訣 즉 환단시절부터 전해 내려온 역사서가 있었고, 숨겨진 대한의 역사 국통맥이 전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려 후기에는 일제가 식민사관으로 굳혀놓은 하나의 역사 맥이 아니라 다양한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일연과 이승휴의 삼조선 체계와 다른 고유한 낭도문화의 맥이 전수된 것이다.
즉 소전거사와 삼인(이명, 범장, 행촌 이암) 동맹을 통해 '단군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이라는 잘못된 삼조선 맥과는 다른 {삼한관경제}로 다스린 '단군조선 - 북부여 - 고구려' 로 전수된 국통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