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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칼럼

[특별기고] 한사군 낙랑 평양설 이제는 폐기해야

이제는 폐기할 때가 되었다. 벌써 게임 끝난 한사군 낙랑 평양설, 왜 대한민국 역사학계는 붙들고 있는가?

이매림 (사) 미사협 공동대표 (사) 대한사랑 수석본부장의 특별 기고글

출처 : STB상생방송

최근 모교수의 낙랑군 연구에 대한 중요한 발표가 있었다. 내용인 즉은 “평양의 낙랑군은 한나라 중앙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 운영을 했다”는 것이다. 왜 이런 발표가 나왔는지 그 배경은 국민들이 알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평양의 낙랑군 주장의 배경은 조선시대 유학자 중에서도 가장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학자들에 의해 그 실마리가 주어졌다. 그들은 현장 답사도 해보지도 않았고 그냥 앉아서 붓대 들고  패수의 위치를 한반도로 끌어들여 적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패수 위치도 그렇게 기록된 것이다.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은 이런 행태를 보고 “애닯도다! 후세에 와서 경계를 자세히 모르게 되고 본즉 함부로 한사군의 땅을 압록강 안으로 죄다 끌어들여 억지로 사실을 구구하게 끌여 붙여 대여 놓고는 그 속에서 패수(浿水)까지 찾게 되어 혹은 압록강(鴨綠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청천강(淸川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고 혹은 대동강(大同江)을 가리켜 패수라 하기도 하여 이로써 조선의 옛 강토는 싸움도 없이 쭈글어 들고 만 것이다.《열하일기(熱夏日記)·도강록(渡江錄)》”라고 개탄을 했다.

이 박지원의 기록대로 유학자들이 빌미를 제공하여 조선총독부 학자들이 틀로 만들어 놓은 한반도내 패수 설을 주장하며 한국 주류사학계에서 지금도 계계승승 이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내 패수 설은 크게 3개로 나뉘는데 더 자세히 논해 본다면 조선시대 유학자 정약용과 일제 관학자 쓰다소우키치(津田左右吉)는 고구려 수도 평양의 위치를 현재의 평양으로 위치를 비정하여 압록강 패수 설을 주장했다. 

물론 실제 1차 사료 문헌 속의 평양은 현재 위치의 평양이 아니다. 이에 대해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의 평양만 알고 있으므로, 기자가 평양에 있다하면 또한 지금의 평양으로만 믿고, 정전이 평양에 있다하면 역시 지금의 평양으로만 믿어서, 만일 누가 봉황성이 곧 평양이라고 한다면 크게 놀랄 것이다더구나 요동에도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고 하면, 이는 해괴한말이라고 나무랄 것이다."라며 또 다른 위치의 평양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최근 연구를 통해서 평양이 여러 곳임이 밝혀졌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부터 조선인들에게 역사교육을 통해 장수왕의 평양천도 위치를 현재의 평양으로 가르치도록 지침을 세워 실시하였다(尋常小學國史補充敎材敎授參考書(심상소학국사보충교재교수참고서)).

조선사편수회 간사였던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는 세종실록지리지 와 삼국사를 인용하며 대동강 패수 설을 주장하였으며 이병도는 갈석산이 있다는 수성(遂城)현을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으로 ‘비정하고 싶다’고 하면서 청천강 패수 설을 주장하였다

아직도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이병도의 청천강을 패수설’은 노태돈, 송호정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이 주장을 근거로 여러 만리장성 지도(위키피디아 등)와 중국 정부에서 지원해 만든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집(中國歷史地圖集)’에는 진나라의 만리장성이 한반도 평양까지 힘차게 그려져 있다. 

 ▵만리장성 지도 (위키피디아 중국어판,한국어판,영어판 모두 이 지도가 들어가 있다,연진한 시절에 만리장성이 한반도 깊숙히 들어와 있다)

언제 진시황이 한반도 평양에 왔는지는 이 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한번 소설로 발표해야 할 듯 싶다. 어떤 이는 이를 부정하는 주장을 하는데 제발 얼굴가리고 아웅 하지 마라. 중국에서 만리장성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고 주장할 근거는 없다. 그런데 왜 그렇게 그렸는지 뻔한데 왜 자꾸 입술에 침 발라가며 거짓말 하는가? 그러니 국민들이 그들을 “또라이(또 lie)”짓 한다고 하는 것이다.

 ▵담기양의 중국역사집에 그려진 만리장성

그런데 정작 중국의 문헌은 모두가 한사군 위치의 한반도 밖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특히 낙랑군의 위치를 정확히 하는 주 포인트는 ‘낙랑군’에 대한 기록만이 아닌 패수와 갈석산이 필요충분 조건으로 따라 붙는다. 이 세 가지 종합 셋트가 구비되어야 갈석산의 위치, 패수의 위치, 낙랑군의 위치가 밝혀지는 것이다. 

구글 갈석산 검색 위치 지도 : 갈석산의 위치가 현재와는 조금 달랐더라도 모든 위치가 한반도와는 거리가 먼 곳이다.

대동강과 청천강 주변에 갈석산이 있는가? 그리고 그 갈석산은 수나라 양제나 당나라 태종 등 중국의 역대 9명의 황제가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그들 주장대로라면 수양제와 당태종이 당시 고구려 땅에 있는 갈석산에 올랐다는 건데 이건 100% 타임머신과 터미네이터 보다 더 흥미로운 환타지 역사다. 최근 환단고기를 환타지 소설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이것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 기록으로 본다면 “패수는 낙랑군 루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 바다로 들어 간다”(수경/전한시대)고 기록하고 있고 설문해자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현 압록강, 대동강, 청천강은 현재 서쪽 바다로 들어가는 강인줄 아는데 언제쯤 동쪽 바다로 흘러갈지 모르겠다. 

출처 : zdic.net

이런 난처한 질문을 받으면 주류사학계에서 자신감 있게 꺼내드는 카드가 있었다. 바로 실증사학 고고학이다. “그럼 중국 1차 사료 주장대로 그곳에서 낙랑군 유물이 나왔냐? 고 따져 묻는다. 과거 이런 질문에 민족사학자들은 정확한 답변을 못했다. 그 때까지 그랬다.
 

1997년 중국 요령성에서 한사군 중 임둔의 태수장 봉니(封泥)가 발굴되었고 최근 북경시 대흥(大興)구 황춘진(黃村鎭) 삼합장촌(三合莊村) 일대의 고대 무덤군에서 한사군 유물 출토되었는데 주인공은 ‘한현도(韓顯度)’라는 사람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그의 무덤에는‘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이라는 신원 증명문구가 적혀 있었다. 

 ▵북경근처 낙랑군 유적 발굴 현장 삼합장촌(三合莊村)

위의 북경 쪽 낙랑군관련 유적발굴은 국내 한사군 평양 설을 주장했던 학자들을 멘붕 시켰다. 국내 관련 학자들이 이제는 생존전략을 반드시 세워야 할 필요를 요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 중 하나가 북경지역이 갖는 역사의미였다. 

북경부근에서 낙랑군 관련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설상가상으로 평양낙랑군유적 발굴 최고의 공덕자 세키노 타다시의 일기장이 발견되어 더욱더 평양 낙랑군 주장자들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그동안 주류사학자들이 모든 중국의 1차 사료까지 완전 무시하고 낙랑군 평양을 외칠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낙랑군 유적발굴”이란 카드였는데 그 유적 발굴자의 일기장 기록이 무간지옥으로 이끄는 고속도로가 되어 버렸다.

북경에는 유리창(瑠璃廠)이란 유명한 곳이 있다. 북경구경하면 누구나 다녀오는 코스 중 하나이다. 유리창은 옛날부터 골동품거리가 조성되어 많은 도굴품들이나 발굴품들이 거래되는 장소가 있는 곳으로 지금도 북경 관광 필수코스 중 하나다.

 ▵북경 유리창 거리

그의 일기장에는  대정 7년(1918)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샀다. 유리창의 골동품 점에 는 비교적 한대의 발굴물이 많아서, 낙랑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갖추어 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했다. (二十二日晴 午前, 竹村氏 瑠璃廠 往古玩購. 瑠璃廠 骨董鋪 比較的漢代 發掘物多, 浪出土品大抵皆在, 余極力之蒐集.)

대정 7년(1918) 3월 20일 맑음 북경
서협 씨의 소개로 중산용차 씨(지나 교통부 고문, 월후 출신)를 방문했다. 그의 소개로 우편국장 중림 씨를 방문하여 우편국 촉탁인 문학사 흑전간일 씨의 동료부터 유리창 의 골동품 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한대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했다.
(大正七年三月二十日晴 北京西脇氏ノ紹介二ヨリ中山龍次氏(支那交通部顧問,  越後  出身)ヲ訪ヒ,同氏ノ紹介二ヨリ郵便局長中林(空白)氏  ヲ訪ヒ,郵便局囑託文學士黑田幹一ノ東道ニヨリ瑠璃廠ノ骨董店ヲ廻覽シ, 朝鮮總督府博物館ノ爲メ漢時ノ 發掘品ヲ三百餘円ヲ購フ.)라고 기록 되어 있었다(자료 출처: 문성재 교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세키노 타다시 (関野 貞 , 1868년 ~ 1935년)

물론 현재 주류사학계는 이를 부정한다. 조선총독부에서 세키노 타다시를 통해 입수한 한나라 유물은 연구용 보관용으로 사들여 현재 국립중앙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그게 말이 되는지. 당시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세키노 타다시만 가면 평양의 무덤이 저절로 열리면서 유물들이 ‘나 여기 있어' 라고 발굴품들이 스스로 쏟아져 나올 정도로 신의 손, 마이다스의 손을 가진 세키노 타다시였다. 그렇게 평양에 낙랑군 유물이 넘쳐나게 발굴되고 있었는데 조선총독부에서 왜 북경의 골동품 거리에서 거액의 한나라 유물을 구입해 갔을까? 누가 봐도 어불성설이다. 북경 유리창과 현재의 평양은 거리상 당시 장거리로 떨어져 있다. 누가, 왜? 인건비나 운반비를 생각하면 비효율적인 평양 먼 거리의 한나라 유물을 북경 유리창까지 가져가 팔려고 했을까? 당시 명품도 아니었을 것인데. 장사치라면 그렇게 하겠는가? 차라리 그 북경주변 지역의 발굴품이나 도굴품이기에 유리창에 완비되어 있던 것이 아닐까? 국민들이 판단하면 끝나는 게임이다.

그리고 그동안 평양 발굴품 중의 하나로 자신감 있게 주장했던 것이 유물이 최근에 그 실체가 밝혀지면서 더욱 관련 학자들의 동맥경화를 유발하게 만들었다.

평양 낙랑군 태수의 봉니라고 주장한 유적이 현장에서 발굴한 게 아니라 사들였다는 것이다. 허 이럴 수가 있나?

“1922년 10월 30일,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 봉니를 고가인 150원에 매입”
“1931년 1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태수장’ 봉니를 100원에 매입”
“1934년 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낙랑대윤장’ 봉니를 100원에 매입”
 
(자료 출처: 문성재 교수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그리고 최근 평양낙랑군이 한나라 중앙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독자 노선을 걸었다고 말도 안 되는 “가장 핫hot!” 한 주장을 할 수 밖에 없는 유물이 이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낙랑 금동허리띠 (사진=한문화타임즈)

▵금제 허리띠고리(金製鉸具), 낙랑 1세기, 길이 9.35 cm, 폭 6.3~4.6 cm, 국보 89호

평양 낙랑군 유물품 중 최고의 꽃, 하이라이트라고 평가받아 국보89호로 등재된 유물이다. 이 유물의 발굴사에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은 평양에서 중국 한(漢) 왕조의 식민지였던 낙랑군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하여, 낙랑고분에 대한 발굴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일제 관학자였던 일본 도쿄제국대학건축학과 세키노 타다시(關野貞) 교수가 발굴을 담당하였는데, 이 금제 허리띠 고리를 발굴하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국립중앙박물관의 관련 글 중)”라고 기술되어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대관-국보 금속공예편>(2008년)에서도‘낙랑 최고위 인물’이 차던 허리띠라고 표현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재 정보에서는 이 유물의 국적을 ‘낙랑’이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 충격적인 결과가 발표되었다. 전문가들의 평가는 이렇다. 이 역사적 유물에는 그 당시 최고의 기술들이 적용되었다. 금판을 두드려서 입체적 형상을 표현하는 단조 타출기법打出技法은 금이나 은과 같이 늘이기 쉬운 전연성展延性이 좋은 금속을 이용하여 공예품을 제작할 때 사용되는 기법이다. 금선(얇은 황금 실 모양)과 금 알갱이를 금속 표면에 붙여서 장식하는 누금세공기법鏤金細工技法도 사용되었고 그리고 (물방울 등 특정 모양의) 난卵집을 만들고 작은 보석(터키석 등)을 끼워 넣는 감옥기법嵌玉技法도 사용하였다는 것인데 황금 허리띠 고리를 만든 3가지 기술 모두 그 당시 한나라에는 없던 기술이라는 것이다.

 얇은 금속판을 단조 및 타출하여 장신구를 만드는 누금세공기법은 기원전 7세기 이전 중근동中近東에서 시작되어, 기원전 7~6세기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고도로 발달했고 금은 세공품들은 기마민족들의 초원길을 통한 동서 교류를 통해서 대륙 동쪽까지 전해지고, 세공 기술도 같이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런 유사한 허리띠가 다른 서장지역에서도 발굴되었다.


즉 한사군 낙랑군 유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둘 중 하나였다. 세키노 타다시가 북경 유리창에서 잘못 사와서 ‘발굴했다고 감격해 하면서 쑈를 했든지’ 아니면 틀림없이 평양 그 지역에서 발굴한 유물인데 한나라 낙랑군의 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낙랑군 유물이 아님이 밝혀져 지금은 국보자격도 박탈해야 한다는 논란의 골치 아픈 유물이 되었다. 결과가 이러니 국립중앙박물관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는데 더욱 논란을 키우는 결과를 불러왔다.

▵ 낙랑군 유물이 아니라고 밝혀짐에 따라 삼한시대 유물로 표기한 안내문

졸지에 평양 낙랑군 최고위층 유물이 삼한시대 유물로 둔갑했다. 그렇다면 현 평양은 삼한시대 어느 나라가 위치한 곳인가? 배가 더 산으로 올라가는 논란거리가 생겼다. 흔히 우리는 삼한이라 하면 남부지역 아래의 삼한(三韓)으로 세뇌되어 있다. 즉 현재 학교 국사교과서에는 평양이 삼한이 아니다. 주류사학의 거짓말 역사가 들통이 나는 순간이다. 삼국시대의 삼한은 역사서로 본다면 현재 남부의 삼한이 아니다. 

흔히 삼국시대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삼한일통(三韓一統)의 삼한은 당 시대기록으로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 전 영역을 지칭하고 있다즉 단군조선의 삼한관경의 범위를 말하는 것으로 요동 만주, 흑룡강, 한반도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광복 후 이 삼한을 한반도 남단의 삼한이라고 조선총독부에서 조작한 것을 그대로 국민들에게 세뇌 시켜놓았는데 이 유물 논란 덕분에 삼한의 원래 위치를 다시 보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낙랑군 허리띠는 일본학자들도 그렇고 상명대 박선희 교수도 한나라 유물이 아님을 명확히 하였는데 이를 무시하고 그동안 국보로 까지 등재시켜 자기들의 의지(?)를 관철시킨 것이다. 

최근 연세대 삼국유사도 국보로 등재시킨 주목적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에서 잡아 놓은 한국사 시작점인 “환국”을 부정하기 위한 것으로 그들 사학의 홍보용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이 몸 담았던 한국독립당에서 세워 놓은 한국사의 맥을 부정하고 조선총독부 사관을 고수하고자 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지 그들의 뼈 속까지 분석이 필요할 것 같다. 정상적인 유전자 구조 소유자라면 이런 일을 저지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북경근처 낙랑유적 발굴, 세키노 타다시 일기, 평양 발굴 유물 진위 논란, 낙랑군 허리띠 논란 등으로 최대의 위기에 빠진 낙랑군 평양지지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가 최근의 카드인것이다. 평양지역에서 발굴되었다고 주장한 낙랑 유물이 낙랑유물이 아니라고 밝혀지니 딱 하나의 카드 즉 “그 유물은 낙랑유물이 아닌 것은 맞는데 그것은 바로 평양 낙랑군이 한나라 중앙정부의 제재를 받지 않고 독자적인 운영을 해서 여러 나라로부터 교역한 물건이다” 라는 것. 말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하지 않은 주류사학 일부는 “ 이 유물은 한나라 황제가 변방의 제후(태수)들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나라에도 없었던 최고급 기술로 만든 유물, 그것도 황제 자신도 사용해 보지도 못한 최고의 기술로 만든 물건을 선물로 줬다는 주장도 앞 주장과 쌍벽을 이루는 덤앤더머 주장인 것 같다. 

그럼 이 평양낙랑군에서 발견된 낙랑군유물이 아닌 유물의 실체는 무엇인가? 정답은 아주 간단하다.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을 포기하고 원래 역사로 보면 된다. 한국의 정사“삼국사”에는 당시대 평양에는 낙랑군이 아닌 낙랑국이 있었다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그 유명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야기 주인공이 나오는 낙랑국이다.

삼국사에는  “낙랑의 왕 최리(崔理)”에 대한 기록과 고구려가 32년에 낙랑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신라 본기는 37년에 낙랑의 백성 5천여 명이 신라로 와서 투항하였다는 기록과 고구려 본기에도 37년에 낙랑을 멸망시킨 기록이 있어 평양의 낙랑국과 한사군의 낙랑군을 다르게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의 출발이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음을 증명한다. 고구려와 백제가 여러 번 다투었다는 패수 기록은 현재 주류사학에서 주장하는 패수의 위치로는 절대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위의 금제 허리띠가 세키노 타다시의 평양 발굴품이라는 증언을 믿어주고 판단한다면 저것은 한사군 낙랑군의 유물이 아니라 최리의 낙랑국의 독자기술 유물이든지 교역품이 되는 것이다. 너무 간단하지 않은가? 하지만 현 주류사학계는 최리의 낙랑국으로 인정하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그들의 생업과 연결된 학문이기에 낙랑국임을 알아도 인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동안 국민들을 기만한 것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이를 인정하는 순간 관련 사학자들은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학자로서의 위치는 부여되지 않을 것이기에 그대로 밀고 나갈 수밖에 없다. 숙명인 것이다.  

그렇기에 반도사관의 틀과 고대 조선의 중국 식민지설(위만, 한사군)을 위해 억지로 평양의 낙랑국을 낙랑군이라고 생떼를 쓰며, 중국문헌 기록에는 없는 평양낙랑군 주장을 위해 가장 강력한 평양 낙랑군유물 출토를 증거로 제시했었다.

하지만 그 출토 주요 유물도 이젠 평양 낙랑군 유물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고 주요 유적유물이 최근 중국의 1차 사료 문헌대로 북경근처와 요서 쪽에서 계속 발굴되니 이 이상 낙랑군 존재근거가 성립될 수가 없는 상황이다. 

평양지역을 직접 파헤쳐 고고학 조사를 다시 했던 북한 학계는 어떤 결과를 발표했을까? 최근 모교수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 북한 학자들이 평양낙랑군 유물을 인정했다고 거짓말 논문을 썼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문제로 당장 파면시키고 학계에서 영원히 수장시켜야 되는 것 아니냐는 국민들 정서가 형성되고 있다. 그는 그 논문으로 교수직에 앉은 것으로 소문이 나있다. 이 문제는 정확한 팩트를 가지고 다음에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연구(2001. 4. 3 발간, 북한 사회과학원)’의 발표 연구결과를 보면 조선총독부는 세키노 타다시를 앞세워 평양인근 100여기의 무덤을 파헤쳐 그 유물과 유적을 한의 낙랑유물로 변조하여 ‘한나라 낙랑군 재 평양설’을 주장하였고 북한은 광복 후 조선 총독부보다 30배가 많은 3천여기의 무덤을 발굴 정리한 결과로 평양일대 유적은 고조선을 이어 받은 ‘최 씨의 낙랑국 유적’임을 밝혔다는 것이다.

▵ 평양 낙랑은 우리 역사의 낙랑국 임을 발표한 북한 학계 보도기사  (중앙일보 1995.5.8.)

또한 현재 주류사학자들이 낙랑군 존재근거로 주장한 점제현신사비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점제현신사비 화강암의 생성 년대는 1억 2천 9백만 년±1천 3백만 년으로 현재 신사비가 놓여져 있는 지역의 화강암 연대기인 온천 화강암의 생성 년대 1억 4백만 년±1천 2백만 년, 오석산 화강암의 생성 년대 1억 백만 년±1천 2백만 년, 마영 화강암의 생성 년대 1억 7백만 년±1천 2백만 년과는 차이가 많이 나는 것으로 이 지역의 화강암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즉 다른 지역에서 가져온 것이라는 것이다. 

"옛 사람들은 비를 세우기도 하지만 산의 바위를 쪼아내고 그곳에다 꽉끼어 맞는 비를 세우기도 하였어요 갈석산에 보면 신사비 크기의 바위를 쪼아낸 자국이 있으며 신사비의 돌을 조금떼어내고 갈석산의 돌을 떼어서 맞추어 보면 딱 맞아요. 일본인들이 배로 실어다가 10리 밖에 못와서 그곳에 뉘어놓고 놀고 있는 어린이들을 배경으로 비의 사진을 찍어서 그곳이 낙랑의 점제현이다.  그러니 확실히 낙랑군이 아니냐라고 주장했던 것이지요" (한국 구석기 고고학의 개척자 손보기 전 연세대 교수(1922~1910)의 1990년 1월 17일 한배달 대담내용)

그리고 북한 학계는 최종적으로 낙랑문화가 ‘고조선 사람들의 후예들이 남긴 문화’이고 ‘낙랑군 평양 설’은 ‘고고학적으로 근거 없는 주장’이라 일축했다. 

 ▵가짜 유물도 들통 난 점제현 신사비

과거 조선총독부가 남긴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을 면밀히 검토한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실수인지 아직 연구가 진척되지 않아 몰라서 그랬는지 낙랑군 유물로 소개하고 있는 한 장의 유적 사진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다. 청동기 유물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기물이다.

 ▵조선총독부의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조선고적도보에 실려 있는 낙랑군 급대방시대유적

위 사진을 잘 살펴보라. 무슨 유물인지 알 수 있겠는가? 그들은 한사군의 유물로 소개하고 있다. 필자는 홍산, 고조선, 가야 등 모든 유물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연구하여 왔었다. 위의 유물은 단군조선시대 후기 동검인 세형동검과 손잡이 아래 꽂이, 그리고 단군조선시대 마차를 구성하는 청동기 부품이다. 박물관에 발굴품이 전시되어 있다.

 ▵평양 상리 발굴 유물

 ▵고조선 마차구조(출처 : 역사스페셜)

▵한나라 유물이 아님을 밝히는 일본고고학 교수

고조선유물을 한사군 유물로 인식하여 도보를 실을 정도라면 아직 연구가 체계적으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총독부가 조선사의 틀을 고대 한사군 식민사관 틀을 정하기 위해 서둘렀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렇듯 문헌사적, 고고학적 최대의 위기를 맞은 주류사학계는 아래 세 가지 물음에 답해야 할 것이다.

하나, 평양낙랑군설을 과감히 포기하고 고조선 역사를 다시 연구할 것인가?

둘째, 평양 낙랑군 설을 유지하며 ‘낙랑군의 독자적 세력화’주장을 통해 새로운 생존의 개척로를 만들 것인가?

셋째, 어차피 엎질러진 물, 북경 쪽에 낙랑군 유적 발굴되었으니 과거 이마니시 류가 주장한 ‘서기313. 평양에 있다던 한나라 낙랑군이 요서지역으로 이사 갔다’는 교치설 주장을 통해 제 2의 활로를 확보할 것인가?

세 가지 길 중에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지 응답하라! 

한국 주류사학자들의 주장인 평양 갈석산과 낙랑군 주장으로 일본과 중국의 역사지도에 한반도 북부는 漢나라, 魏나라, 晉나라의 고대 식민지 영토로 표기되는 한중일 역사전쟁에서의 최대 위기상황에서 올바른 역사를 주장함으로써 이제 조선총독부 식민사학을 추종한 역사의 원죄를 씻을 수 있는 진짜 애국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영원한 철밥통을 위해 진실을 외면하고 부정하면서 다음 후세들에게 책임을 맡기고 역사의 무간지옥으로 가려는가?

과감히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평양 낙랑군은 철폐시키는 것이 올바른 역사학자의 자세가 아닌지, 학자적 양심이 있으면 답하라. 

박찬화 multikore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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