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 년 전 스물다섯 살 난 망국의 청년이 지금의 러시아 우스리스크 지방에서 발해의 유적을 찾아 나섰다. 산운 장도빈(汕耘 張道斌)이 그였다. 당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한 후 ‘권업신문’에 기고하면서 때로 단재 신채호가 와병 중일 때는 주필의 역할을 대행하기도 했다. 그와 단재의 만남은 나라가 망해가던 1908년 즈음 스물한 살이던 산운이 여덟 살 위의 단재를 주필로 모시고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위원으로 활약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그는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독립혼을 되살리려면 국사, 특히 고대사 연구에 매진해야 한다고 생각한 터였다. 아마 단재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단재가 고조선과 부여 및 고구려사에 보다 관심 가졌다면, 산운이 좀 더 집중한 것은 발해사였다.
# 조선 정조 때 북학파 학자였던 유득공이 1784년 『발해고(渤海考)』를 쓴 것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발해가 부여의 풍속을 간직하고 고구려의 옛 영토 위에 세워진 고구려의 후예국이며 신라와 더불어 남북국시대를 이룬 우리 민족의 나라였음을 최초로 천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득공은 직접 발해 땅을 밟아보진 못했다. 발해를 찾아서 나선 것은 그로부터 128년 후에 산운 장도빈이 한 일이었다. 그는 문헌연구에 머물지 않고 발해의 고토를 찾아 직접 현장으로 나섰던 것이다.
# 꼭 반세기 전 당시 우리 지성계를 움직이던 『사상계』 1962년 4월호에는 ‘지나간 20대들’이란 타이틀 아래 산운의 글 ‘암운 짙은 구한말’이 실렸다. 당시 75세였던 그가 50년 전 자신의 20대를 돌아보며 쓴 글이다. 산운이 죽기 일 년 전에 쓴 이 글을 통해 우리는 그가 발해 땅을 찾아나선 까닭과 개략적인 행적을 추정해볼 수 있다. 산운은 군대가 해산되고 외교권마저 박탈당한 채 경술국치로 치닫던 망국의 궤적을 직시하면서 국사연구에 매진했다. 아울러 그는 도산 안창호가 선창하고 양기탁, 이갑, 이동휘, 박은식, 이동녕, 이회영, 이승훈, 김구 등 애국지사들이 총집결한 신민회에서 활동하는 한편 오성학교 학감으로 미래의 애국자를 키우기 위한 교육에 헌신했다. 하지만 학교가 총독부에 의해 문을 닫게 되자 1912년 망명길에 올랐다. 그가 망명한 곳은 다름아닌 해삼위(海蔘威), 지금의 블라디보스토크였다. 그는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으려면 먼저 우리 본래의 웅혼한 혼과 정신을 일깨워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산운은 연해주 일대를 떠돌며 잊혀진 나라, 해동성국 발해를 찾아 나섰던 것이다. 그는 반 토막 난 남국(南國) 신라에 갇히지 않고 역사 속에 잠들어 있던 북국(北國) 발해를 깨웠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백 년 전 연해주의 허허벌판을 홀로 헤매었을 스물다섯 살 청년의 뜨거운 열정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
# 지난 15일 오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소재 연방극동대학교 한국학대학 내의 장도빈기념관 소강당에서 블라디미르 쿠릴로프 연방 극동대 부총장(연방대 승격 전엔 총장)은 “연해주 지역의 첫 국가는 발해였다”고 언명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몸에는 전율이 일고 눈가엔 이슬이 맺혔다. 독도가 일본 땅일 수 없듯 발해가 중국의 변방사일 수 없는 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때 우리의 잊혀진 뿌리였던 발해를 찾아 나선 젊은 산운 덕분 아닌가! 기념관을 나서며 옛 러시아 해군의 구식대포와 대포알을 녹여 만들었다는 산운의 흉상 앞에 서서 그를 바라보며 이렇게 되뇌었다. “백 년 전 그가 발해유적을 찾아나선 까닭이 천 년 전 옛 땅에 대한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었으리. 그보다도 미래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제시 때문이었으리라!”
# 천 년 전에도 우리는 하나가 되지 못한 채 남의 신라와 북의 발해로 나뉘어진 남북국시대였다. 그리고 백 년 전엔 아예 망한 나라였다. 하지만 산운 같은 이들이 무너진 나라를 다시 일으킬 꿈을 안고 작지만 의미 있는 역사의 혼불을 되살리려 동분서주했기에 오늘이 있고 내일 또한 열려 있다. 정말이지 역사는 살아있는 미래다!
정진홍 논설위원
역사뉴스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역사는 미래다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역사는 미래다
[중앙일보] 입력 2012.10.20 00:16정진홍
논설위원