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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풍향계/ 홍범도의 유해, 포석의 유해-두 거인의 발자취를 따라(중)

풍향계/ 홍범도의 유해, 포석의 유해-두 거인의 발자취를 따라(중)

  •  동양일보
  •  
  •  승인 2021.09.27 18:04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 조명희문학관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 조명희문학관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 조명희문학관

 

[동양일보] 필자는 지난 글(2021. 08.26.)에서 여천 홍범도의 유해가 사후(1943)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장면을 보고 기쁨과 함께 아직 돌아오지 못한 포석의 유해를 비통한 심정으로 바라본 상념을 피력하며 두 거인의 인연과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이번 글은 그 여정의 세 번째 글 중 두 번째에 해당하는 글이다.

“그때 선봉은 진실한 의미에서 연해주 조선족의 민족지로 계몽지로 지도자로 되어 있었다. 1920~1930년대 선봉의 절대적인 창시자들로, 지지 후원자들로 이동휘 선생, 홍범도 장군, 최고려 선생, 황운정 선생, 계봉우 선생, 오창환 선생, 조명희 선생, 김 아파나시 선생, 김 미하일 선생과 같은 애국지사들이 서 있었다. 나는 이 선생님들을 신문사와 기념행사에서 자주 봤으며, 또 이들의 연설을 들은 바 있다.” (정상진, ‘아무르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 지식산업사, 2005. 251-252)

위의 인용문은 포석이 하바롭스크 고려(조선)사범대학교 교수 시절(35~37) 제자인 정상진의 증언이다. 정상진은 37년도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로 강제 이주 당한 뒤 해방 후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남한으로 치면 문체부 차관에 해당하는 고위직이다. 김일성을 직접 만나는 등 북한체제의 내밀함은 물론 생사가 불명한 월북 작가들과 친분을 나누며 그들의 동향을 생생하게 전해준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정상진은 이후 숙청을 피해 57년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와 고려일보 기자와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그가 북한에서 경험한 일들을 세상에 알렸다. 한편의 드라마 같은 삶이다. 정상진의 증언이 중요한 이유는 포석과 홍범도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났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이후 잦은 만남을 통해 민족의 현실을 고민하며 소통했다는 가설과 상상이 확실한 실체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숱하게 만났어도 ‘만남’으로 보지 않는 것은 소통이 부재한 까닭인데 ‘선봉’은 포석과 홍범도는 물론, 고려인 사회의 지도자들이 자주 만나 교류한 곳이며 연해주 고려인들의 소소한 ‘문화 사랑방’ 역할을 한 열린 공간이기도 했다. 정상진은 이 장소에서 포석의 ‘조선문학’ 강의도 들었다고 한다.

선봉은 1923년 창간한 고려인 신문이다. 정상진의 증언에 의하면 선봉 초기부터 홍범도가 지속적으로 선봉의 후원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문맹인 사람이 신문의 가치를 절감하며 후원을 한다는 것은 큰 공감을 얻기 어렵다. 지금까지 국내에 잘못 알려진 홍범도의 관한 대표적인 왜곡은 글을 모르는 ‘문맹’이라는 것인데 이는 심각한 허위이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에는 일제 강점기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들의 삶과 업적이 전시되어 있다. 포석도 진천 출신 독립운동가인 보재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 독립운동사의 빛나는 ‘59인의 영웅’ 속에 포함되어 전시되고 있다. 그곳 전시실에는 ‘초서체’로 멋지게 일필휘지 써내려간 홍범도의 글씨가 있다. 초서체는 숙련이 필요한 글씨체이다.

이는 홍범도가 단순한 무장이 아니라 문무를 겸비된 출중한 인물임을 반증하는 것이며 포수 출신이라는 배경 속에 은연중 도사린 편견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1921)이후 연해주로 이주 정착한 시기에 창간된 선봉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과거에 신문 구독과 관계된 형태의 업(業)들은 글 꽤나 읽는 사람들의 전유물로 한 사회의 ‘지성’을 의미했다. 홍범도의 경우도 이 범주에 포함된 인물이며 자금만 돕는 일개 후원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추정은 계연수가 펴낸 ‘환단고기’(1911)의 범례에 홍범도가 오동진과 출판자금을 댔다는 기록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그가 역사의식을 갖춘 인물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일제 강점기 독립투쟁의 사상적 중심은 ‘대종교’였다. 홍범도가 “대종교와 단군계열인 단학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는 기록이 ‘홍범도 평전’과 고증된 관련 연구서 등에 기술되어 있다.

홍범도는 우수리스크의 시절(27~29) 여러 학교에 초정을 받아 강연하는 날이 많았다. 노구(老軀)였지만 영웅의 전설적 항일 투쟁담은 피 끓는 젊은이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교과서를 튀어나온 살아 있는 현장의 역사였을 것이다. 홍범도의 이러한 날들은 포석이 우수리스크 ‘고려 사범전문학교’에 재직할 시기와 겹친다. 더구나 고려 사범전문학교는 연해주 최고의 교육 양성 기관으로 고려인 사회의 자랑이며 ‘선봉’이래로 이어진 두 영웅의 인연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강연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동안 두 사람이 만났다는 사실과 개연성에 주목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동일한 시기에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목적으로 왕래를 했다면 만났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없다는 이유가 안 만났다는 것을 단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필자가 당초에 두 사람의 만남과 그 가능성에 강하게 집착했던 것은 바로 유실된 장편 소설 ‘만주 빨치산’이 홍범도의 증언을 바탕으로 충실하게 쓰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작품의 리얼리티와 완성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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