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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특별기고] 이땅의 주류사학계는 왜 가야를 부정하고 임나일본부를 옹호하는가? (1부)

 이매림 (사) 미사협 공동대표 (사) 대한사랑 수석본부장

최근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사 전시회 파동’은 대한민국 주류사학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역사학자들이란 자들의 역사 불의에 분노하고 차오르는 불쾌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국가통수권자의 가야사 복원 희망에 대한 현 주류사학계의 처절한 응징으로 보이는 사건이었다. 틀림없이 국고를 가지고 행하는 행사일텐데 정부 관련자들의 가야사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대변하는 듯한 행사였다. 

가야 건국사를 파괴한 가야사 복원 전시회
 

김수로왕릉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가야사 복원은 여야, 좌우를 떠나 누구나 역사공부를 통해 그 전말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있는 기본 상식이 되어 있는 내용 아닌가? 가야 건국사를 말한다면 당연히 대표적 아이콘은 김수로왕과 허왕옥이 아닌가? 그리고 그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는 유적이 파사석탑일 것이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은 김알지 계열과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북방 흉노(훈)의 문화유적까지 발굴되어 더욱 관심을 가지게 하는 역사로 매김하고 있다.

<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전시회 - 가야본성>

그런데 김수로왕과 허왕옥의 역사가 유사사이비라고 공격하는 자들이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와 더불어 이쪽저쪽 신문기사 게재를 통해 주도면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김수로 왕릉이 가짜라고 강의하는 모대학교수도 등장하였다. 그는 당시 인도에서 가야지역까지 파사사탑이 이동할 수 없다는 논리로 파사석탑도 사이비 역사로 몰고 있었다. 고인돌루트만 보더라도 파사사탑보다 수 천 년 전 세계 인종과 문물이동의 교통로로 작용했는데 일반인보다 무지한 논리를 가지고 파사석탑과 김수로 왕릉을 가짜로 모는 논리를 보고 참으로 그 ‘우주적 코미디’에 개탄을 했다. 

파사석탑을 고유제까지 지내고 역사상 처음으로 김해를 떠나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를 

해놓고서 신화시대라고 바닥에 새로 칠해놓은 모습

결국 2차 부산박물관 전시회를 통해 결론지어진 것은 “가야사 복원”이 아닌 “가야 건국사 부정”, “가야 건국사 파괴”의 전시회로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종친회, 그리고 후손들이 대단히 분노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국민들의 공분을 자아내게 한 사건은 또 있었다. 바로 현재 아베 정권에서도 교과서에 정사로 표기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일본의 전역의 신사와 잡지에서도 공식적으로 역사적 사실로 표기하고 있는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설”에 관련된 조선총독부 학자들의 임나지명을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가야전시회에 그대로 인용했다는 것이다. 이는 명백히 가야 건국사를 완전히 부정하며 죽여 버리고 임나일본부를 인정하는 ‘매국사학의 전시회’인 것이다. 

 

 <일본서기에 있는 지명을 한반도 내로 인용하여 표기하기 위해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왕의 재위연대는 삭제하고 일본서기에 나오는 369년조를 집어넣은 역사연대표>

어떻게 현대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것은 가야사 복원이란 명목 하에 국가통수권자까지 나서서 ‘영호남이 같은 가야문화권으로서 화합’을 다지기를 위한 희망을 절망으로 만들어 버린 사건인 것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가야지역이 일본의 고대 200년간 식민지라는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는 전시회가 되어 버렸으니 당연히 국민들의 분노를 사게 만들었다. 임나일본부 표기 규탄 역사학술대회와 청와대 청원에 이어 감사원 민원감사까지 국민들이 요구하는 지경까지 되었다. 

   < 미사협, 감사원 민원감사 요청 전 감사원 앞 규탄 시위 모습>

그 과정의 청와대 청원에 대한 관련자의 답변과 감사 민원감사 요청에 대한 감사원의 초기 답변은 모든 민족역사단체들의 분노에 기름을 붙는 작용을 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청와대 청원에 대한 답변, 그리고 감사원의 관련자 답변은 역사의식 부재 공무원의 현실을 확실히 보여 주었다. 

감사원 관련자들은 임나일본부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일체 무지한지 ‘일본서기 임나일본부로 표기했을 때 받을 수 있는 피해상황을 명시해 달라는 식’의 진짜 너무 충격적인 답변을 보내왔다. 이건 코미디 수준을 넘는 것이다. 이에 격분한 국민단체들은 국정감사를 요청하는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다. 이번 사건에 관련된 학자나 관련자들을 국민들 앞에 공개하고 처벌을 원하는 조치를 요구할 계획이라 한다.  

< 일본서기 기문,대사와 임나 4현의 위치를 남부지역을 확정 표기한 국립중앙박물관 도표와 삭제 처리한 부산박물관 도표 비교> 

가야 건국사의 부정에 임나일본부 인정 표기까지

이 전시회가 사회적 관심을 가지면서 국민의 공분을 사는 여론이 형성되자 2차 부산박물관 가야특별전에서는 일본서기 임나일본부 관련 내용은 완전 삭제처리하고 전시회를 진행 중이다. 하지만 부산전시회에서는 아예 가야 건국사에 대한 내용을 언급 자체를 안했다. 전시회를 진행할 수 있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명분 없는 전시회로 전락해 버렸다. 

임나일본부를 표시한 일본의 역사교과서. 위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의 기문,대사와 

임나 4현 위치와 동일하다.

그 다음 전시회가 7월 경 일본 순회전시회인데 코로나19로 연기된 상태이지만 다시 어떤 모습으로 일본에서  전시회가 이루어질지 일본에 있는 교민들이 감시를 하겠다고 한다. 결코 한국 가야사를 팔아먹는 전시회는 막아 보겠다는 교포들의 희망이다.

그래서 이번 기고 글에는 국민들이 쉽게 납득할 있는 임나일본부의 실체와 왜 한국 주류사학계에서 이번에 가야 건국사를 부정하는 전시회로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역사적 내용을 공개하고자 한다. 

임나일본부의 시작, 일본 서기

임나일본부설의 시작은 일본서기이다. 백제가 멸망하고 백제의 주요인물들이 왜 열도로 이동하여 분국인 왜를 기반으로 다시 국가를 재건하게 되는데 바로 7세기 ‘일본’이란 국가로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제40대 텐무(天武) 천황시기에 백제인 히에다 노아레(稗田阿札)와 오오노 야스마로(太安萬侶)가 현존 일본 최고의 역사서 고사기(古事記) (712년)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720년)하게 된다.


일본서기에는 신대(神代)부터 41대 일왕 지토오(持統) 11년. BCE 660년부터 CE 697년 11월까지의 역사를 기록하였는데  30권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50대 칸무(桓武737~806) 때 ‘삼한이 일본의 모국이요, 동족’이라는 기록을 천황이 문제 삼아 초판본 제기(帝紀)와 왕통기가 분서(焚書)되었다는 기록이 제52대 사가(嵯峨)일왕의 지시로 편찬된 기록 9세기 초엽의 <코우닌시키(弘仁私記)>에 기술되어 있다. 

그 후 일본서기 원본은 1467년 5월 오우닌(應仁) 대란(大亂) 때 소실, 현재 나라현립(奈良縣立)도서관에 1669년 작성된 필사본 15권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직후 '고사기전'을 저술한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에 의해 일본서기 조작이 이루어진 것으로 일본사회에 알려져 있다.

출처 : STB상생방송

분서되고 원본이 불타버린 일본서기에는 어떤 역사가 기록되어 있었을까? 현존의 일본서기에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바로 정한론의 모티브 역사인 “신공황후의 임나정벌 이야기"이다.

신공왕후 앞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 (출처 : 환단고기 북콘서트)

[신공황후(神功皇后)] 49년(249) 봄 3월에 황전별(荒田別)과 녹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久氐)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가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고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沙白)⋅·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곧바로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跪)【두 사람은 그 성(姓)을 모른다.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장군이다】에게 정병(精兵)을 이끌고 사백⋅개로와 함께가도록 명하였다. [그리하여]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지바발(比自㶱)⋅남가라(南加羅)⋅녹국(㖨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의 7국을 평정하였다. 또한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 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때 비리(比利)⋅벽중(辟中)⋅포미지(布彌支)⋅반고(半古)의 4읍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 왕 부자와 황전별⋅목라근자 등이 의류촌(意流村)【지금은 주류수기(州流須祇)라 한다】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천웅장언(千熊長彦)과 백제 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벽지산(辟支山)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古沙山)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았다. 백제 왕이 맹세하며 말하기를,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 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 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년만년 영원토록 늘 [백제를]서번(西蕃)이라고 칭하며 봄가을로 [일본 황실에] 조공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천웅장언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구저 등을 보좌하여 보냈다. 『일본서기』권9, 「신공황후」 49년

그리고 신공황후가 공략한 임나의 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임나는 쓰쿠시국에서 2,000여 리 떨어져 있는데, 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서남쪽에 있다. (任那者, 去筑紫國二千餘里, 北阻海, 以在鷄林之西南)” 『일본서기』 숭신천황 65년조

임나의 위치는 세가지가 성립되어야 한다. ①축자국에서 2천리가 떨어져있어야 하고(筑紫國二千餘里) ②북쪽은 바다로 막혀 있어야 하고(北阻海) ③계림(신라)의 서남쪽이어야 한다.(鷄林之西南)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문구는 "北阻海"다.  阻는 막힐 조다. 북쪽이 바다로 막혀 있기에 한반도 남부는 절대로 임나가 될 수 없다. 

 

동북아역사재단 <일본서기 번역서>는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다"라고 번역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북으로 사이에 두고"로 번역을 왜곡했다. "사이에 둔다"는 한자는 없다.  임나를 한반도 남부에 비정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기로 서니 이렇게 번역을 오역해서야 되겠나?

"임나 4현이 “백제와 가까이 이웃하여, 아침저녁으로 다니기 쉽고 닭과 개 주인도 구별하기 힘들 정도” 『일본서기』 게이타이 6년(512) 12월조

"닭과 개 주인도 구별하기 힘들 정도"라는 것은 국가 수준이 아니라 '동네'나 '마을' 수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대마도나 일본열도의 일부를 나누어서 정착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이야기라고 봐야 무방하다. 

위의 역사 기록을 보면 신공황후가 공략한 임나는 결코 한반도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임나=가야라는 공식을 주장하는 자들은 결코 위의 정사기록을 인용하지 않거나 왜곡 해석한다. 

그들의 입맛에 맞는 애용자료인  ① 조작된 광개토태왕비문과 해석 ② 칠지도(七支刀)의 명문(名文)의 자의적 해석 ③{일본서기 신공황후편}의 기록 그리고 최근에는 '영산강지역의 전방후원묘나 왜계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예로 든다. 

얼마 전에는 김해 대성동 고분유적에서 화살촉이 발굴되었는데 “왜가 가야에서 철기를 수입해서 야마토 왜에서 제작하여 가야에 수출한 화살촉”이라고 해석을 했다. 참으로 어이없으면서도 지극 정성어린(?) 해석이다. 그 당시 왜가 철기 가공술이 없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인데 이렇게 얼토당토 않게 해석한다. 결국은 임나일본부의 가능성을 한 층 더 높여주는 해석인 것이다.

임나의 실제 위치

그렇기에 임나의 위치 연구는 한국, 북한, 일본 학자 간에 많이 있어왔다. 북한과 남한의 일반적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임나의 위치를 <대마도>나 <큐슈지역>으로 비정하는 반면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일인학자와 현 한국 관련 사학계는 일본서기의 내용을 인용하여 한반도 남부로 비정하는 것이 눈에 띄게 비교된다. 

 < 임나의 위치비정 비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에는 

任那者는 本在對馬島西北界하니 北阻海하고 有治曰國尾城이오東西에 各有墟落하야 或貢或叛이러니 後에 對馬二島가 遂爲任那所制故로 自是任那는 乃對馬全稱也라         
임나는 본래 대마도의 서북 경계에 위치하여 북쪽은 바다에 막혀 있으며, 다스리는 곳을 국미성國尾城이라 했다. 동쪽과 서쪽 각 언덕에 마을이 있어 혹은 조공을 바치고 혹은 배반하였다.
뒤에 대마도 두 섬이 마침내 임나의 통제를 받게 되어 이때부터 임나는 대마도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自古로 仇州對馬는 乃三韓分治之地也오 本非倭人世居地라. 任那가 又分爲三加羅하니 所謂加羅者는 首邑之稱也라. 自是로 三汗이 相爭하야 歲久不解하니 佐護加羅는 屬新羅하고 仁位加羅는 屬高句麗하고 鷄知加羅는 屬百濟가 是也라 永樂十年에 三加羅가 盡歸我하니 自是로 海陸諸倭가 悉統於任那하야 分治十國하니 號爲聯政이라 然이나 直轄於高句麗하야 非烈帝所命이면 不得自專也니라 

해석 : 옛날부터 큐슈仇州와 대마도는 삼한이 나누어 다스린 땅으로, 본래 왜인이 대대로 살던 곳이 아니다. 임나가 또 나뉘어 삼가라가 되었는데, 이른바 가라라는 것은 중심이 되는 읍[首邑]을 부르는 이름이다. 이때부터 삼한三汗(삼가라의 왕)이 서로 다투어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화해하지 못하였다. 좌호가라佐護加羅가 신라에 속하고, 인위가라仁位加羅가 고구려에 속하고, 계지가라雞知加羅가 백제에 속한 것은 이 때문이다. 영락永樂(광개토열제) 10년(단기 2733, 400)에 삼가라가 모두 고구려에게 귀속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倭를 모두 임나에서 통제하여 열 나라로 나누어 다스리면서 연정聯政이라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직접 관할하였으므로 열제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지는 못하였다.

 

< 임나 위치 : 임나는 삼가라 (계지,인위,좌호 가라로 신라,고구려,백제가 나누어 다스렸는데 이 고대의 지명들이 고대로 남아있어서 놀라움을 주고 있다>

위의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임나의 위치를 <대마도>를 명확히 규정하고 있으며 임나 분국의 위치 또한 큐수지역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실제 대마도 답사시 위의 지명과 역사유적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 대마도 임나 답사하는 세계환단학회,(사)대한사랑 일동 >

계지 가라의 계지 지명을 지적하고 있는  답사팀

그럼 다시 일본서기의 신공황후의 기록을 살펴보자. 

일본 학자들 사이에 신공황후의 가공설은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 그 이유는 명백하게 유적으로 드러나는 것이기에 거짓말을 못하는 것이다. 당시 왜의 열도 전초기지 큐슈는 선가야(先伽倻)문명이었던 고조선의 유적이 아예 도배되어 발굴되었고 그 다음이 가야계 유물들이 즐비하게 발굴되기 때문에 “왜 자체의 국가가 성립되어 한반도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를 공략했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이 되는 것이다.

<큐슈의 선주민이었던 단군조선 사람들의 청동기 유적, 九州"フ遺跡 
 「吉武高木遺跡」は福岡市の西区早良平野>

< 대마도의 선주민 단군조선 청동기 유적과 가야 청동기 유물>

특히 아직 국가단위가 아닌 100개로 소국형태를 이끌었던 야마토정권이 철기왕국인 가야를 지배했다는 자체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가능하게 역사적 논리조작을 한 인물들이 계속 출현하였다. 

(기원전 1세기경)  왜에는 100여 개의 소국이 있다 [한서] <지리지>

마쓰라국(末盧國),노국(奴國),후미국(不彌國).도마국(投馬國).왜국(倭國), 비미호(彌彌呼) 여왕이 지배하는 야마타이국(邪馬臺國) 및 구나국(狗奴國)등 여러 부족국가가 있었다.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
 

정한론(征韓論)의 명분으로 임나일본부설이 가공되다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에도 『고사기(古事記)』·『일본서기』 등의 일본고전을 연구하는 국학자들은 태고 때부터의 일본의 조선 지배를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마침내 명치(메이지)시대를 맞이하면서 명치유신의 중심인물들에 의해 정한론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들은 임나의 위치를 일본의 열도로 비정하지 않고 이를 확대 재생산하여 한반도로 끌어 맞추는 작업에 열중하여 정한론의 명분을 확보한다.

그 중심 테마는 이렇다.
“일본의 ‘야마토(邪馬壹 또는 大和)’.고대 왕국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3세기 중엽 신라를 ‘정벌’하여 신라왕의 항복을 받았으며, 4∼6세기에 야마토 왕국이 6가라(加羅)를 정복하여 임나일본부라는 일종의 총독부를 두고 직할 식민지로 약 200년간 통치하였으며 백제와 신라도 임나일본부를 통해 야마토 왕국에 신복(臣服)하여 조공을 바쳤고 고구려도 임나일본부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본래 일본 초기역사 시기 일본이 직접 식민통치하면서 다스린 한반도를 다시 일본제국주의가 다스리는 것이 올바르다는 논리이다. 고대 한국의 북쪽은 중국의 식민지(위만조선, 한사군), 남쪽은 일본의 식민지(임나일본부) 덕분에 고대 한국이 식민지로 발전한 것처럼 근대에도 일본의 식민통치 덕분에 조선의 근대화가 이루어 졌다는 논리인 것이다.


정한론 역사관을 심어준 사람이 명치유신 정신적 지주였던 죠수번의  ‘요시다 쇼인(吉田 松陰, 1830년 8월 4일 ~ 1859년 10월 27일)이었다. 그로부터 역사교육을 받고 실제 조선 땅에 들어온 이들이 아래와 같은 인물들이다.

< 정한론 역사의식의 조선 강점자>


조선의 침략자들, 조선인들에게 역사교육부터 시작하다

마침내 정한론의 꿈을 이룬 그들은 조선을 강점하고 직접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가장 역점을 두고 서두른 것은 조선인의 복지가 아니라 역사교육이었다. 
당시의 역사자료를 연구하다보면 1920년대와 1930년 대 초까지 조선인들이 직접 만든 역사서가 계속 출간되어 나왔다. 그 역사의 첫 시작은 100% 단군조선 실제 역사였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면서 일본열도에서 이미 만들어진 조선사 교육의 시점을 저울질하다가 1919년 3.1만세혁명의 충격적 저항과 독립운동단체들의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피부로 느끼면서 조선인들 역사교육을 급하게 본격적으로 실시하는데 대상은 조선 아동부터였다. 한국인들이 대부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조선사를 통해 한국사가 왜곡 조작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그건 100% 거짓정보이다. 일제는 이미 조선침략 전에 모든 준비를 했었다.

1920년부터 조선인에게 가르친 조선역사

일본에서부터 일본 제국주의 역사가와 정치인들이 고민한 조선사의 중요부분은 “단군 부정과 임나일본부 인정”의 역사관이었다. 조선사의 단군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자로 황국사관의 1대 신무(진무)천황이전의 건국자였던 것이다. 단군을 제거하기 위해 중국인 위만과 한나라 식민지 한사군을 대치하는 방식으로 조선사는 그들이 정립하였다. 그리고 고대 조선반도가 일본의 영향권이었던 던 것 즉 식민지권이었다는 논리를 위해 신공황후의 한반도 공략설로 확대 재생산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그러한 내용도 이미 틀을 정립하여 조선사교육의 지침이 수립되었다.

그 실상을 지면으로 그 상세한 것을 처음으로 공개하고자 한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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