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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덕일의 역사를말하다]주갑제라는 요술방망이와 ‘일본서기‘ 2. 우리역사 바로알기 │ 한국사 왜곡의 결정적 사건 8가지 - 일본 제국주의의 大韓 上古史 역사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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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덕일의 역사를말하다]주갑제라는 요술방망이와 ‘일본서기‘
[출처] 경기신문 (https://www.kgnews.co.kr) 2020. 09. 14
▲ 일본서기는 연대부터 맞지 않는 희한한 역사서다. 편찬자들이 일부러 연대를 조작했다.
연대부터 맞지 않는 ‘일본서기’
‘일본서기’를 이해하려면 먼저 주갑제(周甲制)를 이해해야 한다. ‘주갑(周甲)’이란 만 60년을 뜻하는 환갑(還甲)과 같은 뜻이다. 동양 고대 역법(曆法)의 간지(干支)가 한 바퀴 순환하는 것이 주갑이다. 간지(干支)는 천간(天干)과 지지(地支)로 나뉘는데, 천간은 갑을병정((甲乙丙丁)…등의 열개이고, 지지는 자축인묘(子丑寅卯)…등 열두 개다. 천간에서 갑(甲)을 따고 지지에서 자(子)를 따서 첫해가 갑자년이고, 둘째 해가 을축년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간지가 한 바퀴를 돌아 만 60년이 되는 것을 주갑(周甲) 또는 환갑(還甲)이라고 한다. ‘일본서기’는 역사서의 기초 중의 기초인 연대부터 맞지 않기 때문에 주갑제를 이용해 2주갑 120년을 끌어올려 연대를 맞춰야 한다는 희한한 논리가 주갑제다. ‘일본서기’의 연대가 맞지 않는 것은 편찬자의 실수가 아니라 처음부터 마음먹고 연대를 조작한 것이다.
반면 ‘삼국사기’ 연대는 놀랄만큼 정확하다. 1971년 공주에서 우연히 무령왕릉 지석(誌石)이 발견되었는데, 무령왕이 “계묘년 5월 병술 삭(朔) 7일 임진일에 붕어하셨다”말하고 있다. 서기로 환산하면 523년 5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는 뜻이다. ‘삼국사기’는 무령왕이 ‘재위 23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어서 사망한 해는 물론 달까지 정확하게 일치했다. ‘삼국사기’의 정확성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세상이 다시 한번 놀랐다. ‘일본서기’는 초대 신무(神武)의 즉위해를 서기전 660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은 일본 국민들도 안다. 서기전 660년에 일본에는 나라 자체가 없었다. 일본학자들도 ‘일본서기’의 연대가 거짓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일본서기’의 연대를 맞추는 온갖 기묘한 발상이 동원되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주갑제다. 일본에서는 주갑제 대신 2주갑인상(二周甲引上)이란 표현을 쓰는데 2주갑, 즉 120년을 끌어올려 연대를 다시 계산해야 한다는 논리다.
▲ 1912년 미야자키 사이토바루 고분군을 발굴한 기념사진. 오른쪽에서 다섯번째가 이마니시 류.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는 ‘삼국사기’는 가짜고, ‘일본서기’는 진짜라고 거듭 우겼다.
초고왕은 가짜고, 근초고왕은 진짜다?
주갑제의 가장 중요한 사례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백제 초고왕의 사망기사다. ‘일본서기’ 신공(神功) 왕후 55년에 “백제 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百濟肖古王薨)”고 나온다. 신공 55년은 서기 255년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서기 255년은 백제 고이왕 22년이다. ‘삼국사기’는 고이왕은 재위 22년(255) 9월 신라를 공격해서 괴곡(槐谷)에서 이기고 신라 장수 익종(翊宗)을 전사시켰다고 나오지 초고왕이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 등은 없다. 그런 사실이 없었기 때문이다. ‘삼국시기’에서 말하는 초고왕(肖古王)은 백제 5대왕이다.
그런데 초고왕은 서기 214년 세상을 떠났다. ‘일본서기’가 세상을 떠났다는 41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일본서기’는 백제왕 이름도 틀렸고, 사망 연대도 틀렸다. 그러자 일본인 학자들이 기발한 발상을 했다. ‘일본서기’를 2주갑, 120년 끌어올려 보자는 것이다. 서기 255년에 120을 끌어올리니 서기 375년이 되었다. 그러자 로또에 당첨되는 것 같은 일이 발생했다. ‘삼국사기’는 백제 근초고왕이 재위 30년 겨울 11월에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해가 바로 서기 375년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는 375년에 세상을 떠난 임금이 ‘근’초고왕이지 초고왕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상관없었다. 일본인 학자들은 ‘일본서기’의 초고왕이 ‘삼국사기’의 근초고왕이라고 우겼다. ‘삼국사기’는 근초고왕이 세상을 떠난 바로 그해(375) 그달에 후사 근수구왕(近仇首王)이 즉위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일본서기’는 서기 256년에 “백제 왕자 귀수(貴須)가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초고가 근초고왕이고 귀수가 근구수왕이라는 것이 일본 제국주의 사학자들과 이들을 추종하는 남한 강단사학자들의 교리다. 남한 강단사학계의 태두 이병도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은 각각 초고왕과 구수왕에 근(近)자를 붙여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5대 초고왕과 6대 구수왕은 모두 가짜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는 근거? 그런 것 없다. 하늘같은 스승인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신봉하는 것뿐이다.
▲ 나이토 토라지오. 도쿄대학파에 맞서 교토대학파를 이끌면서 야마대국이 큐슈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삼국사기’ 불신론을 발명하다
주갑제가 사실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중요한 것은 ‘일본서기’ 기사가 사실인지 여부를 판정하는 기준서가 ‘삼국사기’였다는 것이다. 일본이 메이지(明治) 이후 군국주의로 달려가기 전까지는 일본학자들도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일본서기’의 사실 여부를 판정해왔다. 그런데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오타 아키라(太田亮),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이 사실과 거꾸로 말하기 시작했다. “‘삼국사기’는 가짜고 ‘일본서기’는 진짜다”라는 주장이다. 근거? 그런 것 없다. 자신들이 그렇게 본다는 억지뿐이다.
나이토 도라지로(內藤虎次郞:1866~1934)라는 역사학자가 있다. 일본 역사학의 양대 축이 도쿄제대(東京帝大)와 교토제대(京都帝大)인데, 교토제대 중심의 교토학파를 이끈 역사학자다. 일본의 도쿄대는 순혈주의를 고집해 도쿄대 출신이 아니면 교수가 되기 어렵지만 교토대는 실력만 있으면 출신 학교를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의 노벨상 수상자는 대부분 교토대에서 나온다. 나이토 토라지오는 아키다(秋田) 사범학교 출신으로 교토대 교수가 되었다.
그는 일본 고대사 논쟁 중에 도쿄대와 교토대가 맞붙었던 야마대국(邪馬台國) 위치 논쟁에서 교토대학파를 이끌었다. 중국의 ‘삼국지’ 위지(魏志) 왜인전에 나오는 왜 여왕 비미호(卑彌呼)가 다스렸다는 야마대국의 위치가 어디냐는 것이다. 제국주의 사관에 충실하던 도쿄대 출신들이 야마대국이 나라(奈良) 근처에 있었다는 기내설(畿內說)을 내세웠고, 나이토 토라지오가 이끄는 교토학파는 지금의 큐슈에 있었다는 큐슈설(九州說)을 주장했다. 이 나이토 토라지오가 조선총독부 이마니시 류의 ‘삼국사기’ 불신론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원래 아방(我邦:일본)의 고대사연구가는 ‘일본서기’의 기년에 의심을 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유력한 방증(傍證)으로서 조선고사(朝鮮古史: ‘삼국사기’등)의 기년을 참고하고 더욱이 그 기사의 내용까지도 조선고사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마니시 류 박사가 양국 고사(古史)의 근본적 연구 및 ‘삼국사기’가 이용한 지나사적(支那史籍:중국사료) 등의 연구로부터 종래 연구법을 일변하여 일본고사(‘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사실(史實)에 무게를 두게 되었다”
나이토 토라지오의 말은 이런 내용이다. 이마니시 류 이전에는 일본 학자들도 ‘일본서기’ 연대에 의심을 품고 그 연대뿐만 아니라 그 내용까지도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삼아 연구했다는 것이다. 2주갑 인상론 운운하는 이야기도 ‘삼국사기’를 기준으로 삼아서 ‘일본서기’ 연대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쓰다 소키치, 오타 아키라, 이마니시 류 등이 ‘삼국사기’는 가짜고 ‘일본서기’는 진짜라고 우기기 시작했는데, 이 억지가 통해 ‘삼국사기’는 가짜로 몰리고 ‘일본서기’가 사실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쓰다 소키치나 이마니시 류가 ‘삼국사기’ 불신론을 주장한 이유는 임나일본부를 사실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의 이 허무맹랑한 논리가 아직까지도 남한 강단사학계에서는 하나뿐인 정설이다. 평생 이 분야를 연구한 고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의 말처럼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원문 기사 보기
https://www.kgnews.co.kr/news/article.html?no=602769
2. 우리역사 바로알기 │ 한국사 왜곡의 결정적 사건 8가지
- 일본 제국주의의 大韓 上古史 역사왜곡
[출처] 월간개벽 2020. 7월
일제 식민사관의 틀(1)
우리는 1910년 한일합방을 통해 우리 손으로 역사를 기술할 수 없는 식민지植民地 신세가 되었다. 식민지는 심을 식植 자에, 백성 민民 자, 땅지地 자다. 타민족의 땅을 빼앗아 자국민을 이주시켜 지배한다는 뜻이다
일제는 전 세계 어떤 제국주의보다 악독했다. 조선을 영원한 식민지로 삼기 위해 조선 시대 수서령을 뛰어넘는 악독한 불칼을 휘둘렀다. 이때 조선의 역사, 문화가 담긴 20만 권의 서적이 불태워졌다. 이 땅에 남아있던 소중한 대한사관의 책들도 다수 사라졌다. 일제는 그것도 모자라 우리의 두 손을 묶고 눈을 가린 채 ‘일본식 조선사’를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소위 서양에서 배워 온 실증사학을 앞세운 조선총독부의 조선사 편찬사업이다. 지금의 화폐가치로 수백억에 달하는 거금을 들여가며 일제는 대한의 역사를 난도질했다. 대한의 역사를 자기들이 원하는 틀로 규정했다.
결론적으로 일제는 한민족 역사의 무대를 한반도로 좁히고, 북쪽은 중국 식민지, 남쪽은 일본 식민지라는 큰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에 맞는 사료를 일반화하고, 유물을 스스럼없이 조작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평양 한사군설과 임나일본부설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선사는 일제의 입맛에 따라 주물러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이 어떻게 대한의 역사를 난도질하고, 왜곡 날조했는지 제대로 모르는 대한인이 많다.
더 늦기 전에 일제가 뿌려놓은 역사 왜곡 바이러스를 찾아내 치료해야 한다. 악독한 식민사관 바이러스가 이 땅의 자손을 좀비로 만들기 전에 백신을 만들어야 한다. 대한역사와 정신을 말살하려 한 식민사관의 정체와 그 역사관에 눈떠야 한다. 우선 일제강점기 교과서를 분석해 보고,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규정한 교수지침과 주요발언들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이제 일제가 만든 식민사관의 뿌리를 찾아 떠나보자.
일제강점기 시절 교과서
독자들이 쉽게 일제강점기의 역사관을 알 수 있는 길은 없을까? 가장 쉬운 길은 아마 일제가 교육현장에서 활용한 ‘초등학교 교과서’를 통해 확인하는 길일 것이다. 이에 이번 호에서는 일제강점기 교과서를 집중적으로 살펴볼까 한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시대별 교과서를 알 수 있는 ‘우리 역사넷’을 운영하고 있다. 거기서 일제강점기 교과서의 원본도 공개했다. 일본어를 한국어로 번역해 놓아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큰 맥을 잡을 수 있다. 그럼 일제강점기 소학교 역사 시간으로 떠나보자.
일제강점기에 교과서는 아동용과 교사용 두 종류가 있다. (1920년에 발행한 1권 120쪽, 1922년에 발행한 2권 503쪽 분량임)
우선 이름의 뜻부터 살펴보자. 심상尋常은 찾을 심尋 자에 항상 상常 자로 항상 찾아야 할 책, 배우는 학생의 머리와 가슴에 아로새겨야 하는 교과서라는 뜻이다. 그리고 아동용은 ‘국사國史’, 교사용은 ‘일본日本국사國史’라 명명했다.
교사용 책자의 정확한 이름은 ‘심상소학 일본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이다. 이를 통해 볼 때 조선총독부 교육시책의 속내를 알 수 있다. 일제는 ‘조선사는 일본국사 속 조선사다’, ‘일본은 내지內地이고, 조선은 외지外地다’라고 칭할 정도로 영원한 지배를 염두에 둔 시책을 편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일본 국사를 배워야 할 일본천황의 백성일 뿐이었다. 그럼 목차부터 살펴보자.
일제가 만든 역사 교과서의 목차를 보면 그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일제가 만든 교과서 목차는 세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 대한인의 역사 강역을 조선반도로 한정해 기술했다. 대목차가 ‘상고시대의 조선반도’다. 일제는 한민족의 강역은 조선반도를 벗어난 적 없다고 각인시키고 있다.
둘째, 북부조선과 남부조선으로 나눴고, 일본부1, 2 단락을 강조해 고대 일본과 한국의 교류를 중점으로 기술했다.
셋째, 조선시대의 무능을 강조하고, 통감부 설치와 일한병합과 총독정치가 은총이라고 마무리했다.
한마디로 조선 상고사는 식민지로 시작해, 근대 일본에 의해 다시 식민지가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무능한 조선의 정치와 서양제국주의의 침략에 어려움을 겪던 조선의 백성들을 일이 구해주고, 비로소 조선반도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제의 조선병합은 고토회복이요, 은총이라는 것이다. 제 눈에 안경식으로 멋대로 쓴 일제 교과서는 조선사를 매도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칼을 찬 일본인 교사들은 정치목적을 가진 조선총독부 문부성 교과서로 무섭게 교육시켰다. 그때의 우리 선조들의 조선사 시간은 ‘잘못된 역사관을 머리에 수혈받는 고통의 시간’ 그 자체였을 것이다.
아동용
1. 이 책은 조선인을 교육하는 학교에서 문부성 보통소학교 국사를 가르칠 때, 보충해야 할 조선에 관한 사력事歷의 대체적인 요점을 기술한 것이다.
심상소학 국사보충 아동용 목차
1권
서언緖言
1. 상고시대의 조선반도
2. 삼한三韓
3. 문학·불교·공예
4. 일본부日本府 1
5. 일본부日本府 2
6.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7. 신라의 통일
8. 고려 1
9. 고려 2
10. 고려 3
11. 고려 4
부록
2권
1. 조선의 태조太祖
2. 태종太宗 및 세종世宗
3. 세조世祖
4. 조선의 문화
5. 사화士禍 및 붕당朋黨
6. 임진란壬辰亂
7. 병자호란
8. 영조英祖와 정조正祖
9. 대원군大院君의 집정
10. 강화도 사건과 임오 정변
11. 갑신정변과 갑오혁신
12. 대한大韓
13. 통감부統監府의 설치
14. 일·한日韓병합
15. 총독정치總督政治
부록
교수용
1. 이 책에 실려 있는 각 교재敎材의 「교수요지敎授要旨」를 실제 수업에서 가르칠 때 실수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2. 이 책에 실려 있는 각 교재의 「강의요령[說話要領]」은 대체로 교사가 실제로 학생들에게 강의해야 할 범위를 나타내 주는 것이므로, 때때로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경우라도 학생들에게 많은 사항을 가르치는 것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 (‘심상소학 일본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 이하 ‘교수참고서’)
다음은 아동용 교재의 상고시대의 목차를 보자. ‘상고시대의 조선반도와 일본부1, 2’의 하부 목차를 중심으로 검토해 보자.
일제는 상고시대 조선반도로 규정된 한국인의 영토를 둘로 나눈다. 한반도 북쪽은 소목차에서 보는 것처럼 중국의 식민지(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남쪽은 미개한 한韓 종족이 살다가 그 후 가야지역에 일본부가 설치되어 개화되고, 백제와 신라는 일본에 의지해 유지됨을 강조한다.
교수요지를 보자. 여기에 일제가 바란 조선의 역사관이 다 담겨 있다.
본 과課에서 조선반도의 연혁은 북부와 남부가 크게 다르다. 북부는 예로부터 중국에서 온 사람들이 통치했으며, 따라서 중국의 속국屬國 또는 영토였다는 사실을, 남부는 곧 조선인의 조상인 한족韓族의 거주지로서, 이 지방은 일찍부터 일본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교수참고서’)
그럼 그들이 주장하는 조선반도 북부의 기술을 보자.
위만조선: 그 후 위만衛滿이라는 자가 이 지방에 와서, 기자의 후계자인 준準을 쫓아내고 나라를 빼앗았다.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 시기에, 한나라의 무제武帝가 이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에 사군四郡을 설치했다.
한사군: 이로부터 수백 년 동안 반도의 대부분은 중국의 영지領地가 되었다. 한漢이라는 것은 그때의 중국 국명國名으로서, 무제가 조선을 취한 것은 우리의 가이쿠와(開化) 천황 【제9대】 때이다.
일제가 규정한 한반도 역사에는 단군조선은 없다. 대신 그 자리에 중국 이주민인 기자와 위만을 놓는다. 그리고 한무제의 공격으로 위만조선이 무너지고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있었던 것으로 기술한다.
그들의 핵심은 ‘이로부터 수백 년 동안 반도의 대부분은 중국의 영지領地가 되었다’라는 구절이다. 영지가 무엇인가? 영지는 한 나라의 주권이 미치는 땅, 점령한 지역을 말한다. 한마디로 한무제의 한사군 이후 수백 년 동안 조선인은 ‘중국의 식민지로 살았다.’는 것을 각인시키고 있다.
그럼 ‘수백 년 동안’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이는 교사용의 한사군漢四郡 구절에서 알 수 있다.
한반도 북부 대동강 평양을 중심으로 한무제 때 한사군이 설치되고 낙랑이 313년 고구려에 멸망당할 때까지 420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그럼 한반도 남부는 어떻게 가르쳤는가?
(‘교수참고서’)
일제는 한반도 남부에 소국들이 우굴우굴하다 겨우 백제국, 신라국, 가라국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가라 = 임나제국’이라고 규정한다. 지난 호에 살펴봤듯이 임나는 대마도였다. 그런데 가라 = 임나라는 논리 비약을 통해 역사 사실을 능구렁이처럼 왜곡 날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삼국의 역사를 기술하며 그들이 원하는 카드인 진구황후를 등장시켜 임나일본부를 집어넣는다. 이를 통해 삼국(고구려^백제^신라)의 흥망도 전부 진구황후가 세운 일본부, 일본의 힘 때문이라고 기술하며, 신라, 고구려, 백제는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고 왜곡하고 있다.
본과에서는 일본부日本府를 중심으로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이 균형을 이루어 정립鼎立하고 있던 시대의 상황을 가르치며, 북쪽에서 일어난 고구려에 맞서, 한족韓族의 여러 나라들이 일본의 힘으로 그 국가를 보전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일본과 삼국의 관계
진구(神功) 황후는 신라를 정복하신 다음, 일본부日本府를 임나에 설치하고, 삼한의 영토를 다스리셨다. 이 때문에 신라, 고구려, 백제는 모두 일본에 조공을 바쳤으며, 또한 신라와 백제 두 나라는 일본에 볼모를 두어 그 진심을 나타냈다.
광개토왕
닌토쿠 천황 무렵에, 고구려의 광개토왕廣開土王(제19대)이 왕성하게 국토를 확장했으며, 백제와 전쟁을 벌였다. 그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제20대)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백제를 공격하여, 그 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왕을 붙잡아 참수했으며, 고구려의 영토를 남쪽으로 크게 넓혔다. 이 때문에 백제와 신라는 모두 두려워하여, 힘을 합쳐 고구려를 방어했다. 이때 이들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다행히 고구려에 멸망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일본의 힘 때문이었다.
삼국의 수도
백제는 이후로 쇠퇴했는데, 일본의 도움으로 점차 그 나라를 유지했으며, 도읍을 오늘날의 광주廣州(경기도)에서 공주公州(충청남도)로 옮겼고, 그 후 60여 년 만에 다시 부여扶餘(충청남도)로 옮겼다. 백제 왕이 불상을 일본에 바친 것이 이 무렵의 일이다. 고구려의 장수왕 때, 조선반도의 대부분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는데 장수왕은 도읍을 만주 땅에서 평양平壤(평안남도)으로 옮겼다. 신라는 처음부터 경주慶州(경상북도)에 도읍을 정했는데, 끝까지 변함이 없었다.
일본과 신라의 관계
신라는 일본에 복속된 뒤에도 항상 임나제국을 정복하려고 했으며, 또한 일본에 대한 조공을 게을리 하자, 일본은 여러 차례 이를 정벌했다.
신라의 흥기
신라는 법흥왕法興王(제23대) 때부터 국력이 점차 흥성했으며, 진흥왕眞興王(제24대) 때에는 백제와 힘을 합쳐 고구려의 남부 지방을 공격하여 빼앗았으며, 다시 그 기세에 편승하여 일본부의 보호를 받고 있던 임나제국을 빼앗았다. 이때가 바로 긴메이 천황 시대이다.
수·당과 삼국의 관계
그 후 여러 대代가 지나고 수隋라는 나라가 일어나 중국을 통일했으며, 나아가 반도를 병합하려고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그 군대가 돌아가다가 살수薩水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에게 크게 패했다. 이어서 당唐이 일어났는데, 국력이 대단히 강해지자, 삼국은 모두 당의 속국이 되었다. 특히 신라는 이 나라에 가장 잘 복종했으며,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교수참고서’)
일제는 근세의 조선사를 기술하며 식민사학의 논리를 잊지 않는다. 고대에도 스스로 서지 못한 미개한 조선의 백성들은 근대에도 실수만 거듭한 실패한 민족이라 칭한다.
의도적으로 조선의 붕당정치를 집중기술하고, 구한말에는 ‘조선의 외교적 실책이 거듭’되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일본이 ‘동양의 평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고, 통감이 국정 지도를 위해 노력했으나 구폐가 심하여 어쩔 수 없이 병합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일본 제국주의가 원하는 조선의 역사 틀이요, 日·韓합방의 정당성을 강조하려 한 그들만의 논리였다. 화가 나지만 그들의 교수요지를 또박또박 읽어보자.
본과에서는 메이지(明治) 천황이 조선에 대해 내리신 은혜恩惠와 메이지 천황과 지금의 천황 폐하가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평등하게 사랑하신 거룩한 뜻을 알려 주고, 총독總督 정치政治의 방침과 그 실적을 분명히 하여, 구시대에 비해 조선 인민이 얼마나 행복해졌는가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설치
일·한日韓병합이 이루어지자 메이지 천황은 조칙을 내려 한국을 조선이라고 고쳐 부르고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하여 이를 다스리셨다.
메이지(明治) 천황의 은혜
메이지 천황은 전前 한국 황제 및 그 일족을 우대했으며, 또한 조선귀족령朝鮮貴族令을 제정하여 공훈이 있는 자들에게는 작위를 주고, 일반 조선인들에 대해 갖가지 은전恩典을 베푸셨다. 메이지 천황과 더불어 지금의 천황께서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평등하게 사랑하시는 성의聖意로써 민중을 어루만져 주신 것은 우리가 하루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총독의 새로운 정치
메이지 43년 10월에 자작子爵(후에 백작伯爵이 됨)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가 처음으로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총독은 먼저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확실히 하여 인민을 안도하게 하고 산업을 부흥시키며 교통을편리하게 하고 교육을 발전시키며 질병을 구제하는 등 민력의 회복과 민생의 행복에 힘을 쏟았다. 이 밖에 조선의 개발을 위해 시설할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서두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이쇼(大正) 4년 9월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를 경성에 열어 개량과 발전의 실적을 국내외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총독 정치의 방침
그 후 여러 차례 총독이 바뀌었지만, 조선의 부원富源을 개척하고 그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인민의 안녕과 행복을 도모하는 방침은 결코 바뀌지 않았다. (‘교수참고서’)
그리고 일제가 원하는 조선인 학생들의 각오로 마무리되고 있다.
이제 조선은 점차 각 방면에서 진보하고 있고, 과거에 여러 차례 반도의 역사에서 나타났던 것과 같은, 외국의 억압을 받는 일이 없어졌다.
최근에 주변 국가들이 소란하게 와해되는 비운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안정되어 태평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정치의 결과로서, 천황 폐하의 위광과 은덕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하루라도 이를 잊어서는 안 되며, 일본 국민이라는 본분을 다하고 일치 협력하여 제국의 발전에 공헌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부분을 읽다 손이 떨리고, 울분이 치솟는 것을 느낀다. 과연 그들의 헛소리처럼 ‘일제강점기 외국의 억압을 받는 일이 없어졌는가? 조선이 안정되고 태평을 누렸는가?’ 묻고 싶다. 수백만이 주검이 된 그런 세월이 어찌하여 태평세월이 되는 것인가?
그때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일본 국민이라는 본분을 다하고 일치 협력하여 제국의 발전에 공헌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총칼 든 강도의 헛소리 교과서를 읽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식민지 조선 백성의 한스러움에 치를 떨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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